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조정우 역사소설 기황후 출간!

조정우 2013. 12. 14. 09:00

  조정우 역사소설 기황후 출간! 교보문고 판매처 


  조정우 역사소설 기황후 출간!


   [김춘추, 대왕의 꿈], [장옥정]에 이어 제 세번째 장편소설 [기황후]가 12월 13일, 어제 바로 출간되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7월 20일 '기황후'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했고, MBC가 8월 14일에 드라마 제목을 '화투'에서 '기황후'로 변경했고, 지난 SBS드라마 장옥정도 드라마에서 제목을 정하기 이전인 2012년 11월에 '장옥정'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했지요.  

   제가 드라마 제목을 따라한 것이 아닐까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 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기황후'가 네이버 웹소설에서 연재 중이니,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링크  →  기황후 네이버 웹소설 연재


   아시다시피,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에 편입시키려했던 입성론을 막은 사람은 다름이 아닌 기황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황후는 1356년 공민왕이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지 8년 만인 1364년 1만의 병력으로 고려를 정벌토록 하였지요.

   이로 인한 기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소설을 쓰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기황후가 가문의 멸문에 대한 복수로 조국인 고려에 몽고 군대를 파병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곧바로 공민왕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 서찰을 보낸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까요.

   그해 원나라가 공민왕을 복위시키는 조치와 함께 공민왕에게 사과 서찰을 보냈는데, 공민왕은 누명이 벗겨져 몹시 기쁘다는 서찰로 답례하였고, 이는 고려사절요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한마디 부연하자면, 기황후가 가문이 멸문당한지 8년 만에서야 복수에 나선 것은 그때서야 기철 일당의 부추김에 넘어간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기철이 반란을 모의하여 공민왕이 기황후의 가문을 멸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기황후는 공민왕이 자신의 가문에 죄를 뒤집어 씌여 멸문한 것으로 믿고 복수에 나섰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기황후의 묘가 경기도 연천에 있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에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바로 이 소설의 모티브였습니다. 

   연천에 사모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었지요. 

   연천은 최영의 고향인 철원과 연접해 있어 기황후가 사모했던 사람이 불세출의 명장 최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연천에서 기황후와 최영이 마주친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이순신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최영이라면, 기황후가 충분히 매료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상상력이 모티브임에도 '기황후'는 역사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은 정통 역사소설임을 자부합니다. 

   목차를 보여드리자면, 1331년 기황후가 최영을 만난 순간부터 1368년까지, 38년에 걸쳐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니까요. 

    

숙명적인 만남 7

어머니의 가야금 26

금혼령 39

하늘이시여! 54

추격 70

문화 유씨 82

기습 96

압록강 112

피할 수 없는 운명 124

엇갈린 인연 138

질투 151

악몽 같은 현실 169

솔롱고 182

사내의 진심 200

엘테무르의 신신당부 215

반란 229

혼례식 246

대의멸친 259

2황후에 오르다 273

공민왕과 노국공주 285

18년 만에 맺어진 인연 297

조일신의 난 312

고우성의 싸움 324

멸문지화 345

연천 369

      


   광고 배너에서 보듯이 저의 '기황후'는 정통 역사소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영과의 사랑이라는 픽션을 추가한 것일 뿐이지요. 

   삼국지에서 초선이라는 미녀가 픽션으로 추가된 것처럼 '기황후'도 그렇습니다. 

   원래 소설이란 있을 법한 일을 모티브로 하는 것으로, 동시대 인물이였던 기황후와 최영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설정은 역사소설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픽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배너 광고의 문구처럼 '기황후' 속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필자는 대포가 1332년에 이미 대량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소설 곳곳에 대포가 등장하고, 편전이 고려 말 원나라와의 항쟁 때부터 쓰인 무기라는 사실을 알아내어 편전이 소설에 등장합니다. 

   그 당시 대도에 수만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아내었습니다. 

   1354년, 고려가 2만3천의 병력을 원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부분의 병력을 원나라 대도에 있는 고려인들로 충원한 것으로,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354년 원나라에서 응원군을 요청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2천 병력을 원나라로 파병하였고, 이때 기록에 고우성의 싸움에서 

    '대도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 총 2만3천을 선봉으로 삼았다.'

   이를 보아 당시 대도에 최소한 수만 정도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요.

   사실, 필자의 장점이 사라진 역사 복원입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암시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아 역사책을 꼼꼼히 읽다 보면 수많은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기 마련이지요. 

   이번에도 여러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역사소설 독자 팬들은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참고로 필자는 오래 전에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불세출의 명장 한신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사실을 우회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사기의 '회음후 열전'에는 한신이 진희라는 장수에게 반란을 사주한 것으로 나오는데, 정작 진희를 다룬 열전에서는 진희가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안타깝다는 표현하여 진희가 한신과 아무 관련없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또한 사마천은 역이기 열전에서는 한신이 말로 제왕을 항복케 한 역이기의 공을 시셈하여 항복한 제나라를 공격해 역이기를 죽게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한신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역시 한신이 반란을 일으킨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단순히 기록만을 보고, '한신이 진희에게 사주하여 모반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이렇게 쓰는 역사학자는 역사책을 읽는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마천이 '한신이 사실은 모반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라고 썼다면 난리가 났겠지요? 그러니까 회음후 열전에서는 한신이 진희에게 반란을 사주했다고 쓰고, 진희 열전에서는 진희가 부하가 죄를 짓자 관리의 추궁을 당할까 두려워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서술하여 진희의 반란이 한신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니, 한신이 진희를 사주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님을 추정할 수 있지요. 실제로 그간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한신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라고 서술함으로써 한신의 결백을 믿어왔는데, 근래 출간된 역사책을 보면 그냥 '한신이 진희를 사주하여 모반을 일으키려다 처형당했다.'라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아 한신이 정말 반역을 일으킨 것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는 잘못된 서술입니다. 


   예시가 너무 길었군요. 

   독자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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