기황후

기황후 1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3. 7. 20. 06:00

  


   기황후 1화 조정우 역사소설

 

   고려 충혜왕 2년 단오날. 기품있는 기와집이 늘어선 저택의 드넓은 마당을, 격구복 차림의 소녀가 말을 끌고 가로지르고 있었다. 열대여섯 쯤 되었을까. 길게 땋은 머리를 격구 모자 안으로 집어 넣은 소녀는 마당에 있는 하인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대며 대문을 향했다. 소녀가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삼베옷을 입은 소녀가 따라나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씨!"

   백색 격구복을 입은 소녀는 해주 고을의 유지 기자오의 딸 기완자로, 이웃 철원 고을과의 격구 시합에 나설 참이었던 것이었다. 삼베옷을 입은 소녀는 기완자의 하녀 월매로, 주인 마님으로부터 기완자가 격구장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라 명을 받은 터였다. 

   십 수 년 전, 선왕 충숙왕이 여인들이 격구하는 것을 금지시킨데다 명문 가문을 자처하는 해주 기씨 가문의 여식이 사내들의 틈바구니에서 격구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당에서 오라버니들과 격구를 하며 자라온 기완자는 고을에서 격구 시합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 몰래 시합에 참가해왔던 것이다. 

   기완자가 들은 척도 안하고 말에 올라타자, 월매가 말안장을 잡으며 만류했다. 

   "격구장에 가시려고요? 주인 나리께서 아시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옵니다."

   "어찌 이리 호들갑이냐? 썩 비키거라."

   주인 아씨의 노여운 목소리에도 월매는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되옵니다. 이러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나서 혼삿길이 막히시면 어쩌려고요? 행여라도 아씨께서 외간 사내들과 격구 시합을 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혼삿길이 막힐 수 있다 하질 않사옵니까. 마님께서 하신 말씀을 못들으셨사옵니까?"

   순간 기완자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월매를 쏘아봤다. 혼삿길이 막힐 수 있다는 말이 거슬렸던 것이다. 

   "설마하니, 내가 시집갈 데가 없을라구."

   주인 아씨의 역정에 월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제 말은...... 사대부집에 시집가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 말이옵니다......" 

   기완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사대부집 졸장부에게 시집가느니, 차라리, 아버님을 모시고 살겠다......"

   "졸장부라뇨? 그 무슨 망측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완자가 말을 몰아 나가자, 월매는 허겁지겁 뛰어 뒤를 쫓아갔다. 

   사대부. 여인들이 격구 시합에 나가는 것을 금한 자들이 바로 사대부가 아니던가. 

   기완자는 분노를 삭히며 질풍처럼 말을 몰아 순식간에 격구장에 당도했다. 구경꾼들이 구름때처럼 몰려있어 격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기완자는 말안장에 매인 장시(격구채)를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길을 열어주시오."

   기완자가 격구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해주 고을의 주장 박불화가 장시를 높이 들어 기수 교체 신호를 보내자, 기수 하나가 밖으로 나가고 기완자가 대신해 들어갔다. 

   넓이가 수백 보나 되는 평지에서 백의를 입은 해주 고을과 청의를 입은 철원 고을의 기수들이 고을의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접전 중에 열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철원 고을의 소년이 전광석화처럼 해주 고을의 기수들을 제친 후 공을 구문 안으로 집어 넣자, 응원 온 철원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영이가 최고다!"

   해주와 철원 두 고을 처녀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준수한 소년의 이름은 최영이었다. 손을 들어 고을 사람들의 환호성에 답례하는 최영의 모습에 기완자는 가슴이 떨렸다. 

   '이웃 고을 철원에 이와같은 인물이 있었구나!'

   순간, 백옥처럼 하얀 기완자의 얼굴이 최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기완자는 최영의 눈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이러한 기완자를 본 최영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내가 어찌 저리도 수줍단 말인가.'

   최영은 모자를 푹 눌러쓴 기완자를 수줍은 미소년으로 봤던 것이다. 기완자가 힐끔힐끔 최영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기완자에게 다가왔다. 

   "완자야, 수고했다. 이제 이 오라버니들에게 맡기고 그만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

   기완자의 큰 오라버니 기철이었다. 최영의 눈부신 활약을 보자 치열한 경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철은 늘 애지중지 아끼는 누이동생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아니옵니다. 소녀, 끝까지 뛰고자 하옵니다."

   한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누이동생의 성격을 아는 터라, 기철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러났다. 이윽고, 반격에 나선 해주 고을의 주장 박불화가 철원 고을의 기수들을 제치며 공을 몰아 나가자, 최영도 말을 몰아 나가며 박불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그 순간, 기완자가 쏜살처럼 말을 몰아 질주하며 장시를 높이 들어 자신에게 공을 보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를 본 박불화가 재빨리 공을 후려쳐 기완자 쪽으로 보냈다. 기완자는 때굴때굴 굴러오는 공을 받아 구문을 향해 힘껏 후려쳤다. 수십 보나 떨어진 거리였지만, 공은 마치 빨려가듯이 구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우리 해주 고을은 천하무적이다!" 

   해주 고을 사람들이 기완자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자, 기완자는 장시를 들어 환호성에 답례했다. 기완자의 격구술은 가문에서 으뜸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오라버니들과 함께 격구를 해온 기완자는 어느새 오라버니들의 격구술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 년간, 기완자는 오라버니들조차 모르게 고려 최고의 격구 기수 박불화로부터 격구술을 전수받아왔던 것이다. 천하절색 미모의 기완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박불화로서는 격구술을 가르쳐 달라는 그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합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15푼 대 15푼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던 중에 이번에도 최영이 질풍처럼 해주 고을의 기수들을 제치고 구문 안으로 공을 집어 넣었다. 30푼 대 15 푼. 이어진 공방전 끝에 박불화가 상대쪽 구문을 향해 비호처럼 공을 몰아가자, 기완자가 말을 몰며 장시를 높이 들어 신호를 보냈다. 박불화의 시선이 기완자에게 향하는 것을 본 최영은 재빨리 말머리를 기완자 쪽으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박불화는 이번에도 공을 기완자 앞으로 보냈다. 박불화가 보낸 공을 기완자가 후려치려는 찰나, 어느새 최영이 말을 달려와 앞을 가로막아섰다. 기완자는 공을 후려치려다 앞을 가로막은 최영과 부딛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악!"

   최영은 다급히 말에서 뛰어 내려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완자에게 달려갔다. 

   "괜찮소?"

   "괜찮습니다."

   최영이 기완자를 일으키려 손을 내밀자, 기완자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곱디 고운 기완자의 손을 본 최영은 사내의 손이 어찌 이리도 고울까 의아했다. 최영이 기완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는 순간, 누군가 최영을 거세게 밀어젖히며 다가왔다. 

   "괜찮은 것이냐?"

   박불화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완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우두커니 서있는 기완자에게 최영이 두손을 모아 사과의 뜻을 표했다. 기완자가 최영의 사과에 답례하려고 두손을 모으려는 순간, 누군가 기완자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제 그만 쉬거라."

   기완자의 아버지 기자오였다. 기완자보다 앞서 격구장에 와서 구경하고 있던 기자오는 딸의 종횡무진 활약에 흐믓해 하다가 딸이 낙마하자 깜짝 놀라 부랴부랴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기완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기자오가 출타 중이라 마음놓고 격구장에 온 것인데, 여기에 있을 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으랴. 기완자는 말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온몸이 욱씬거렸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자오를 따라 격구장 밖으로 나갔다. 이내 기자오 집안의 하인들이 가마를 대령했다. 

   "어서 가마에 타거라."

   기완자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같은 고을 사람도 아닌 최영을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버님...... 저는 괜찮사오니, 구경이라도 하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정녕 괜찮은 것이냐?"

   "정말로 괜찮사옵니다."

   기완자가 멀쩡하다는 듯 팔을 들어보이자, 기자오는 안도하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이래 고려의 왕들은 기마술을 연마하는 운동으로 여겨져온 격구를 장려하기 위해 매년마다 뛰어난 격구 기수들을 선정해 큰 상을 내려왔다. 딸이 비록 여인의 몸이라 상을 받지는 못할 지언정 어찌 자랑스럽지 않으랴. 기자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면, 네 뜻대로 하거라."

   시합이 재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불화가 보란듯이 공을 구문 안에 집어 넣은 후 기완자 쪽을 바라보았다. 환호하는 고을 사람들 사이에서 멀뚱히 서서 최영에게 시선을 향한 기완자를 본 박불화는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불화는 공을 몰며 질주하는 최영의 앞을 막아섰지만, 최영은 말머리를 돌려 박불화를 제치고 힘껏 공을 후려쳤다. 공은 구문 안으로 정확히 들어가 다시 철원 고을이 앞서갔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숨막히는 접전이 이어졌지만, 기완자는 이미 승부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기완자는 오로지 최영이 무탈히 격구 시합을 마치길 바랄 뿐이었다. 

   '하느님, 부디 최영 도령을 가호해 주소서!'

   기완자는 최영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천생연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인연이던가! 비장(한나라 시대 명장 이광의 별명)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늠름한 기상과 천하를 호령할 듯한 위풍당당한 모습, 이야말로 기완자가 기다려오던 사내가 아니던가! 

   이때, 기철로부터 건네받아 박불화가 후려친 공이 구문을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최영이 맹활약한 철원 고을이 해주 마을을 60푼(구문 안으로 들어가면 15푼, 구문 옆으로 지나가면 10 푼) 대 40푼으로 이겼다. 50푼을 먼저 득점하는 쪽이 이기는 시합이었는데, 45푼 대 40푼이 된 상황에서 최영이 네번 째로 공을 구문 안으로 넣어 시합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고려 최고의 격구 기수 박불화가 있는 해주 고을의 승리가 예상된 터라 철원 고을에 승리를 안긴 최영은 한순간에 영웅이 되었고, 이미 딸의 마음을 눈치챈 기자오는 고을의 유지로서 최영을 집으로 정중히 초청하였다. 

   일찌감치 최영을 사위로 낙점한 기자오는 초청에 응해 객실에 들어온 최영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열여섯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의젓한 최영의 모습에 기자오는 천하제일의 사윗감을 얻었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할 뿐이었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갈 무렵, 문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어르신, 마님께서 어르신을 뵙고자 하시옵니다."

   기자오의 부인 이씨는 남편이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최영을 사위로 삼으려고 한다는 말을 아들 기철로부터 전해듣자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은 종6품의 사헌부 간관이라는 한미한 벼슬인데다 논밭 하나 없는데, 애지중지 아껴온 막내딸을 시집보내려는 남편의 뜻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기자오가 사랑채로 들어오자, 부인 이씨가 따지듯이 물었다. 

   "영감께서 마음에 둔 사윗감이 이웃 고을의 최영이라는 말이 정녕 사실이옵니까?"

   "그렇소. 오늘 정한 일이라 미처 부인께 알려주지 못했던 것이니, 개의치 마시구려."

   "최영의 아비가 누구인지 알고나 계시옵니까?"

   "청렴결백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사헌부 간관 최원직이 아니오."

   "종6품의 한미한 관직인데다 논밭 하나 없다는데, 어찌 딸을 그런 한미한 가문에 시집보내시려 하시옵니까?"

   "사위가 가난하면 우리가 도와주면 될 것이 아니오? 최영이야말로 천하의 둘도 없는 사윗감이니 쓸데없는 걱정마시구려."

   기자오가 부인과 말씨름을 하는 사이에 최영은 아버지 최원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객실을 나섰다.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 하니, 주인장께 그리 전해드리게나."

   곱게 단장한 채 마당에서 객실의 동정을 살펴보고 있던 기완자는 최영이 떠나면 혼처를 다른 집안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완자는 대문으로 향하는 최영에게 다가가 두손을 모아 인사한 후 말했다. 

   "소녀의 아버님께서 도령께 여쭐 말씀이 있는 줄로 아오니, 잠시 기다리시지요."

   순간,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기완자의 자태가 최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곱디 고운 외모며 여린 목소리하며, 최영은 이제야 아까 격구 시합 때 자신과 부딪쳐 낙마한 자가 그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이 어찌 그토록 격구술이 뛰어날까 싶어 의혹의 눈초리로 물었다.  

   "그대가 정녕...... 저로 인해 낙마했던, 그 분이십니까?"

   "그러하옵니다."

   "이 몸이 낭자께 실례를 끼쳤구려. 부디 용서해 주시오."

   최영이 두손을 모아 사과의 뜻을 표시하며 용서를 구하자, 기완자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용서라뇨, 가당치 아니한 말이옵니다. 격구를 하다보면 부딛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이제 그만 그 일은 잊으시지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기완자도 최영도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천하에 비할 데 없는 천생연분의 숙명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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