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3화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2. 8. 10. 15:00

 

  김춘추 3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진평왕의 정비 마야왕후는 지소태후의 3녀 송화공주의 소생으로, 지소태후의 4녀 보명왕후의 소생인 양명공주와 천명공주의 사촌 언니지만어린 시절부터 왕궁에서 함께 자라 친자매처럼 정분이 두터웠다. 마야왕후가 처소에서 시녀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양명공주가 찾아왔다. 

   "소첩의 딸 보량과 천명의 아들 춘추가, 어제 백년가약을 약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왕후마마께 아뢰기 위해 왔나이다."

   "춘추와 보량이 혼인을 한다. 이는 왕실의 큰 경사이니 지금 당장 폐하께 아뢰는 것이 좋을 듯 하구나."

   마야왕후는 양명공주와 함께 진평왕의 처소를 찾아갔다. 마야왕후로부터 춘추와 보량의 혼인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크게 기뻐했다.

   "춘추와 보량이 혼인하다니참으로 기쁜 소식이로다! 연회를 열어 이 기쁜 소식을 공표하겠노라."

 

   다음날, 왕궁에서 큰 연회가 열렸다. 영문도 모른 채 연회장에 온 왕족들과 신료들은 진평왕의 말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왕궁에서 왕족과 신료들을 초대하여 큰 연회를 여는 것은 왕자나 공주의 국혼을 공표할 때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좌중들의 시선인 아직 미혼인 덕만공주에게 쏠렸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여자의 몸으로 태자에 오른 덕만공주는 혼기가 지난 스물다섯의 나이에도 미혼이었던 것이다. 덕만공주의 옆자리에 앉은 춘추는 근래 자신에게 일어난 괴로운 일 때문에 심난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덕만공주는 이러한 춘추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뭘 그리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냐? 축하주를 받거라."

   춘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태자마마께서 어인 일로 저에게 축하주를 하사하시나이까?"

   덕만공주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것이니라."

   춘추는 그제야 이 연회가 자신과 보량의 혼인을 공표하기 위한 자리임을 깨달았다.

   '허면, 이 연회는 나와 보량의 혼인을 공표하기 위한 자리란 말인가? 아직 문희에서 아무 말도 못하였거늘,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순간 춘추는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있는 유신과 눈이 마주쳤다유신이 눈인사를 하였다. 춘추는 유신을 마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마지못해 눈인사를 한 후 시선을 돌렸다유신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춘추공께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사뭇 다르구나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진평왕의 모친 만호태후가 만룡공주와 함께 입장하였다. 올해로 일흔여섯 살인 만호태후는 슬하에 진평왕 이외에도 차남 백반과 삼남 국반 두 아들과 장녀 만명공주와 차녀 만룡공주 두 딸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입장한 지 얼마 후, 진평왕은 좌중을 둘러 보며 말했다.

   "짐이 오늘 이 자리에 경들을 부른 것은 왕실에 큰 경사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니라."

   진평왕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춘추와 보량을 번갈아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짐의 외손인 춘추와 보량이 어제 혼인을 약조하였으니, 경들은 두 왕손의 혼인을 경하토록 하라."

   순간 유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춘추공께서 어찌......'

   유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춘추를 바라보았다. 춘추는 유신을 대할 면목이 없어 고개를 떨궜다유신은 충격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유신의 어머니 만명공주는 유신의 낙담하는 소리를 듣고 의아한 표정으로 유신에게 물었다.

   "네가 어찌 그리 놀라는 것이냐? 이 어미도 춘추공을 보희의 배필로 생각하였다만,  그게 어디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유신은 충격으로 말문이 열리지 않아 머뭇거리다 간신히 입을 뗐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유신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춘추에게 가서 어찌 된 것인지 따지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끓어오르는 분을 삼키며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연회가 끝날 무렵, 유신은 불편한 심기를 감춘 채 춘추에게 다가갔다.

   "춘추공, 혼인을 경하드리오."

   그리고선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춘추공의 해명을 들어야겠소."

   "내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으나 그간 있었던 사정을 말하겠소."

   춘추가 눈짓을 하자 유신이 따라나섰다. 왕궁의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 유신은 노여운 얼굴로 춘추를 다그쳤다.

   "춘추공께서 문희와 혼인을 약조하시고선, 우리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고 보량과 혼인하신다니, 대체 이게 어찌된 영문이오?"

   춘추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유신공,  공과 문희에게 면목이 없구려. 내 해명하리다."

   춘추는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이 몸의 처, 보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유지를 남겼소.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어제 이모님께서 나를 불러 말씀하셔 알게 된 것이오. 내가 보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공 또한 알지 않소? 보라와 나는 삼생(전생, 현생, 후생)을 함께 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소하여 보라가 이승을 떠나기 전에 남긴 유지를 차마 어길 수 없었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니, 문희에게 나의 사정을 잘 말해 주시오. 내 문희를 진심으로 사랑하나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문희와 나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아닌 듯 하오."

   유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께서 살아있는 문희보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니 내 할 말이 없소이다. 게다가 이미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듯하오.  이 몸은 이만 가보겠소. 문희에게는 잘 말하리다."

   유신이 떠나자, 춘추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탄식하였다.

   '문희야! 내 너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으나 보라가 이승을 떠나기 전에 남긴 유지를 어길 수 없구나! 부디, 나를 이해하여 다오.'

   춘추는 마음이 괴로워 가슴을 부둥켜 잡고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