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김춘추 대왕의 꿈, 8월 출간!

조정우 2012. 7. 23. 18:00

   저의 데뷰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김춘추 대왕의 꿈'이 올림픽이 끝나는 8월 중순 이후에 출간 예정입니다.

  2009년 블로그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약 3년간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김춘추 대왕의 꿈'에 많은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소설은 필자의 스승님이신 신재하 작가님과 공동 집필한 것으로, 이미 '배달민족 치우천황'을 다음 뷰 가족들에게 선보인 작가님이십니다.

  '김춘추 대왕의 꿈'은 역사를 바탕으로 쓴 정통 역사소설로 역사고증에 충실하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박창화 씨의 '화랑세기', 중국 사마광의 '자치통감',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조선상고사'를 참고하여 집필하였습니다.

  정확한 출간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8월 20일 쯤 출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웃블로거님과 방문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왕의 꿈 1화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춘추와 문희

 

 

   매화꽃이 화사하게 핀 이른 봄날이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건만 남산 아래 들판에서 거칠게 몸을 부딪히는 한 무리의 청년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자색 옷을 입은 사내들과 청색 옷을 입은 사내들이 공을 쫓아 몰려다니며 축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들 중 자색 옷 무리를 이끌고 있는 연꽃문양의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눈에 띄었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피부가 하얗고 앳되어 보이지만 기품 있는 용모에 투지가 넘쳐 보였다. 공을 몰고 나가다 지르고, 또 날래게 돌아나가 공을 다루는 모양새가 비범했다. 머리에 질끈 동여 맨 풍월문양의 머리띠가 더욱 돋보이는 그가 바로 화랑의 최고 지위를 상징하는 풍월주 김춘추였다.

 

   청색 옷 무리 중에서 태극문양의 비단옷을 입은 사내 역시 한 눈에 들어오는 체격과 늠름한 기상이 그들 중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김춘추가 다소 여리고 지략가다운 모습이라면 태극문양의 비단옷을 입은 사내는 그 존재만으로도 상대에게 위압적인 풍모와 투지가 느껴졌다. 그가 바로 서른 살의 상선(전 풍월주)김유신이었다.

잠시 전에 유신이 비호와도 같은 날카로운 공격으로 한 점을 넣어 2대2로 동점을 이룬 터라 춘추는 혼신의 힘을 다해 총공세를 펼쳐나갔다. 체력단련과 화합을 위한 혈기 넘치는 화랑들의 시합이면서도, 속내를 들여다 보면 스물 두 살의 풍월주 춘추가 이끄는 스무 살 안팎의 젋은 화랑과 서른 살의 상선 유신이 이끄는 선배 화랑들의 자존심을 건 한 판 승부이기도 했다.

 전날의 궁술 시합에서 젊은 화랑들이 선배 화랑들에게 총점에서 근소한 차이로 밀려 아깝게 패배했기 때문에 춘추는 이번 축국에서 꼭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게다가 전날의 패배는 마지막 궁사조의 춘추와 유신의 싸움에서 귀신 같은 솜씨로 신궁의 경지를 보여준 유신에게 덜미를 잡힌 게 결정적이었다.

 

   춘추의 발재간은 놀라웠다.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자색 옷 무리를 진두 지휘 하며 공을 배급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비호 같은 동작으로 공을 치고 나가는 춘추를 막아내느라 청색 옷 무리는 총력을 펼치고 있었다.

   유신은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춘추와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던 터였다. 아니 누구보다도 춘추를 아끼고 좋아하는 유신이었다. 춘추에게는 깊은 학식과 함께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함과도 같은 천재적 재능이 느껴졌다. 누가 보더라도 사내의 풍모와 기개가 넘치는 자신과는 달리 춘추는 백옥 같은 피부에 섬세한 감수성, 그리고 동료 화랑들을 휘어잡는 어머니와 같은 포용력이 있었다.

 

   유신 자신이 조자룡이나 관우에 가깝다면 춘추는 제갈공명과 유비를 섞어놓은 듯한 인상이랄까, 유신은 그런 춘추가 어려서부터 호감이 갔다. 궁술도 나무랄 데가 없고 무예도 출중해서 더욱 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춘추가 진골이라는 사실이다. 가야계 대원신통인 유신이, 선왕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인 춘추와 막역한 사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장수로서 큰 꿈을 품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 춘추가 열여덟의 젊은 나이에 양명공주의 딸인 보라와 혼인을 했을 때 유신은 왠지 춘추와 점점 멀어지는 듯 했었다. 내심 자신의 누이동생과 혼인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때는 자신의 두 누이동생들이 너무 어렸었다. 그런데 세 달 전 춘추의 아내 보라가 첫 아이를 낳다가 난산 끝에 세상을 하직하게 되자 유신은 춘추를 더욱 살뜰히 챙기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춘추를 눈여겨 봤던 유신은 그의 인물됨이 장차 큰 대의를 세상에 떨칠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근 은근히 자신의 누이동생 얘기를 꺼내기도 하면서 춘추와 거의 매일처럼 화랑장에서 만나 함께 무예를 닦거나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때로는 저잣거리에 나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경우도 많았는데, 아내를 잃고 상심에 젖은 춘추를 위로하기 위해 유신이 불러내었던 것이다. 유신은 춘추가 평소에 죽은 아내 보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누이동생을 선뜻 소개하지 못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터였다.

 

 

   오늘, 축국 시합도 아내를 잃고 상심에 빠진 춘추가 옛날처럼 기개가 넘치고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유신이 제안한 것이다. 화랑들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상선이자 절친한 유신이 제안한 화랑 선배와 후배들의 축국 시합은 생각보다 훨씬 그 열기가 뜨거웠다.

   외모가 다소 여려 보이는 춘추였지만 축국을 할 때 그의 모습은 달랐다. 자신의 무리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하는 놀라운 통솔력과 바람처럼 날랜 동작으로 돌진하는 위협적인 공격력이 감탄할 만했다. 순간적으로 공을 받아 몰아치는 춘추를 청색 옷 무리의 화랑 한 사람이 거칠게 부딪혀 왔다. 그러나 춘추는 살짝 그를 따돌리며 강하게 공을 내질렀다. 순간 청색 옷 입은 화랑과 몸싸움이 일어나면서 춘추의 옷고름이 당겨지자 그만 옷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추가 내지른 공은 상대 진영의 대문 안으로 힘차게 빨려 들어갔다.

 

   자색 옷 무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뻐했다. 그렇게 축국 시합은 풍월주 춘추가 이끄는 자색 옷 무리의 승리로 끝났고, 어제의 궁술 시합까지 해서 결국 1대1의 균형을 이루게 되는 최상의 결과로 마무리 되었다. 적어도 유신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어 의미 심장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번 시합은 선후배 화랑들이 서로의 우애를 다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더 없이 좋았다. 구슬땀을 흘리는 춘추의 얼굴도 오랜만에 무척 밝아 보였다. 유신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무언가 작심한 듯 춘추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춘추공, 옷이 많이 찢어졌구려. 우리 편이 도저히 춘추공의 날랜 동작을 당해낼 수가 없다 보니 이런 일까지 생기는구려. 미안하오, 춘추공."

"어인 말씀이시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궤념치 마시오."

"아니오. 이는 이 몸의 불찰이오. 다행히, 저희 집이 가까우니 가서 꿰매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춘추는 손사례를 치며 말했다.

   "유신공, 우리 사이에 어찌 이 정도 일로 마음을 쓰시는 게요? , 집으로 가서 하녀에게 시키면 그만이니, 마음 쓰지 마시구려."

   "공과 내가 오랜만에 회포도 풀 겸 청하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시구려."

   춘추는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유신을 따랐다.

 

 

 

이때 유신의 집 정자에는 한 눈에 보아도 고운 미모의 두 소녀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는 이름이 보희로 유신의 큰 누이동생이고,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녀는 문희로 유신의 작은 누이동생이었다.

보희와 문희 둘 다, 자태가 고왔던 어머니 만명공주를 닮아 품위가 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 보희는 넋이 빠진 얼굴로 어젯밤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너무 괴이한 꿈이라, 길몽인지 흉몽인지 모르겠어."

   문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보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무슨 꿈을 꾸셨는지, 이 동생에게 말해주세요."

   보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정말 괴이한 꿈이었어. 서형산 마루턱에서 소변을 보았는데, 서라벌에 소변이 가득 차 넘치는 거야. 내가 까무러치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꿈에서 깨었는데, 흉몽이 아닐까?"

   문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언니, 길몽이 틀림없어요. 천하의 귀인이 될 꿈이 아니겠어요?

   "얘도, 그렇게 망측스러운 꿈이 어떻게……"

   "언니, 정 그러시면 저에게 그 꿈을 파세요."

   보희는 소변이 넘치는 꿈을 흉몽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문희에게 물었다.

   "진심이니?"

   "제가 어찌 언니에게 허언을 하겠어요?"

   "내가 그 꿈을 팔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문희는 자신이 아끼는 비단치마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비단치마면 되겠어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 꿈을 네게 팔겠다. 허나, 나중에 후회하지 말거라."

   "후회하지 아니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하여 문희는 비단치마를 팔아 언니 보희의 꿈을 사게 되었으니 훗날 이 거래로 인해 왕후의 자리가 바뀌게 되는 운명이 결정될 줄 어이 알 수 있었으랴. 보희는 동생 문희의 비단치마를 입어보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들뜬 보희는 자신의 꿈과 바꾼 비단치마를 입고 나들이를 나갔고, 얼마 후 유신이 춘추를 집으로 데려왔다. 유신은 술상을 차려 춘추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잔이 여러 차례 돌아 취기가 감돌자, 유신은 보희를 찾았지만, 보희는 집에 없고, 문희만 있었다. 유신은 문희에게 물었다.

   "문희야, 보희는 어디에 있느냐?"

   "언니는 나들이를 나가 지금 집에 없나이다. 어인 일로 언니를 찾으시나이까?"

   "내 오늘 춘추공과 축국을 하다 춘추공의 옷고름이 찢어져 집으로 모셔왔으니, 네가 좀 꿰매어 드리거라."

   문희는 어머니 만명공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까닭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남녀는 유별하오니, 춘추공의 옷고름을 고치는 일은 시녀를 시키시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춘추공은 폐하의 외손자가 되시는데, 어찌 미천한 시녀를 가까이하게 할 수 있겠느냐?"

   "허나, 어찌 하찮은 일로 외간 남자를 가까이 할 수 있겠나이까?"

   유신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춘추공과 나는 형제와 다름없는 사이니, 너에게 외간 남자가 아니지 아니하냐? 이 오라버니의 뜻을 따르거라."

   문희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춘추공의 옷고름이 찢어졌다면, 시녀를 시키시면 되는 것을 어찌 나에게 시키시는 것일까? 혹시, 오라버니께서 나와 춘추공을 맺어 주시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오래 전부터 언니 보희와 함께 춘추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문희는 오라버니의 뜻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유신도 평소에 자신의 두 누이가 모두 춘추를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녀, 오라버니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유신에게 춘추는 부끄러운 듯 말했다.

   "어찌 다 큰 누이에게 외간 사내의 옷을 꿰매게 하는 지요. , 몸 둘 바를 모르겠소."

   "내 누이동생 문희는 오래 전부터 춘추공을 봐왔던 터라 남이라고 생각지 아니하오. 춘추공도 이제 홀몸이신데 우리 문희가 어떠신지요? 어여삐 봐주신다면 나로서는 더 없는 광영이겠소.

춘추는 그렇지 않아도 취기로 빨개진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춘추가 있는 내실로 들어간 문희는 수줍어 고개를 숙이며 춘추에게 인사했다.

   "춘추공,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이니까?"

   춘추가 문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일 년 전이었다. 이제 꽃다운 열 여섯 살이 된 문희는 그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다.

   춘추는 너무나 달라진 문희의 자태를 보고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동안 춘추가 알고 있던 어린 처자 문희가 아니었다.

   "문희야,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래, 나는 산천을 벗삼아 잘 지내었다. 너도 그간 잘 지내었느냐?"

   자신도 모르게 춘추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도 잘 지냈사옵니다."

   문희는 춘추의 찢어진 옷고름을 꿰매어 주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춘추와 단 둘이 있게 되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는 듯했다. 문희가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춘추공께서는 오라버니의 형제와 다름이 없는 분이시니, 소녀가 춘추공의 옷고름을 꿰매어 드리겠사옵니다."

   "하찮은 일로 수고시켜 참으로 미안하구나."

   "소녀를 누이처럼 편하게 생각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그래, 문희야. 어려서부터 너를 봐왔던 터이니 나의 누이와 다를 바가 없구나."

문희는 몹시 수줍어 하면서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었다. 두 뺨이 붉게 물든 문희의 자태에 춘추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는 백옥처럼 희고 비단처럼 고운 문희의 섬섬옥수가 춘추의 가슴을 점점 요동치게 했다.

 

붉은 모란처럼 붉게 물든 문희의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춘추는 자신도 모르게 옷고름을 꿰매고 있는 그녀의 희고 고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예상치 못한 춘추의 돌발 행동에 문희는 화들짝 놀라 크게 당황한 나머지 춘추의 저고리를 떨어뜨렸다. 문희는 바닥에 떨어진 춘추의 저고리를 주우려 하였지만, 춘추는 문희의 두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외간 남자에게 손을 잡힌 문희는 몹시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문희야, 내가 너에게 부족하지 아니하다면, 너의 지아비가 되고 싶구나."

어린 시절부터 춘추를 연모했던 문희는 춘추의 청혼을 받자, 심장이 터질 듯 하였다. 문희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존귀하신 춘추공께서 소녀를 어여삐 여겨 주시오니, 부모님과 오라버니만 허락하신다면 춘추공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고맙구나."

춘추는 입김을 불어 촛불을 끈 후 문희를 끌어 안았다. 문희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가만히 춘추의 품에 안겼다.

 

 

 

다음 날, 춘추는 몇 개월 전 세상을 떠난 보라의 사당을 찾았다. 보라와 함께 보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생생히 떠오르자, 춘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춘추는 보라의 초상화를 향해 말했다.

"보라, 그대가 참으로 그립소.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아니하는구려...... 허나, 이제 그대의 양해를 구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소. , 유신의 누이 문희를 정실로 맞이 할 것이오. 문희는 그대에 못지 아니한 여인으로 가히 그대의 뒤를 이을만 하오. 이미 문희를 정실로 맞이하기로 마음을 정하였으니, 그대가 내 뜻을 따라 주리라 믿소."

춘추가 보라와 함께 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을 때, 시종 하나가 들어와 춘추에게 말했다.

"주군, 공주마마께서 주군을 부르시나이다."

춘추의 어머니 천명공주가 춘추가 유신의 집에서 밤을 지냈다는 말을 듣고 춘추를 부른 것이다.

 

 

"어머님, 소자가 왔나이다."

천명공주는 지엄한 얼굴로 춘추에게 물었다.

", 들으니, 네가 어제 밤을 유신의 집에서 보냈다 하더구나. 무릇, 왕족의 발걸음은 무거워야 하는 법이다. 유신에게 과년한 두 누이가 있어 자칫 좋지 아니한 소문이 날 수 있으니 자중해야 하느니라. 이 어미의 뜻을 알겠느냐?"

"소자, 명심하겠나이다."

"보라의 사당에 있었느냐?"

"그러하나이다."

천명공주는 운을 뗀 후 말을 이었다.

"이 어미도 보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프다. 허나 너는 나라의 왕손이니, 속히 배필을 맞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이 어미는 보라의 동생 보량을 너의 배필로 삼기로 하였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춘추는 말문이 막혔다. 춘추의 침묵에 천명공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어찌 어미의 물음에 대답을 아니하는 것이냐?"

춘추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자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사오니 뜻을 거두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뭐라,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 허면, 이 어미와 상의하지도 아니하고 멋대로 혼처를 정하였단 말이더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미처 어머님께 아뢸 기회가 없었나이다."

춘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명공주의 대갈일성이 떨어졌다.

"대체 누구냐?"

"소자, 유신공의 누이 문희를 깊이 연모하고 있으니, 혼인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천명공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아니 된다. 이미 네 이모에게 너와 보량을 맺어 주기로 약조하였거늘, 네가 약조를 어기고 유신공의 누이 문희와 혼인한다면, 이 어미의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어머님, 소자 어머님의 깊으신 뜻을 몰라, 이미 문희에게 혼인을 약조하였으니 부디 혼인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니 되느니라. 문희는 잊어 버리거라. 내 허락 없이 너희들 멋대로 결정한 일이니, 문희에게 그리 말하거라."

"어머님, 소자가 불민하여 어머님의 깊으신 뜻을 미쳐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허나, 문희는 유신공의 누이인데, 소자가 문희와의 혼인 약조를 지키지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유신공을 대하겠나이까?"

천명공주는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네가 잘못한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거라."

춘추는 천명공주의 단호한 태도에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명공주의 처소를 나온 춘추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탄식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문희와 유신공을 무슨 낯으로 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