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선덕여왕

조정우 2013. 1. 20.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선덕여왕

 

   임진년(632) 정월 어느 날, 여덟달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있는 진평왕은 갑자기 의식이 혼미해지자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태자 덕만공주를 처소로 불렀다. 그는 덕만공주의 손을 잡으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비가 재위한 지도 어언 쉰네 해,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후회되는 것은 네 언니 선화를 보호하지 못한 것이다. 선화가 비록 우리 신라를 버리고 적국인 백제왕에게 시집갔으나, 그 일이 있기 전에 서동요로 인한 허황된 소문으로 누명을 쓰고 영흥사에 유폐되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였겠느냐? 내가 소문의 진상도 확인하지 아니하고 선화를 영흥사에 유폐시켰으니, 모든 것이 내 잘못이 아니겠느냐? 네가 위에 오르면 선화와 선화의 어미 보명의 지위를 회복시키거라. 너는 총명하여 섭정을 하면서 나라를 잘 다스렸으니, 다른 일은 네가 잘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삼가 아바마마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진평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내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하명만 하옵소서."

   "승만왕후를 부탁한다. 승만왕후가 비록 너보다 나이가 어리나, 명목상 네 어미가 아니더냐? 또한 내가 세상의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인이니, 태후로서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예우하여 다오.“

   "아바마마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덕만공주가 대답을 마치자 진평왕의 눈이 무심히 감기더니 더 이상 뜨지 못했다. 덕만공주가 진평왕의 맥박을 짚었으나 이미 멈춰 있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위에 올라 쉰네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진평왕이 붕어한 후, 덕만이 보위에 오르니, 이가 곧 신라 27대 왕 선덕여왕이다. 보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곧 조정의 요직을 임명하기 위해 대전회의를 열었다.

   "상대등에 을제를 임명하노라!"

   "병부령에 조계룡을 임명하노라!"

   "이찬에 수품을 임명하노라!"

   "대장군에 알천을 임명하노라."

   "소판에 사진을 임명하노라!"

   "파진찬에 춘추를 임명하노라!"

   "경외병 대장에 유신을 임명하노라!"

   선덕여왕이 새로이 시중에 임명한 금강이 새 각료를 공표하자, 대신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임영리, 대인, 염종 등 승만왕후를 따르던 대신들은 대부분 지방으로 좌천되었고, 을제, 수품, 사진, 알천, 유신 등 선덕여왕을 따르던 대신들은 요직에 중용되었던 것이다.

   병부령에 임명된 조계룡은 비사벌 가야왕의 왕손으로 선덕여왕의 태자시절에 태사(태자의 스승)를 역임한 바 있었다. 자신의 측근들을 조정의 요직에 임명한 선덕여왕은 재위 초기에 상공업을 장려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백제와 화친을 맺는 등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꾀하였다.

 

   어느새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임인년(642), 어느덧 춘추는 이찬의 지위에 올라 병부와 국정을 주도하는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선덕여왕이 마흔 살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조정의 수장인 상대등 수품조차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춘추의 의견을 물어 조정의 일을 결정할 정도로 춘추의 입지는 굳건했다.

   그해 정월 초하루, 일 년 전 보위에 오른 백제의 의자왕이 사비궁에 있는 신전에서 신료들을 거느리고 천신에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의자왕의 어머니 선화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국인 신라를 등지고 무왕을 따라 백제로 시집온 지 42년째 맞는 정월, 선화는 40여 년 전 정월 초하루에 무왕이 천신에 제사를 올리던 광경이 생생히 떠올라 감개가 무량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의자왕은 실로 오랜만에 선화와 함께 사비궁의 뜰을 거닐었다. 오랫동안 병치레를 해온 선화의 안색은 병색이 완연하였지만 표정만큼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선화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왕을 바라보았다.

   "성상, 이렇게 성상과 함께 뜰을 거닌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가물하구려! 그간 성상께서 이 어미의 병시중을 하시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소? 이 어미가 속히 쾌차하여 성상과 이렇게 뜰을 자주 거닐었으면 참으로 좋겠소."

   "소자는 어마마마를 모실 때 가장 행복하오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옵시고, 옥체를 강녕히 하옵소서."

   "이 어미가 속히 쾌차하여 성상의 근심을 덜까 하오."

   순간 선화는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의자왕이 수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어마마마, 괜찮사옵니까?"

   선화는 가슴의 통증이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햇살처럼 밝았던 선화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의자왕이 다급하게 시종들에게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속히 어마마마를 처소로 모시거라! 속히 태의를 부르거라!"

   시종들의 부축을 받은 선화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월성 동북쪽에 있는 첨성대에서 한눈에 보아도 빼어난 미모의 낭자가 중년 사내의 손을 잡은 채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자는 신기한 듯이 밝게 빛나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다가 외쳤다.

   "아버님, 오늘따라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밝사옵니다. 나라에 큰 경사가 날 조짐이 틀림없사옵니다."

   중년 사내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고타소가 천문가가 다 되었구나!"

   춘추는 친어미 없이도 너무나도 곱게 잘 자라준 고타소를 사랑스럽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열여덟의 어엿한 낭자가 된 고타소는 천하절색이었던 어머니 보라를 쏙 빼닮아 대단히 아름다웠다. 고타소는 야밤에 별 구경하기를 좋아하여 종종 아버지 춘추를 졸라 첨성대에 오곤 하였는데, 때마침 북두칠성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것이다.

   "품석 오라버니께 이 광경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사옵니다."

   춘추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품석이 그리도 좋으냐?"

   고타소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서로 그리 연모하시어 운명적으로 혼인하셨다 들었사옵니다. 아마도 소녀와 품석 오라버니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생각되옵니다."

   춘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이모이신 새주께서 너와 보로를 맺어주자 하여 이미 승낙하였는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새주가 되어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있는 보량이 얼마 전 춘추에게 자신의 아들 보로와 고타소의 혼담을 꺼냈다. 이미 고타소의 마음은 품석에게 기울어 있었지만, 이를 몰랐던 춘추는 보량에게 흔쾌히 허락하여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이다. 고타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녀가 보로를 만나 혼인 문제를 매듭짓겠사오니, 아버님께서는 심려치 마소서."

   상대등 수품의 차남인 품석은 화랑도의 풍월주 천광의 이복동생으로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도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대아찬과 호성장군을 역임하고 있었다. 수품은 진흥제와 미실 간의 딸 반야공주의 아들로 품석은 고타소와 육촌지간이었다. 고타소는 소싯적부터 품석의 이복누이 천운과 친자매처럼 지내며 수품의 집에 자주 왕래하다 품석과 정분이 생겼던 것이다.

   춘추와 고타소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시위 하나가 말을 몰아 첨성대로 달려왔다.

   "이찬 어르신! 백제의 태후이신 선화공주께서 승하하셨다 하나이다. 하여 폐하께서 이찬 어르신을 부르시오니, 속히 입궁하소서."

   언니 선화의 부음 들은 선덕여왕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지병인 심통이 악화되어 자리에 몸져 누워있었다. 춘추가 처소 안으로 들어와 읍을 올리자, 선덕여왕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위에 오른 지도 어언 십년, 그간 우리 신라와 백제의 화친을 중재해 오셨던 선화공주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양국의 평화가 유지되기 힘들 듯하구나.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소신이 듣건대, 백제는 선왕 때부터 국력을 기울여 군사력을 키워왔다 하오니, 유능한 장수로 하여금 아국의 요충지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내 너에게 모든 것을 일임할 터이니, 중신들과 상의한 후 보고토록 하거라."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춘추가 대전을 나서자, 태후전의 시종이 다가왔다.

   "태후마마께서 춘추공을 부르시나이다."

   춘추가 태후전에 들어와 인사를 올리자, 승만태후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량 새주께 들으니, 춘추공이 우리 보로와 공의 딸 고타소의 혼인을 승낙하였다 하더이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소."

   고타소의 의사도 묻지 않고 보량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고타소는 사촌동생인 보로를 친동생인 법민보다 더 아꼈는지라, 보로를 두고 품석과 혼인하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승만태후가 이미 혼담이 성사된 것처럼 여기자, 춘추는 난감하였지만 애써 감추며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소신의 딸을 어여삐 여기시오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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