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

명량 대첩의 전술을 밝힌다! 이순신 불멸의 신화

조정우 2014. 8. 5. 08:00



이순신 불멸의 신화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세시 | 2014-07-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의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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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도 언급했지만, 이 명량해전도(鳴梁海戰圖一)가 명량 대첩의 신화를 이룬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말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 한 척이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에서 133척의 일본군 함대를 상대했는데, 문제는 일본 수군이 육지에 상륙하여 수륙 양면으로 협공하는 경우였다. 명량의 가장 좁은 해협의 폭은 불과 330m로 육지에서 대포를 쏘아댄다면 이곳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명량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허허실실, 즉, 허장성세로 명량 주변에 대규모의 복병을 감춘 것처럼 위장하여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량 대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강강술래로, 이순신 장군은 여인들에게 명량 해안에서 강강술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허허실실로 일본 수군의 눈을 속인 것 같다. 

   난중일기를 봐도 일본 수군이 명량 해안에 상륙했다는 말이 없고, 조선 실록에서도 명량 해안에서 대규모의 육전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명량의 서쪽 해안에서 육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명량 해전의 후반부에 벌어진 전투가 아닐까 싶다. 대규모의 육전이라기 보다는 산발적인 육전이었던 것 같다. 

   이미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승기를 잡은 후에 패색이 짙던 일본 수군이 고육지책으로 육전에 나섰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일본 수군이 분풀이 겪으로 우수영이라도 불태워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없애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일본 수군이 명량 해전 초기에 상륙을 시도했다면 전세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 수군이 명량 해안에 상륙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나 조선 실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마치 최후의 발악을 하듯 명량 해안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의 근거지라도 없앤 후 차후에 다시 공격해 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강강술래가 어떻게 일본 수군의 상륙을 저지시켰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번 상상해보자. 

   여인들이 명량 해안에서 강강술래는 부를 수 있는 것은, 해안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일본 수군은 착각할 수 있다. 

   연약한 여인들이 대담하게 명량 해안에서 태연하게 강강술래를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전라도 우수영은 강강술래 우리 장군 대첩지라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장군의 높은 공은 강강술래 천추만대 빛날세라 강강술래......"

    허허실실! 허허실실의 고사는 삼국지에서 유래한다. 제갈공명이 텅빈 성에서 한가롭게 칠현금을 연주하여 1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사마의를 내쫓았다는 고사다. 사실인즉,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나관중의 허구였지만, 이 이야기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역사학자들조차도 사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삼국지를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진 이순신 장군 역시 이 이야기를 실제의 역사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의 허허실실은 통했다. 일본 수군에게는 당시 20여 차례의 해전에서 모두 참혹할 정도로 참패를 당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이 이순신 장군의 허허실실의 계책이 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13척으로 133척을 이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본 수군의 두려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불과 13척 뿐임을 알고도 곧바로 쳐들어오지 못했다. 명량 해전의 9일 전에 벌어진 벽파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같은 13척의 함선으로 기습해 왔는데, 조선 수군의 전력을 시험해 본 전초전의 성격이었다.  

   압도적인 함대를 가지고도, 구태여 전초전을 치룬 것은 그만큼 이순신 장군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투는 오히려 신병이 절반 이상인 조선 수군의 실전 경험만 쌓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위치와 함선의 규모를 알고도 곧장 쳐들어 오지 못한 것도, 명량 해전 때 해안에 상륙하지 못한 것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133 대 13의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에서 일본 수군은 구태여 복병이 있을지도 모르는 해안에 상륙하기가 꺼려졌으리라. 아마도 일본 연합 함대의 대장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하여 전세가 기울어진 후에서야 이판사판으로 명량 해안에 상륙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때는 이미 수많은 의병들이 명량 해안에 모여든 상태였기에 의병들이 육지에 상륙한 왜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명량해전도에서 볼 수 있듯이, 양도에서 피난선이 허장성세(병력이 많게 보이는 것으로 위장)를 펼치고 있었는데, 피난선의 숫자가 무려 1000척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전선으로 위장한 1000척의 피난선이, 일본 수군으로 하여금 경거망동하게 명량 해안에 상륙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리라. 

   실제로 명량 해전 중, 20여 척의 피난선이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척의 피난선에 10명만 타도 200여 명의 병력이다. 당시 명량 해전에서 추정되는 조선 수군의 숫자가 1500~2000으로 추정되는데, 노를 젓는 겪군을 제외하면 1000명도 되지 못했을 텐데, 수백의 해상 의병이 큰 힘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연약한 여인들이 강강술래를 부르며 목숨을 건 허허실실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수백에 이르는 해상 의병들이 분기탱천하여 전투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강강술래가 명량 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해전에서는 어떤 전술이 펼쳐졌을까.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철쇄로 묶인 조조의 함대를 화공으로 겪파했듯이, 이순신 장군 역시 화공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궤멸시켰던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 대포 자체가 화공 무기인데다, 명량에서 신기전이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기전은 화약통이 연소되는 힘으로 날아가는 화공 무기로, 화약통의 화약이 일본 함선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리라. 

   대포와 신기전을 비오듯 쏘아댄다면, 비좁은 명량 해협에서 서로 부딪쳐 130여 척의 일본 함대는 마치 철쇄로 한데 묶은 조조군의 함대처럼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으리라.

   명량의 거친 물살이 밀물에서 썰물로 바뀔 때 화공! 이것이 바로 13척으로 133척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의 전술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리뷰 글 : 이순신, 불멸의 신화 (파란자전거님 리뷰)

          : 이순신 불멸의 신화 (라떼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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