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2화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2. 7. 30. 16:00

  김춘추 2화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보라와 보량 

 

 

   서형산 산마루 중턱에 민가로부터 외로이 떨어져 있는 초가집에서 하얀 삼베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마루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는 작고한 춘추의 처 보라의 아버지 보종으로, 어머니 미실이 일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여기서 삼년상을 지내고 있었다. 효성이 극진했던 보종은 미실이 세상을 떠난 후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크게 상심한데다, 석달 전 딸마저 세상을 떠나자 슬픔과 한이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가 가슴속에 맺힌 한을 피리에 담아 불고 있는데, 싸리를 엮어 만든 울타리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는 피리 불기를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말했다.

   "손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결례를 용서하시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춘추였다. 문희와 보량과의 사이에서 난처해진 춘추가 장인이자 화랑도의 상선(전 풍월주)인 보종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공께서 어인 일이요?"

   보종은 비록 춘추의 장인이었지만,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자인 춘추를 항상 예로서 대하였다.

   "장인어른께 상의드릴 것이 있어 왔나이다."

   춘추가 보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보종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보종의 두 딸 보라와 보량은 일찌기 춘추를 깊이 연모하였지만, 보라가 언니인 관계로 보량이 양보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보종은 보량이 상처받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춘추공이 문희를 선택하다니, 보량이 너무 가엾구나! 아비된 자로서 딸을 돕는 것이 마땅하나 유신공과의 의리를 생각하면 내가 나서기가 실로 난처하구나!'

   보종은 문희의 오라비 유신과 친형제처럼 정분이 두터워 유신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딸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보종은 얼마간 침묵하다가 마침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몸은 이미 세상과 등진 몸이니, 공의 모친과 저의 처인 두 분 공주와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이 몸은 두 분 공주의 뜻을 따를 것이오."

   보종이 딸의 혼인 문제에서 발을 빼자, 춘추는 보종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하직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춘추는 반나절 가까이 고민한 끝에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보량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양해를 구하는 도리 밖에 없겠구나!'

    결심을 굳힌 춘추는 곧장 보량의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각, 보량은 정원에 있는 정자에서 봄볕을 받으며 한가로이 자수를 하고 있는데,  시녀 능보가 다급하게 뛰어와 귀에 대고 말했다.

   "아씨, 춘추공께서 뒷마당의 정자에서 아씨를 조용히 뵙고자 하시옵니다."

   보량은 자수를 내팽개친 채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춘추를 보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반기며 인사하였다.

   "춘추 오라버니, 오랜 만에 뵈옵니다. 그간 강녕히 잘 지내셨는지요."

   춘추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량아, 내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왔느니라."

   보량은 춘추가 혼례식에 대해 상의하러 온 줄 알고, 홍조 띤 얼굴로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춘추 오라버니는 곧 소녀의 지아비가 되실 분이니 어려워 마시고 편히 말씀하소서."

   춘추는 보량에게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춘추의 굳은 표정을 눈치 챈 보량은 불현듯 불안한 예감이 솟구쳤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보량아, 실은 내 이미 혼인을 약조한 여인이 있다. 일이 이리 되어 너와 이모님께 참으로 면목이 없으나 이미 나의 마음은 정하여졌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보량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세미녀 미실의 손녀인 보량은 오래 전부터 언니 보라와 함께 신라 최고의 미녀로 화랑들과 낭도들에게 추앙을 받아왔다. 이러한 보량이기에 춘추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대체 누가 나의 춘추 오라버니를 가로챘단 말인가!'

   그녀는 질투심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어머님께 춘추 오라버니의 뜻을 전하겠나이다. 이미 혼인을 약조한 여인이 있다면 춘추 오라버니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순리일 듯하옵니다."

    보량의 말을 들은 춘추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에 보량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참으로 고맙구나."

   보량은 춘추의 손길이 닿자 수줍어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춘추는 아차 싶어 재빨리 그녀의 손을 놓았다. 보량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물었다.

   "하온, 춘추 오라버니와 혼인을 약조한 여인은 누구이온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유신의 누이 문희다."

   순간, 보량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문희, 이 계집이 필시 온갖 교태로 춘추 오라버니를 미혹한 것일 게야.'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희는 미색도 뛰어나고, 행실도 바르니, 가히 춘추 오라버니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옵니다. 허면 소녀는 이만 물러 가겠나이다."

 

   춘추가 떠나자 보량은 곧바로 어머니 양명공주의 처소를 찾았다. 보량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양명공주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보량은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님, 춘추 오라버니께서 이미 유신의 누이 문희와 혼인을 약조하였다며 어머님께 전하라 하였나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보량은 춘추 앞에서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복받치는 설움에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양명공주는 보량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춘추는 효자이니, 네 이모의 명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자식된 도리로 부모가 정한 혼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춘추가 어미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너 또한 이 어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춘추에게 전하거라."

   그 말은 들은 보량의 마음에 한 줄기의 희망이 솟구쳤다. 바로 그때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 양도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누이들과 유난히 의가 좋은 양도였다.

   "누님,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사옵니다."

   양도는 아직 열여섯의 어린 나이지만, 문무를 겸비한데다, 도화와 서예에 뛰어나 진평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러한 양도가 좋은 생각이 있다고 말하니 양명공주와 보량이 반색하며 동시에 물었다.

   "무엇이냐?"

   "소자가 보라 누님의 필체로 유서를 쓰겠사옵니다. 보량 누님과 혼인하라는 보라 누님의 간곡한 유지를 유서에 남긴가면, 매형께서는 보라 누님을 몹시 사랑하셨사오니 필시 보량 누님을 맞아들일 것이옵니다."

   보량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구나. 할 수 있겠느냐?"

   양도는 자신있게 말했다.

   "소제에게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옵니다."

   문방사우를 준비한 양도는 보라가 생전에 썼던 서찰을 보며 정성들여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것은 누가 봐도 보라의 필체였다. 양명공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보량에게 말했다.

   "이 어미만 믿고 따르거라."

  

   시종의 전갈을 받고 이모인 양명공주를 찾은 춘추는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모님, 그간 옥체 강녕하셨사옵니까?"

   양명공주는 처량하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자식이 세상을 떠났거늘, 어찌 어미가 강녕할 수 있겠느냐만, 이렇게 너를 보니, 마음에 위안이 되는구나. 그간 무탈히 잘 지냈느냐?"

   "소질, 이모님과 장인 어르신의 은덕으로 무탈히 잘 지냈사옵니다."

   "내 보량에게 들으니, 네가 유신의 누이 문희와 혼인을 약조하였다 하더구나. 사실인 게냐?"

   "그러하옵니다. 이모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여 송구하기 그지 없나이다."

   양명공주는 말없이 탁자 위에 있는 상자에서 비단 조각을 꺼내 춘추에게 내밀었다. 춘추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펼쳐보면 알 것이다."

   그 지체없이 비단 조각을 펼쳤다. 거기엔 세상을 하직한 보라의 필체로 쓰여진 글이 있었다.

 

   '낭군, 첩은 영원토록 낭군을 모시고 싶사오나, 인명은 제천인지라 혹시라도 첩이 자식을 낳다가 이승을 떠나게 된다면 첩의 동생 보량을 아내로 맞으소서. 보량이 오래 전부터 낭군을 깊이 사모하여 왔으니, 첩이 세상을 떠나면 부디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승에서 낭군을 모시지 못하는 첩의 한을 풀어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나이다.'

 

   비단 조각을 쥔 춘추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양명공주가 탄식을 내뱉은 후 말했다.

   "보라가 자식을 낳기 며칠 전에, 만약을 대비하여, 네게 전해주라며 나에게 맡긴 것이다. 보라가 세상을 하직한 후, 경황이 없어 너에게 미처 전하여 주지 못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구천에 있는 보라를 볼 낯이 없구나." 

   보라가 자식을 낳을 때, 춘추는 왕명을 받고 아버지 용춘과 함께 당나라 사절로 떠났기 때문에 보라의 곁을 지키지 못했었는데, 그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그는 자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난 보라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보라, 미안하오. 내 미처 그대의 깊은 뜻을 몰랐구려."

   이때, 보량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춘추 오라버니, 실은...... 소녀, 오래 전부터 춘추 오라버니를 마음 속 깊이 사모하였사오나, 언니께서 춘추 오라버니를 사모하였기에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하며 언니께 양보한 바 있나이다. 허나 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소녀에게 춘추 오라버니를 부탁하신 바 있어 소녀, 언니께 춘추 오라버니를 지아비로 맞을 것을 기쁜 마음으로 약조하였사옵니다. 이러한 소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주시기 바라나이다."

   춘추는 보량의 진심을 듣자 몹시 놀란 표정으로 보량을 바라보았다. 보량은 춘추에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고 나니 몹시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진작 언니의 유서와 저의 확고한 마음을 춘추 오라버니께 알려 드리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 같사옵니다. 춘추 오라버니께서 당장 마음을 정하실 수 없으시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사오니 부디, 언니의 유지와 소녀의 진심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라나이다."

   춘추는 크게 탄식하며 양명공주에게 말했다.

   "소질이 어찌 보라의 유지를 외면할 수 있겠나이까? 보라의 유지대로 보량을 아내로 맞겠나이다."

   양명공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춘추의 손을 잡았다.

   "그리 결정해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구천에 있는 보라가 이를 알면 크게 기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