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기황후 2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3. 7. 27. 06:00

  

   

   기황후 2화 조정우 역사소설


   기완자는 한동안 어쩔 줄 몰라하다 간신히 가슴을 진정시키고 객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도령께서는 아버님의 손님이시니, 아버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소녀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최영은 자신을 모시겠다는 기완자의 말에 몹시 당황했지만, 기완자가 계속 권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의 뜻을 따르겠소."

   최영이 먼저 객실로 들어가자, 기완자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따라 들어갔다. 기완자는 최영과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후 술상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며 말했다. 

   "패자인 소녀가 승자인 도령께 축하주를 올리겠습니다."

   격구 시합이 끝나면 패배한 쪽이 승리한 쪽에 술잔을 올려 승리를 축하해주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최영이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남녀유별이거늘, 소생이 어찌......" 

   기완자가 술병을 기울이자, 최영은 엉겁결에 술잔을 내밀어 술을 받았다. 최영이 마지못해 술잔을 비우자, 기완자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승리를 경하드립니다."

   "고맙소."

   순간 기완자의 눈이 최영의 눈과 마주쳤다. 최영의 눈길을 느낀 기완자는 갑자기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방문을 나선 기완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오가 뒷짐을 진 채 방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한 말을 아버지가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완자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님...... 소녀는 이만 가보겠나이다."

   기완자가 인사를 올린 후 떠나자, 객실에 들어선 기자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니옵니다. 실은 어르신의 따님께서 말동무가 되어 주셔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나이다."

   화통한 성격의 기자오는 단도직입적으로 혼담을 꺼냈다. 

   "내 딸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 노부는 자네와 내 딸을 짝지어 주었으면 하네."

   최영은 실로 뜻밖의 혼담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냉정을 찾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르신께서 변변치 못한 소생을 사위로 맞겠다 하시오니, 감당할 자신이 없나이다."

   "너무 겸양하지 말게나. 자네의 가문은 집현전 태학사를 배출한 명망이 높은 가문일 뿐 아니라 내, 오래 전부터 그대의 부친은 청렴결백한 관원으로 존경해 마지 않았다네. 내 보아하니, 내 딸도 자네에게 마음이 있는 듯 하니, 내 딸이 부족하다 여기지만 않는다면, 자네의 부친에게 혼담을 청할까 하네."

   예종 때 집현전 태학사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인 최영은 문신의 가문에 태어났음에도 몽고에게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뜻을 품고 무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단 한번도 여인을 마음에 둔 적이 없는 최영이었지만, 기완자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듯 하다는 기자오의 말을 듣자, 감격에 벅차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변변치 못한 소생이 어찌 어르신의 귀하신 따님을 마다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혼사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

   기자오는 최영도 자신의 딸에게 마음이 있음을 눈치채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최영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내, 곧 자네의 부친에게 혼담을 넣겠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철원의 어느 초가집. 오십 쯤 되어 보이는 중년 사내가 싸리로 엮은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영이가 어찌 여지껏 아무 연통도 없는걸까.' 

   중년 사내는 최원직이었다. 최원직의 아내 지씨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10년. 식솔이라곤 아들 최영과 딸 최희 뿐인 최원직이 아들의 소식을 알아보려 집을 나서려는 순간,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최영은 말에서 뛰어 내려 아버지 최원직에게 인사를 올렸다. 

   "연통도 없이 아버님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기 그지 없나이다."

   아들이 돌아온 만큼 최원직은 구태여 늦은 이유를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다. 너도 이제 장성하였거늘, 일일이 이 아비에게 연통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어여 들어가 쉬거라."

   아버지께 송구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최영에게 누이동생 최희가 다가와 밝은 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라버니, 승리를 경하드리나이다."

   올해로 열셋인 최희는 동네 처녀들과 해주까지 응원을 갔다가, 혼자 네 골을 넣으며 맹활약한 오라버니를 본 터라 자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최원직은 딸이 축하를 건내자, 그제야 아들의 손을 잡으며 축하했다. 

   "이 아비가 깜박 했구나. 승리를 축하한다. 이 아비가 일이 있어 구경은 가지 못하였으나, 희에게 오늘 시합에 대해 들었느니라. 수고가 많았다."

   한평생을 문신의 길을 걸어왔던 최원직은 아들이 하루빨리 무인의 길을 버리고 문신의 길을 가기를 바랐을 뿐, 격구 시합의 승리 따위엔 관심이 없었지만, 딸로부터 아들의 종횡무진한 활약을 들은 터라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눈치챈 최영은 마음이 무거웠다.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운 최영은 눈을 감은 채 선녀같은 자태의 기완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낭자,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소. 내가 그대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소.'

   며칠 후에서야 기자오가 보낸 매파가 찾아와 혼담을 전했다. 이제야 아들이 며칠 전에 늦게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된 최원직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우리 집안이 기씨 집안에 크게 미치지 못하여, 가당치 아니한 혼담이라 받을 수 없다고 전해주게나."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을 아는 최영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매파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주와 철원을 통틀어 미색이 기완자를 따를 여인이 없거늘, 사헌부 간관이라는 한미한 관직의 최원직이 해주 고을의 유지인 기자오의 혼담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지요."

   매파가 불만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웃 고을이라 해도 수 십 리나 되는 제법 먼 길을 걸어왔는데, 헛걸음을 했으니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매파가 떠나자, 최원직이 최영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비를 원망하지 아니하느냐?"

   "아니옵니다. 소자 또한 아버님의 말씀이 지극히 옳다 여기옵니다. 기낭자는 부유한 가문이니, 격이 맞는 가문에 시집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하옵니다."

   최원직은 아들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비에게 속내를 감춘 아들의 모습에 최원직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리 생각한다면 다행이구나."

   최영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최원직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무능한 아비를 용서하거라.'

   최원직은 아들이 처가집 덕을 본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 자신이 생명처럼 사랑했던 부인 지씨가 가난한 자신의 집안에 시집와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것이 엊그제 같아 부유한 가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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