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김춘추, 통일의 영웅인가, 난세의 간웅인가?

조정우 2012. 10. 5. 08:00

 


김춘추, 대왕의 꿈

저자
#{for:author::2}, 김춘추, 대왕의 꿈#{/for:author} 지음
출판사
아름다운날 | 2015-08-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삼국을 통일한 민족의 영웅인가? 외세를 끌어들인 통한의 군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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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저의 첫소설인 '김춘추, 대왕의 꿈'이 출간되었습니다.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이 한창 인기일 때 재미삼아 쓴 소설인 '선덕여왕'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이때 작가의 꿈을 키웠고, 드디어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삼국지와 무협지 매니아였는데, 그 결과, 소설가로 데뷰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 대해 한가지 덧붙이면, 저의 선생님이신 신재하 작가님과 공동 집필을 하였는데, 저와 선생님은 소설을 통해 '식민지 사관'과 '중국 사대주의'로 인해 왜곡되어 온 역사 인식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가치관이나 주관이 있기에, 김춘추의 나당동맹에 대해 옳다 그르다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 역사를 깍아내리고자 일제가 남긴 유물인 식민지 사관의 영향으로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먼저 식민지 사관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한민족은 반만 년에 이르는 역사, 세계 4대 문명이라는 중국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찬란하게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건만, 일본은 이러한 한국의 민족적 자긍심을 말살하기 위해 당시 요동을 비롯한 동북아를 지배했던 단군 조선을 신화로 만들고, 고구려, 백제의 지배 영역을 축소시켜 가르쳐왔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이 여러 역사서를 발간하고, 연구서를 발표했지만, 식민지 사관주의에 빠진 역사학자들은 이들의 역사 연구를 인정하지 않고 소수의 의견으로 철저히 무시해왔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를 배우고 말았지만, 이제라도 어느 쪽이 맞는지, 그 진실을 가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중국 사대주의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가 쓰여진 건 고려시대인데,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철저히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역사서를 쓰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철저한 사대주의의 역사관을 가진 김부신은 삼국사기에서 백제를 항복시키고, 후연과 거란을 정복하는 등, 동북아에 화북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축소한 흔적이 보이는데, 만약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업적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고려인 김부식은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던 왕건의 건국 이념과는 완전히 달리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했는데, 이때 이미 중국 사대주의가 고려 조정에 뿌리를 내렸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왕건이 국호로 정한 '고려'는 '고구려'의 다른 명칭으로 장수왕 무렵부터 중국은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 시대에 중국 여러 역사책에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했는데, 이 부분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나중에 자세히 언급할까 합니다.

   여하튼 '고려'라는 명칭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고려 태조 왕건의 의지였음에도 나약한 고려왕들은 요동 회복에 소극적이었고, 그 결과 고려는 끝내 요동을 회복하지 못했지요.

   회복을 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분열로 여러 차례 요동을 차지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고려는 회복하려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리장성을 넘어 찬산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는 요동은 영토 자체가 산지가 험악한 천혜의 요새로 중국의 분열을 틈타 장악한다면, 회복한 후 충분히 지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이러한 시도 자체조차 없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나약했던 것이 아닐지요.

   고려 말기에서야 최영 장군이 주축이 되어 요동 회복을 시도하였지만, 요동 정벌의 총사령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는 바람에 요동 회복 시도는 산산히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 역시 요동을 회복할 의지는 지녔지만, 결국은 단 한번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포기하였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고려, 조선, 두 왕조는 요동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중국 사대주의라는 민족적 종속의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로 이어지는 중국의 왕조를 고려, 조선, 우리나라의 두 왕조가 이들을 상국으로 삼겼고, 상국을 공격하는 것은 배신이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역사관이 제대로 한번 시도조차 못한 체 요동을 영영 잃은 결과를 낳았지요.

   실제로 우리나라의 영웅들이 요동을 회복하려 할 때마다, 상국을 치는 것은 배신이라는 식의 사대주의 신하들의 반대로 좌초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 전에 우리 민족의 영토였던 요동을 잃은 것은 나당동맹으로 고구려를 멸당시키는데 공조했던 김춘추의 잘못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만주가 비록 우리 민족의 땅이었지만, 한번 잃고 나서 다시 되찾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가 다시 재기 힘들도록, 수십만의 고구려인들을 중국 땅에 이주 시킴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량을 약화시켰고, 그 자리에 거란족과 말갈족 등의 타민족을 주둔시킴으로서 결국, 대조영이 일으킨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해도 백성들의 다수가 말갈족이고, 고구려 유민들은 소수가 되는 비극의 역사가 초래되었던 것입니다.

   나라를 멸망시킨 후, 민족을 이동시키는 것은 유래가 드문 일로 당이 고구려를 얼마나 경계했는지 추측할 수 있겠지요.

   한 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 나라의 백성들을 자국으로 이주시킨 당의 정책은 민족 말살정책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김춘추가 나당동맹으로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다면, 이와같은 참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이러한 당의 혹독한 고구려 말살 정책에도 고구려는 발해라는 이름으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지만, 고구려의 백성들은 당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이미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발해 지역에 없었고, 결국 남아있던 말갈족이 다수인 한지붕 두 민족의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발해가 망하고 나서 발해가 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백성들의 다수가 말갈족이었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건데, 김춘추의 나당동맹의 결과가 가져온 참극이 결국 요동을 영영 잃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판단은 독자들 각자에게 맡길까 합니다.

 

 

링크 글 : 김춘추, 난세의 영웅인가 역사의 죄인인가? (여강여호 글)

추천 글 :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유신과 계백 (밑줄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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