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기황후 3화 조정우 장편소설

조정우 2013. 12. 4. 06:00


   기황후 3화 조정우 장편소설


   저녁 무렵,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기완자는 방문을 살며시 열어 뒷짐진 채 마당을 거닐던 기자오의 동정을 살폈다. 불현듯 기자오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객실로 향하는 것을 보니, 매파가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기완자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버선발로 마당에 나와 때마침 눈에 뜨인 월매에게 물었다. 

   "매파가 돌아온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월매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조만간 어르신께서 이리로 오실 터이오니......"

   방으로 돌아온 기완자는 자리에 앉은 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왜 이리도 초조한 걸까.'

   기완자가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참으로 늠름했던 최영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당에 있던 월매가 나직이 외쳤다.

   "아씨! 어르신께서 납시옵니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고 있던 기완자는 급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기자오의 표정이 어두워 기완자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혼담을 거절당했다더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일찍부터 천하절색의 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녀가 그토록 바랐던 혼담이 거절당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자오는 충격으로 돌처럼 굳어 있는 기완자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인연이 아닌 듯 하니, 이제 잊거라."

   기완자가 고개를 흔들며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되옵니다. 결단코 아니되옵니다...... 기다릴 것이옵니다. 아버님...... 결단코, 이 인연을 잊을 수 없는, 소녀의 마음을 굽어 살펴주소서......"

   기완자는 눈물을 글썽인 채 아버지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기자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어찌하랴! 이 아비도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버님......"

   기완자는 기자오에게 안긴 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로부터 기완자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몸져 눕고 말았다. 달포가 지날 무렵, 겨우 기운을 차린 기완자는 월매를 대동하고 대문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기완자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말을 몰고 나오거라."

   최영의 집을 찾아가 혼담을 거절한 최원직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월매가 우물쭈물하자, 기완자는 눈에 쌍심지를 켜며 다그쳤다.

    "어서!"

   어쩔 수 없이 말 한마리를 몰고 나온 월매는 기완자에게 말고삐를 건네주며 말했다.

   "쇤네도 아씨를 따라가겠나이다."

   기완자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에 훌쩍 올라타자, 월매도 따라 올라탔다. 

   이때, 글공부 중이었던 최영은 마당에서 인기척이 나자, 최원직이 돌아온 줄 알고 방문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나오려는 찰나, 깜짝 놀라 외쳤다. 

   "기낭자!"

   기완자는 부끄러운 듯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낭자가 예까지 어인 일이시오?"

   최영이 가까이 다가오자, 기완자는 더욱 고개를 숙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령의 부친께 아뢸 말씀이 있어 왔소......"

   고개를 숙인 기완자의 얼굴은 달포 전에 보았을 때 건강했던 혈색과는 달리 중병에 걸린 듯 창백해 보였다. 최영은 가슴이 아려왔다. 

   "아버님은 출타 중이시니......"

   최영은 문창지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초라한 객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더운 여름이라 객실, 안방, 자신의 방도 낡고 찢어진 문창지를 그대로 둔 채 지냈는데, 기완자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 어찌 알았으랴.  

   최영이 난감한 얼굴로 주저하다, 순간 문창지를 새로 바른 누이동생 최희의 방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최원직이 몹시 사랑했던 아내 지씨의 분신처럼 애지중지하는 자신의 딸을 위해 문창지를 손수 바른 방이었다. 최영은 하녀 소희를 불러 때마침 집에 없는 누이동생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낭자를 안으로 모시거라."

   기완자를 누이동생의 방으로 인도한 후 밖으로 나온 소희에게 최영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낭자께 대접할 만한 차가 있느냐?"

   "송구하오나, 냉수 밖에는......"

   최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냉수 한잔을 차려 올리거라."

   소희가 냉수 한잔을 상에 차려오자, 기완자는 단숨에 벌컥 들이키고는 마당을 향해 말했다. 

   "참으로 좋은 차였소. 고맙소."

   최영은 멍하니 있다가 순간, 기완자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냉수를 차라고 말한 의도를 깨닫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최영이 재빨리 응수했다. 

   "먼 발걸음을 하신 낭자께 좋은 차를 대접하지 못해 송구할 뿐이오."

   "내 이보다 좋은 차를 대접받은 적이 없거늘, 송구하다니요. 너무 겸양치 마시오."

   최영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기완자는 벽에 걸린 가야금을 살펴보더니 침묵을 깨고 말했다. 

   "가야금 한 곡조 타도 괜찮겠소?"

   최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도 가야금의 명인인 아버지 최원직에 못지 않게 가야금에 뛰어났다. 기완자의 가야금 솜씨가 궁금해진 최영이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낭자의 뜻대로 하시오. 다만, 오래 쓰지 아니한 것이라, 이 몸이 가야금을 조율하여 드리리다."

   누이동생의 방에 있는 가야금은 어머니 지씨의 가야금을 물려 받은 것으로, 지씨가 세상을 떠난 지 십여 년 간 한번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말을 마친 최영이 방으로 성큼 들어오자, 기완자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다. 최영은 가야금을 무릎에 놓고 능숙한 솜씨로 조율하기 시작했다. 십년 전, 최영이 겨우 여섯살 때 어머지 지씨가 가야금을 켜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완자는 숨을 죽인 채 바라보다 이러한 최영의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아려왔다. 기완자에게 가야금을 건네준 최영이 일어나려는 찰나, 기완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잠시만......"

   최영이 다시 자리에 앉자, 기완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사연이 있는 가야금인 듯 하오. 실례가 되지 아니한다면...... 사연을 여쭈어도 되겠소?"

   최영이 가야금을 쳐다보며 회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세상을 떠난, 소생의 어머님께서 누이에게 물려준 것이오."

   기완자가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모르고 귀한 가야금을 타려 하였으니, 실례가 많았소."

   최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낭자가 이 가야금을 타면, 필시 저승에 계신 어머님이 기뻐하실 것이오."

   최영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이토록 기품있고 아름다운 며느리를 마다할 어미가 있으랴. 기완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다. 이내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모곡'이었다. 어머님을 여읜 최영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려는 것일까. 애잔하게 마음을 적시는 가야금 소리에 최영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가야금을 타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모곡'에 이어 '가시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담은 곡조였다. 백옥처럼 고운 섬섬옥수로 가야금을 뜯는 기완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기완자의 애절한 눈빛이 최영을 사로잡았다. 최영은 그녀가 곡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낭자, 나 또한 그대를 진심으로 사모하나, 아버님께서 그대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자식된 도리로 어찌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소.'


링크 글 : 기황후 19화 (네이버 웹소설 연재 중!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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