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조정우 역사소설 광개토태왕 머리글

조정우 2011. 6. 3. 06:00

 

 광개토대왕은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영토를 정복한 왕으로 어떤 역사학자들은 유럽에서 아프리카,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비교하곤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20살에 왕위에 올라 33살에 세상을 떠났고, 광개토대왕이 18살에 왕위에 올라 39살(서양식 나이로는 38세)에 세상을 떠났기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고, 3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기원전 356년생인 알렉산더 대왕은 성장 과정이나 업적이 자세히 남아있는데 비해 서기 374년(광개토대왕비 기록)생인 광개토대왕의 성장 과정이나 업적은 자세히 남지 않아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고구려에는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에 사서 유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668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음으로서 고구려의 역사 기록이 사라진 것이 아닐지요.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했던 신라로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겠지요. 왕건이 고려를 창건했을 무렵에는 이미 고구려가 망한지 250년이 지났기 때문에 고구려의 기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영토가 상당히 축소되어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영토까지 축소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국측의 사서를 보면,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는 만주와 연해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베이징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국사 시간에는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한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과거 명칭은 유주로 광개토대왕 시대 유주자사 진의 고분이 평양 덕흥리에서 발견됨으로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가 유주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베이징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로 전국시대 연나라에 빼았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고조선 이전부터 2000년 이상 우리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광개토대왕 때 다시 회복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직 우리나라 주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광개토대왕의 정복지역은 중국의 기록을 보아도 우리나라 주류 역사학자들이 밝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정벌했을 때, 후연 영토의 상당부분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유주를 비롯한 후연의 영토를 획득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국의 기록에도 베이징이 고구려 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고구려가 고구려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마도 광개토대왕 이후부터 오랫동안 고구려가 지배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앞으로 역사학자들의 고구려의 전성기 영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광개토대왕, 18세에 제위에 올라 강성했던 백제를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거란족을 정벌하여 이겼으니, 알렉산더 대왕에 못지 않은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대에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졌는데, 이 무렵에는 동양이 서양보다 용병술이 발달했고 군사력이 더 강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어쩌면 광개토대왕이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뛰어난 명장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훈족이 유럽을 지배했던 것도 이 당시 동양의 군사력이 서양의 군사력보다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은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대국 후연을 정벌한 것을 보면, 광개토대왕이 얼마나 뛰어난 명장인지 알 수 있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새 연재소설 '광개토태왕'을 쓰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