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

명량해전도, 명량 대첩의 전술을 밝힌다!

조정우 2014. 8. 4. 12:00

명량해전도(鳴梁海戰圖), 명량 대첩의 전술을 밝힌다!


이순신 불멸의 신화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세시 | 2014-07-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의 전술...
가격비교

   어제에 이어 오늘 명량 대첩에서 쓰인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살펴보겠다. 

먼저 명량해전도(鳴梁海戰圖一, 명량해전도에다 한일자(一)가 있는 것은 명량해전도가 더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 점은 잘 모르겠다)를 보자. 


   조선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량해전도가 명량 대첩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133척이냐 333척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이마저도 이 그림이 설명해주고 있다. 

   그림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으로 추정되는 전선이 명량 해협에서 가장 좁은 곳에서 아마도 133척을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멀리 명량 해협의 밖에서 다른 일본 함대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200여 척이 되지 않을까 싶다. 

  즉, 133척은 명량 해협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을 상대로 싸웠고, 200여 척은 명량 해협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장선의 한참 뒤에, 명량 해협의 끝부분에 나머지 11척이 일자진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머지 한 척은 명량 해협 밖에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우수영 앞바다의 섬, 양도의 옆에 배들이 있는데, 이것은 판옥선, 즉 전선이 아니라 피난선이다. 

    얼핏 그림으로 보아도 배의 크기가 작아 전선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장선을 공격하고 있는 133척의 일본 함대 중 유난히도 큰 전선이 있는데, 일본의 대장선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로 보아 명량 해협이 세키부네만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명량 대첩에 대한 일본측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133척의 대부분이 세키부네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일본 수군은 어째서 대포를 쏘지 않고, 조총 사격과 도선 후에 백병전을 시도했느냐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명량의 빠른 물살을 타고 날렵한 세키부네가 도선을 시도하는데 유리할 뿐 아니라, 육중한 아타케부네가 명량의 가장 좁은 해협을 공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일본 수군은 육중한 아타케부네가 침몰이라도 하면, 수심이 얕은 명량 해협을 가로막을까봐 걱정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기록으로 보아 명량 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세키부네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의 대장선은 아타케부네일 수도 있지만, 대포가 장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큰 세키부네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명량 해협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암초에 부딪칠까봐 아타케부네를 투입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은데, 어쨌던간에 대포가 없는 일본 수군은 단 한 척의 판옥선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본 수군의 주력선인 세키부네는 대포를 장착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타케부네조차 들보에 매어야 한두개의 대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함선은 삼나무나 전나무로 만들었는데, 삼나무나 전나무는 내구성이 약해서 대포를 장착하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참나무나 소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참나무와 소나무는 내구성이 강해 좌우로 20여 문의 대포를 장착해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 수군은 명량에서 대포없이 싸울 수 밖에 없었고, 단 한 척의 판옥선이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에서 무려 133척의 세키부네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일본 수군은 왜 좁은 명량으로 들어왔을까?

   명량으로 가지 않고 진도를 돌아 갈 수는 없었을까? 

   명량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함대가 진도를 돌아 협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필자의 추측을 말하자면, 일본 수군은 명량으로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진도를 돌아 진격한다면, 조선 수군과 싸우기도 전에 거친 물살과 싸워야 했다. 

   명량 해전이 있던 시기는 음력으로 9월 16일, 늦가을이다.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이 되면 파도가 거칠어지는데, 이 거친 바다를 돌아 조선 수군과 싸운다면 싸우기도 전에 진이 빠질 것이다. 

   임진년 9월 1일, 이순신이 부산포로 진격했을 때, 부산포의 바다는 물살이 거칠어 조선 수군은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량 해전 때는 9월 16일이니, 바다가 더욱 거칠지 않았을까. 

   명량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대가 진도를 돌아 협공에 나서지 않은 이유도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명량해전도를 통해, 명량은 일본 수군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길목으로, 이순신 장군은 이 명량이 일본 수군이 지나칠 수 없는 요해임을 알고, 이곳으로 유인하여 이겼던 것임을 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대략적인 전술이, 이 명량해전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 대해서는 내일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