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 칠숙, 승만왕후와 야합하다

조정우 2013. 1. 6.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칠숙, 승만왕후와 야합하다

 

    창졸간에 정혼자인 춘추를 잃은 보량은 마음에 병이 생겨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보량은 춘추가 그립기도 하고 밉기도 하였다. 누구보다 유신과 문희가 미웠다.

    '춘추 오라버니께서 어찌 나에게 이러실 수 있단 말인가? 나를 버리고 문희를 선택하시다니...... 유신의 간교한 계략에 속은 것이 틀림없으렷다. 애초에 유신은 문희를 죽일 생각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요란법석을 피워 춘추 오라버니께서 어쩔 수 없이 문희와 혼인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유신, 문희, 가야에서 굴러온 가문의 핏줄인 주제에 감히 궁주인 나를 농락하다니, 내 반드시 이 원한을 갚으리라.'

    보량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분풀이 대상을 찾던 중 춘추의 어머니 천명공주가 혼인 예물로 준 패물이 담긴 함을 보고는 벽에다 냅다 던져버렸다.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함이 깨지며 패물이 쏟아졌다. 이 소리를 들은 보량의 어머니 양명공주가 달려와 보량을 위로했다.

    "보량아, 이 천지에 사내가 춘추 한 명뿐이더냐? 어찌 이러는 것이냐? 이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느냐? 춘추는 이제 문희의 지아비가 되었으니, 너도 그만 마음을 정리하고 새 인연을 찾아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량은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옵니다. 애초에 혼례식을 좀 더 앞당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옵니다."

    보량은 마침내 참았던 울음보를 터뜨렸다. 양명공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는 보량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모든 것이 이 어미의 불찰이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춘추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 천명과 상의하여 날짜를 그리 정하였거늘, 폐하께서 공표하신 정혼을 춘추가 뒤엎을 줄을 어찌 이 어미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양명공주의 목소리에 탄식과 한숨이 배어 나왔다. 춘추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두 딸 보라와 보량 중 한 명을 춘추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던 양명으로서는 허탈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라는 춘추의 자식을 낳다가 세상을 하직하였고, 보량은 혼례식 직전에 춘추에게 버림받았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인가. 양명공주는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어미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보라는 죽고 너는 이 지경이 되었는고!"

   그러자 보량은 울음을 그치고 양명공주에게 말했다.

    "그것이 어찌 어머님의 잘못일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운이 따르지 아니하였을 뿐이옵니다. 문희가 임신한 줄 진작 알았더라면 대책을 강구했을 터인데...... 당제는 왜 하필 소녀의 혼례식을 코앞에 두고 정변을 일으켰는지 참으로 원망스럽사옵니다."

    양명공주는 보량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낙담치 말거라. 옛말에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이 어미가 반드시 좋은 혼처를 구해줄 터이니, 이제 마음을 추스르도록 하거라."

    보량은 춘추를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 어린 시절부터 춘추 오라버니를 진심으로 사모하였거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첩이라도 좋으니, 춘추 오라버니께 시집가면 좋으련만......'

    이렇게 생각한 보량은 양명공주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님, 소녀, 첩이라도 좋으니, 춘추 오라버니께 시집가고 싶나이다."

    보량의 말에 양명공주는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뭐라?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더냐? 이 나라 지존이신 아바마마의 손녀인 나의 딸이 어찌 대원신통 가문의 딸 밑에서 첩살이를 할 수 있단 말이냐? 절대 아니되느니라!"

    유신의 가문은 신라 왕족의 가문인 진골정통이 아닌 왕후를 배출하는 가문인 대원신통이었다. 유신의 어머니 만명공주는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과 만호태후 사이의 소생으로 혈통이 진골정통이나, 아버지 숙흘종의 허락 없이 유신의 부친 서현과 눈이 맞아 도피하여 혼인한 관계로 숙흘종이 그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명공주의 어머니 만호태후가 서현을 사위로 받아들인 것도 유신이 화랑이 되어 명성을 떨친 후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신과 문희는 만호태후의 외손이지만 진골정통이 아닌 대원신통이었던 것이다.

진골정통의 자존심을 내팽개친 보량의 말을 듣고 화가 난 양명공주는 보량에게 춘추를 잊을 것과 마음을 정리할 것을 신신당부한 후 방을 나갔다. 보량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양명공주가 다시 보량을 찾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칠숙공이 오셨다."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칠숙은 진평왕의 동생 백반의 외아들로 오래전부터 보량을 연모해왔다. 4년 전, 춘추가 보라와 혼인을 하자 칠숙은 보량에게 청혼했었다. 춘추를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던 보량은 칠숙의 청혼을 거절한 바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칠숙이 다시 보량에게 청혼하러 온 것이다. 보량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녀,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할 여력이 없사오니, 칠숙공께는 어머님께서 잘 말씀드려 주소서."

    "칠숙공이 어려운 발걸음을 하였거늘, 어찌 그냥 돌려보낼 수 있겠느냐? 일단 만나 보거라."

    보량은 미간을 찌푸린 채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 꼴로 어찌 칠숙공을 뵐 수 있겠사옵니까? 나중에 뵙겠다고 전해주소서."

    그러자 양명공주는 탁상에 있는 머리빗을 들어 보량의 머리를 빗기며 말했다.

    "머리는 빗고 가면 될 것이다. 이 어미의 말을 듣거라."

    보량은 양명공주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칠숙이 머무르고 있는 객실로 발걸음을 하였다.

   "칠숙공, 그간 강녕히 지내셨사옵니까?"

   "덕분에 잘 지냈다. 너도 그간 잘 지냈느냐?"

   보량은 나직히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소녀, 정혼자를 빼앗겼사온데, 어찌 잘 지낼 수 있겠나이까? 실은 소녀 지금 몸이 불편한지라 이만 물러날까 하나이다. 살펴 돌아가소서."

    보량이 객실을 나서려고 하자, 칠숙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칠숙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보량은 몹시 당황하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칠숙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량아, 어찌 이다지도 내게 무정한 것이냐? 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조차 초개처럼 버릴 수 있으니, 내 마음을 받아주길 바란다."

    순간, 보량은 자신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칠숙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칠숙공께서도 나와 같은 고통을 안고 사셨구나! 불쌍한 분......'

   보량은 지긋한 눈빛으로 칠숙을 바라보았다. 맑고 큰 눈, 짙은 눈썹, 오뚝한 코,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칠숙은 보기 드문 미남일 뿐 아니라 영웅의 기개가 흘러 넘쳤다.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에게 생각할 말미를 주소서."

    칠숙은 그제야 보량의 손을 놓아주었다.

    "보량아, 내 언제까지고 너를 기다릴 것이다. 부디 나를 외면치 말아다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남산 계곡의 시냇물이 따스한 봄 햇살에 녹아 화랑들이 모여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수련장으로 흘러내렸다. 춘추가 목검을 들고 화랑도에 갓 들어온 어린 화랑들에게 검술을 지도하고 있을 때, 춘추의 가복인 온군해가 말을 몰아 달려왔다.

    "주군, 승만후께서 왕자님을 낳으셨다 하나이다. 하여 폐하께서 축하연을 여시니 참석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나이다."

    순간 춘추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후궁인 승만후의 아들이 장성한다면 태자인 덕만공주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춘추는 말을 몰아 산 아래 들판에 있는 유화들의 수련장으로 달려갔다. 수련장에는 유화들의 수장인 화주 문희가 목검으로 유화들의 검술을 지도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라버니 유신에게 검술을 지도받은 문희의 몸놀림은 비호처럼 빠르고 날렵한 것이 여느 장수 못지않았다.

    멀리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춘추의 것임을 확인한 문희는 반갑게 낭군을 맞이했다.

    "부인, 승만후께서 아들을 낳으셔서 폐하께서 축하연을 여신다 하오. 속히 채비하시오."

    "그리하겠나이다."

    풍월주 춘추의 아내가 된 문희는 유화들의 수장인 화주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유화는 골품이 없는 가문의 딸 중에서 선발한 낭자들로 구성된 화랑도 휘하의 조직으로, 신분이 미천하여도 유화가 되면 화랑의 아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수천의 낭자들이 화랑도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희는 춘추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하온데, 어찌 호위병사와 함께 오시지 아니하였나이까?"

    "천하의 여장부이신 부인께서 이 몸을 지켜주면 될 것을, 호위병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소?"

    문희는 여장부라는 말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춘추가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곧 떠날 참이니, 속히 채비하시구려."

    문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말이 달려와 앞에 멈춰 섰다. 문희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 올라탔다. 춘추와 문희는 거의 동시에 말을 내달렸다. 그러고는 나란히 말을 몰아 왕궁으로 향했다. 문희는 살며시 춘추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늠름한 낭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추도 자신을 바라보는 문희를 슬쩍 바라보며 나긋한 미소를 보냈다. 오랜만에 낭군과 말을 달리는 것조차 문희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그토록 사랑한 사람과 혼인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만큼 너무 행복하여 오히려 불안해지는 문희였다.

    축하연의 상좌에 앉은 진평왕은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연회를 즐겼다. 한편 진평왕의 옆자리에 앉은 마야왕후는 애써 밝게 미소 지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승만후의 왕자가 장성하면 덕만의 지위가 흔들릴 터인데, 어찌하면 좋을까?'

    축하연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춘추와 문희가 함께 입장하여 진평왕과 마야왕후에게 인사를 올린 후 덕만공주 옆자리에 앉았다. 덕만공주가 춘추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보량이 뒤쪽에 있다. 축하연이 끝나면 인사를 나누도록 하거라."

   덕만공주 뒤쪽에 앉아 있는 보량을 춘추와 문희는 미처 못 봤던 것이다. 그들은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축하연이 끝날 즈음, 춘추가 보량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보량아, 그간 강녕히 잘 지내었느냐?"

   "덕분에 잘 지냈사옵니다."

    형식적인 인사 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보량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실은 소녀 얼마 전 칠숙공과 정혼을 하였나이다. 보름 후 혼례식을 올릴 것이니, 소녀의 혼례식에 와주시기 바라나이다."

    이때 문희가 다가왔다. 보량은 문희를 힐끗 쳐다본 후 춘추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하오면 소녀 이만 물러가보겠나이다."

    보량은 문희와는 인사도 하지 않을 요량으로 싸늘한 눈빛 한 번 주고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아무리 태연하려 해도 춘추를 빼앗긴 앙금을 훌훌 털어버리긴 힘들었다.

    춘추는 보량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문희와 함께 연회장을 떠났다. 이다지도 얄궂은 보라와 보량,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환하게 비추던 어느 봄날, 자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달빛에 여울져 흐르듯 살랑거리는 옷자락을 날리며 아기를 보듬고 있는 여인의 자태가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인은 아기를 안은 채 정자에 올라 보름달을 우러러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언니, 언니가 보고 싶어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정숙하고 지극히 아름다우신 언니를 그토록 일찍 데려가셨을까요? 제가 언니께 춘추 오라버니를 양보했을 때는 언니만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랐건만, 언니도 춘추 오라버니도 잃은 지금 허망하기 짝이 없군요."

    여인은 보량이었다. 두 달 전, 칠숙과의 사이에 아들 보로를 낳은 보량은 마음을 추스려 춘추를 잊으려고 하였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녀의 뺨에 흐르던 눈물이 보로의 뺨에 떨어졌다. 그러자 아기가 어미를 탓하기라도 하듯 잠에서 깨어나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보로야, 울지 말거라. 이 어미가 잘못했다. 착하지, 나의 아기야. 이 어미가 노래를 불러주마."

    그녀는 아기를 어르기 위해 잔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기가 겨우 잠들었을 즈음, 뒤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 능보였다. 보량이 칠숙에게 시집올 때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 능보는 그녀의 수족과도 같았다. 보량은 아기가 잠이 깰까봐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능보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능보가 보량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승만후께서 왕림하시어 마님을 뵙고자 하시나이다."

    보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승만후를 내실로 모시거라."

    보량은 이 시간에 승만후가 찾아왔다는 게 이상했다. 요즘 부쩍 살갑게 대하는 사이가 되긴 했으나 왠지 그냥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마마, 어서 오소서. 후궁마마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귀하신 발걸음을 하셨나이까?"

    승만후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 보량궁주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 왔소."

    승만후는 품속에서 서찰로 보이는 비단 조각을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승만후의 말이 이어졌다.

    "이 서찰을 궁주의 부군께 전해드리시오."

    "그리하겠나이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만 가보겠소. 보로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으나 밤이 늦은 터라 그냥 가리다."

    마마, 차라도 내오라 하겠나이다. 잠시만 기다리소서.”

    아니요. 오늘은 이 서한만 전하러 온 것이니 그만 가보겠소. 해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불편할 터인데 나오지 마시오. 또 보겠소. 산후조리 잘 하시게.”

    승만후는 보량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을 했으나 왠지 오늘은 비장함이 느껴졌다.

    승만후가 떠난 후, 보량은 한동안 서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연유로 야심한 시각에 찾아와 낭군께 서찰을 전해달라는 걸까?'

    1년 전 즈음인 보량의 혼례식 날, 승만후가 왕자를 낳은 지 보름밖에 안 된 몸으로 진평왕과 마야왕후를 따라 혼례식장을 찾아왔었다. 이후부터 승만후는 보량이 진평왕을 알현하러 입궁할 때마다 시녀를 보내 자신의 처소에 초대하여 호의를 보였다. 칠숙에게 시집간 후 친정과 떨어져 적적했던 보량으로서는 승만후의 호의가 고맙게 느껴졌다. 당시 아기가 없었던 보량은 승만후의 왕자 승덕에게 깊은 정을 느꼈다. 그때부터 둘은 서로의 처소를 자주 왕래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보량이 보로를 낳자, 승만후는 종종 보로를 보러 오기도 했던 것이다. 한동안 서찰을 바라보던 보량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찰을 펼쳤다.

   '칠숙공께 상의드릴 것이 있어 글월을 올리오.

왕후께서 병이 위중하시니 얼마 사시지 못할 듯하오. 폐하께서 이 몸을 총애하시니, 칠숙공께서 대신들의 중론을 모아주신다면 금상첨화일 것이오. 무엇보다 태후마마의 윤허를 받는 것이 중요하오. 태후마마께서는 칠숙공을 누구보다 총애하시니, 칠숙공께서 잘 말씀하여 주시면 반대하지 아니하실 것이오. 칠숙공께서 이 몸이 곤위에 오르도록 힘써주신다면, 이 몸은 칠숙공께서 태자의 위에 오르시도록 힘쓰겠소.'

    보량은 서찰을 읽다가 자신을 총애하였던 마야왕후가 위중하다는 대목에 이르자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왕후마마께서 아직 멀쩡히 살아계시거늘, 어찌 벌써 곤위의 자리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보량은 승만후가 칠숙을 태자의 위에 오르도록 힘쓰겠다는 대목에 이르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내로서 어찌 지아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허나 승만후의 약조를 믿을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로구나. 승만후는 자기 소생의 왕자가 있거늘, 과연 낭군을 태자의 위에 앉히려 하겠는가?'

    보량은 서찰을 탁상에 놓고 생각에 잠겼다. 이때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주인어른께서 왕림하셨나이다."

    칠숙이 하인으로부터 승만후가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보량을 찾은 것이었다.

    "안으로 모시거라."

    그녀는 탁상 위에 있는 서찰을 칠숙에게 건넸다.

    "이 서찰을 낭군께 전해드리라 하더이다."

    칠숙은 보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찰을 펼쳤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승만후가 곤위에 오른다면, 내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칠숙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찰을 보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서찰을 읽어보시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실직고하였다.

    "송구하오나, 첩이 감히 낭군의 서찰을 미리 보았나이다."

    "괜찮소. 어차피 부인께서도 아셔야 할 일이 아니오."

    칠숙은 서찰을 촛불로 태운 후 보량에게 말했다.

    "오늘 일을 절대 발설하면 아니될 것이오. 부인의 부모 형제에게도 절대 아니되오. 알겠소?"

    "첩은 낭군의 뜻을 따를 뿐이나이다."

    "고맙소."

    이 무렵, 마야왕후의 병이 위중하여 진평왕이 총애하는 후궁 승만후가 왕후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승만후의 가문 경주 손씨는 6두품으로 신라가 개국한 이래 왕후를 배출한 적이 없었으나, 승만후는 진평왕 재위 48년 만에 왕자를 낳은 위세를 앞세워 왕후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이때 진평왕에게는 승만후 외에도 지소태후의 소생인 숙명공주의 딸 화명과 옥명, 두 명의 후궁이 있었다. 혈통으로 봐서는 진골정통인 화명과 옥명 중에서 왕후를 간택하는 것이 순리이나, 진평왕의 마음은 왕자를 낳은 승만후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다만 중신들이 반대한다면 왕후의 자리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승만후는 만호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중신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칠숙에게 청탁한 것이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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