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의자왕

조정우 2013. 1. 27.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의자왕

 

   그해 정월 초하루, 일 년 전 보위에 오른 백제의 의자왕이 사비궁에 있는 신전에서 신료들을 거느리고 천신에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의자왕의 어머니 선화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국인 신라를 등지고 무왕을 따라 백제로 시집온 지 42년째 맞는 정월, 선화는 40여 년 전 정월 초하루에 무왕이 천신에 제사를 올리던 광경이 생생히 떠올라 감개가 무량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의자왕은 실로 오랜만에 선화와 함께 사비궁의 뜰을 거닐었다. 오랫동안 병치레를 해온 선화의 안색은 병색이 완연하였지만 표정만큼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선화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왕을 바라보았다.

    "성상, 이렇게 성상과 함께 뜰을 거닌 것이 대체 얼마만인지 기억조차 가물하구려! 그간 성상께서 이 어미의 병시중을 하시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소? 이 어미가 속히 쾌차하여 성상과 이렇게 뜰을 자주 거닐었으면 참으로 좋겠소."

    "소자는 어마마마를 모실 때 가장 행복하오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옵시고, 옥체를 강녕히 하옵소서."

    "이 어미가 속히 쾌차하여 성상의 근심을 덜까 하오."

    순간 선화는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의자왕이 수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어마마마, 괜찮사옵니까?"

    선화는 가슴의 통증이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식간에 햇살처럼 밝았던 선화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의자왕이 다급하게 시종들에게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속히 어마마마를 처소로 모시거라! 속히 태의를 부르거라!"

    시종들의 부축을 받은 선화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중략)

 

 

   백제 사비궁에 있는 선화태후의 사당에서 의자왕이 어머니 선화태후의 명복을 빌고 있을 때, 시종이 2척 길이의 사각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와 영전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의자왕은 천천히 나무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피가 낭자한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대야성주 품석의 머리였다. 의자왕은 상자를 닫은 후 선화태후의 명복을 빌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의 원수, 미실의 증손 품석의 머리를 어마마마의 영전에 바치나이다. 부디 저승에서 편히 잠드소서."

    40여 년 전, 신라의 공주였던 선화태후를 영흥사에 유폐시킬 것을 진평왕에게 주청드린 사람은 보종의 어머니 미실이었다. 미실의 모함으로 한밤에 몰래 사내를 만났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영흥사에 유폐되었던 선화태후는 이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어 반평생을 병치레하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의자왕의 미실에 대한 증오는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여섯 달 전, 선화태후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의 선덕여왕은 사신을 보내 의자왕의 동의를 얻고는 의술이 뛰어나 신의라 불리는 보종을 백제로 보냈었다. 선화태후의 조카인 춘추 또한 보종과 함께 백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때 의자왕은 선화태후를 모함한 자가 미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춘추와 보종이 처소로 찾아오자, 선화태후는 시종과 시녀를 모두 처소 밖으로 내보낸 후 춘추에게 물었다.

   "춘추야, , 너에게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말씀하소서."

   "사십여 년 전, 내가 서동요 소문으로 영흥사에 유폐되었던 것은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필시 사료관에, 폐하께 나를 영흥사에 유폐할 것을 주청 드린 자가 누구인지 기록이 있을 터인데,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춘추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보종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통곡하듯 말했다.

   소인의 어머니 미실궁주를 용서하소서. 차라리 자식 된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순간 선화태후의 온몸이 경련으로 떨렸다.

    나를 모함한 사람이 미실궁주란 말인가!'

    보종은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본디 심성이 정직하고 강직한 보종은, 자신의 어머니 미실로 인해 선화태후가 평생 가족도 못 보고 타국 땅 백제에서 살게 되었다는 자책감과 연민의 감정 때문에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화태후는 이러한 보종을 보고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되었소. 이미 지나간 일, 미실궁주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늘 이제 와서 지난 일을 탓한들 무엇 하겠소.”

   미실은 한깨 보종을 선화와 맺어주려 하였지만, 선화의 언니인 양명이 보종을 연모하여 양명에게 맺어준 바 있었다. 자신을 며느리로 삼으려 했던 미실이 도리어 모함을 하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이미 병세가 깊었던 선화태후는 폐부가 상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선화태후는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춘추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부질없는 것을 물었구나. 그만 되었으니 네 장인을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도록 하거라."

    춘추와 보종이 사비궁을 떠난 후 선화태후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때때로 신열을 앓으며 누워 있던 선화태후는 아들인 의자왕이 와 있는 줄도 모르고 비몽사몽간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미실궁주, 어찌 나를 모함하신 게요...... 참으로 야속하오......"

    이때 의자왕은 미실이 자신의 어머니 선화태후를 모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어머니가 평생을 괴로워하며 심약하게 살다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보름 후, 선화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자왕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였다.

    "미실의 후손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리라!"

 

    의자왕은 태생적으로 복수의 한을 품은 왕의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군주였다. 신라 출신의 어머니 선화에게서 태어난 왕자로서, 아버지 무왕의 또 다른 왕후인 우왕후 사택비와 사씨 귀족들의 핍박과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올라 사택비와 사씨 귀족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간신히 그들을 몰아내고 왕권을 쥐게 된 의자왕은 어머니 선화태후마저 오래도록 심통을 앓다가 승하하자 점점 그동안 쌓였던 원한의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윤충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할 때, 선화태후를 모함했던 미실의 증손이자 대야성주인 품석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했던 것이다. 이에 윤충은 품석에게 자결할 기회를 주었고, 그렇게 품석의 목이 선화태후의 영전에 바쳐진 것이다. 품석의 피를 본 의자왕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실성한 듯 소리쳤다.

   어마마마께서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 나를 거스르는 자는 모두 목을 베리라!”

    의자왕은 선화태후가 죽고 나자 이성을 잃고 이미 귀향 보낸 사씨 귀족들을 참형에 처하고, 천 명이 넘는 궁녀들을 궁궐에 두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보위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면서 확실한 왕권을 거머쥔 의자왕은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충언을 하는 신하를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끌고가 목을 베게 하는 등 폭군의 광기가 절정에 치닫게 되었다.

   폐하, 고타소는 어찌하오리까?”

   "고타소? 오호, 품석의 말이렷다? 아직 안 죽였느냐?"

   "지금 외궁 감옥에 하옥되어 있나이다."

   "계집도 미실의 증손이렷다. 당장 끌고 오라 이르거라!"

    이때 고타소는 사비궁의 외궁에 있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원래 죄를 지은 환관이나 궁녀를 가두는 감옥이었지만, 시종장이 임의로 고타소를 하옥시킨 것이었다. 의자왕은 미실의 증손녀인 고타소를 죽이고자 하였다.

   얼마 후, 시종이 곱게 단장한 고타소를 선화태후의 사당으로 데려왔다. 품석의 생사를 아직 모르고 있는 고타소는 낭군 품석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시종의 거짓말에 속아, 단장하라는 시종의 명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곱게 단장한 고타소를 보자, 순간 의자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타소의 얼굴과 분위기가 선화태후와 너무나도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고타소의 할머니 천명공주와 외할머니 양명공주는 모두 선화태후의 동복언니로 선화태후와 많이 닮았기 때문에 고타소는 마치 선화태후와 판박이처럼 닮았던 것이다. 게다가 한창 피어나는 고타소의 미모는 삼한을 통틀어보아도 가히 천하절색이라고 할 정도였다. 의자왕은 잠시 넋이 빠진 얼굴로 고타소를 바라보았다.

   낭군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었던 고타소는 사당에서 황금관을 쓴 의자왕을 보자 자신이 시종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고타소는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의자왕에게 물었다.

    "낭군께서는 어디 계시오?"

    시종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고타소를 꾸짖었다.

    "무엄하다! 어서 어라하께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고타소는 낭군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의자왕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낭군을 한 번만 뵙게 해주시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의자왕은 처음에 미실의 증손녀인 고타소를 함께 죽여 어머니의 영전에 바칠 생각이었지만, 어머니와 너무나도 닮은 고타소를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의자왕은 고타소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낭군 품석은 죽었다. 대야성 함락 후 자결하였다 들었다.”

    고타소는 의자왕이 품석을 죽였다고 확신했다.

    네 이놈, 네가 낭군을 죽인 것이 틀림없다. 내 아비가 김춘추이시니라. 너를 가만 놔둘 것 같으냐? 반드시 너를 죽이고 백제를 멸할 것이니라!”

    시종이 눈을 부라리며 고타소에게 호통쳤다.

    "미친 것! 어라하께 그런 망발을 지껄이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어서 끌고 나가라!"

    놓아라, 이놈들. 간사한 악귀들아! 약조를 어기고 항복한 장수를 죽이는 치졸하고 비겁한, 금수만도 못한 놈들! 언젠가 우리 신라가 너희 백제를 반드시 짓밟아 멸망시켜 이 원수를 꼭 갚아줄 것이다.”

    호위병사들이 고타소의 팔을 꺾어 끌고 나가려 했다.

    되었다. 감옥에 가두어 두거라.”

    의자왕은 고타소를 보자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천명이 넘는 궁녀를 거느리고 있는 의자왕이었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호통치듯 달려드는 계집은 처음 보기도 했거니와 죽이기에는 그 미색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은 고타소를 죽이기 전에 좀 더 두고 보고 싶었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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