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무너지는 대야성

조정우 2013. 2. 4. 08: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무너지는 대야성

 

   대야성은 80년 전 신라에게 패망했던 대가야의 도성으로 사방이 강과 해자로 둘러 천연의 요새였다. 대야성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이 있고, 황강을 건너 서쪽으로 고소산성과 갈마산성이 있는데, 이 네 성 또한 모두 험준한 산비탈에 세운 천연의 요새였다.

    신라의 북서쪽 하늘에서 봉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야성주 품석은 성루에서 봉화를 보자, 신호를 해독할 수 있는 파수병을 불러 물었다.

    "봉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파수병은 한동안 봉화 연기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가잠성이 백제군에 함락되었다는 뜻이옵니다."

   품석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유신공께서 가잠성을 구원하러 가셨건만, 가잠성이 함락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품석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여 부성주 서천에게 명을 내려 대야성 주변의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하였다. 그날,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되었을 무렵, 파수장이 성루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와 부복하며 아뢰었다.

   "성주님, 일만쯤 되어 보이는 백제군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으로 진격해오고 있다 하옵니다. 대야성에서 지척인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이 함락된다면 대야성까지 위험해지니, 속히 군대를 파병하여 구원하소서!"

   품석은 크게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뭐라? 일만이나 되는 대군이 코앞에 이를 때까지 파수병들은 대체 무엇을 하였단 말이냐?"

   백제 국경에서 대야성까지는 수백 리 거리로, 곳곳에 배치된 파수병들이 망을 보고 있었지만, 백제군이 야밤에 험한 산길로 진군하여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것이다.

   "적들이 험한 산길로 진군하여 미처 파수병들의 눈에 뜨이지 아니한 듯하옵니다."

   품석은 냉정을 되찾고 파수장에게 물었다.

   "백제의 장수는 누구인지 파악되었느냐?"

   "파수병의 보고에 의하면, 윤충이라 하옵니다."

   성충의 아우인 윤충은 천하의 명장으로, 실전 경험이 충분치 않은 품석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품석이 장수들을 보며 말했다.

   "윤충은 백제가 자랑하는 천하의 명장이니, 정면으로 싸우기보다는 농성전을 펼치는 것이 상책이다.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농성전을 준비하라 이르거라."

   사찬 죽죽이 품석에게 말했다.

   하오면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은 버리시려 하시나이까?”

   품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은 대부분 보병인데, 병사를 이끌고 나갔다가 적군의 기병에 퇴로가 끊긴다면 대야성마저 위험해질 것이다. 대야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니, 철통처럼 방어하여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손자가 살아난다 하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급찬 용석이 품석에게 말했다.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은 사방이 험난한 요새이니 적은 병사로도 능히 대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소장이 목숨을 걸고 싸울 터이니, 일천 기만 내어 주소서."

품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천 기로 일만 기를 당해낼 수 있겠느냐? 구원군을 기다려야 한다. 설령 구원군이 오지 아니한다 하여도 대야성 주변의 성들은 식량이 충분치 않으니, 백제군이 대야성을 손에 넣지 못하면 결국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랑 출신의 장수 죽죽과 용석은 품석에게 수백 기라도 달라고 청하였지만, 품석은 용맹한 부하 장수인 죽죽과 용석을 잃을까 염려되어 끝내 듣지 않았다.

   얼마 후, 금성산성과 악견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대야성에 전해져 왔다. 백제군의 공격에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한 대야성주 품석을 원망한 두 성의 백성들이 성문을 열어 백제군에게 항복했던 것이다. 백제군이 부교를 세워 황강을 건너 고소산성과 갈마산성을 공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성마저 백제군에 함락되었다. 순식간에 대야성 주변의 네 성을 점령한 백제군은 여세를 몰아 곧바로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은 성 주변이 강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어 백제군은 이동식 부교인 접첩교를 타고 해자를 건너 성을 공격하였다. 백제군의 운제가 접첩교를 타고 성벽에 놓였지만, 신라군의 철통 같은 방어에 백제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퇴각하라!"

    윤충의 명이 떨어지자, 백제군은 접첩교를 철거한 후 퇴각하였다. 이때, 말을 탄 백제군 하나가 백기를 휘날리며 신라군에 항복을 청하였다.

   "나 모척은 본시 신라인으로 십 년 전 가잠성 전투에서 백제군에 사로잡혀 항복하여 오늘에 이르렀소이다. 고국을 잊지 못하여 이제 성주께 항복을 청하오니 부디 받아주시오."

   옛 가야 귀족 출신의 신라인 모척은 기실 신라의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백제로 망명 갔었는데, 윤충의 명을 받고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었다. 모척은 포박당한 채 품석 앞에 끌려왔다.

   "소장은 본시 대야성 사람으로 십 년 전 가잠성의 전투에서 백제군에 사로잡혀 부득이하게 백제의 장수가 되었으나, 단 한 순간도 소장의 조국, 신라를 잊어본 적이 없사옵니다. 죽어도 신라의 귀신이 될 각오로 항복한 것이오니 성주께서는 부디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죽죽이 모척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조국을 배신한 자를 용서하여 주시면 아니되옵니다.“

   모척과 같은 옛 가야 출신인 사지 검일이 나서며 품석에게 간하였다.

   "모척이 비록 적군에 항복하였다 하나, 신라의 장수로 있을 때 공을 많이 세운 바가 있사오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검일은 모척의 친구로서 차마 친구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품석은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라 숙고 끝에 마침내 모척에게 말했다.

   "내 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허나 신라를 배반한 네가 다시 신라의 장수가 되려면 폐하의 윤허가 내려져야 하니, 그때까지는 백의종군하며 자숙하고 있거라."

   "장군께서 소인에게 기회를 주시오니, 감읍할 따름이나이다."

   "이자를 데리고 나가거라."

   검일이 모척을 데리고 나갈 때 모척이 검일의 귀에 속삭였다.

   ", 공께 긴히 할 말이 있소이다. 나를 공의 처소로 데려다주시오."

   검일의 처소로 온 모척이 말했다.

   "내 공께 어라하의 밀지를 전해주겠소. 공께서 양곡 창고를 불태우면 성주에 봉하겠다고 말씀하셨소이다."

   검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참이오?"

   "어라하께서 식언을 하실 리가 있겠소이까?"

   모척은 같은 가야 출신인 검일이 신라 지배 하에서 푸대접 받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가야 부족장의 장남인 검일은 내심 대야성주가 되리라 기대했건만 난데없이 신라 왕족인 품석이 성주로 내려오면서 자신은 말단 장수인 창고지기 자리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모척의 제안은 본디 가야 지배층 출신이면서도 푸대접을 받아온 검일의 마음을 단박에 흔들어 놓았다.

   품석이 성루 안에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용석이 황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성주, 양곡 창고에 큰 불이 났사옵니다!"

   품석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뭐라?"

   "창고에 큰 불이 났사옵니다. 저기를 보소서!"

   용석이 가리키는 쌍창문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벽 수비병 이외의 모든 인원을 동원하여 불을 끄라 이르라!"

   양곡 창고에는 불화살에 쓸 기름이 보관되어 있었기에 불은 삽시간에 번졌고, 창고에 보관된 양곡을 모두 태운 후에야 진화되었다. 품석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잿더미가 된 창고를 바라보았다.

   '군량이 모두 타버렸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때 죽죽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품석에게 말했다.

   "검일과 모척이옵니다! 그 두 놈이 공모하여 창고에 불을 지른 후 성벽을 넘어 달아났다 하옵니다!"

   품석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내 검일을 믿고 군량창고를 맡겼건만, 어찌 이럴 수가......"

   그때, 사방에서 요란한 북소리가 울리더니, 백제군이 성벽을 향해 돌진해왔다. 품석이 성루에 올라 전황을 살피고 있는데, 북쪽 성문 아래에서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백제 대장 윤충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과 가야 백성들뿐이니, 신라인들은 떠나도 좋다. 하지만 기회는 지금뿐이다. 성문을 열고 나온다면 내 너희들을 온전히 신라로 돌려보낼 것을 하늘에 맹세하겠다!"

   윤충의 맹세를 들은 품석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량이 남김없이 불타버린 상황에서 단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 뿐 아니라 이를 알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내 고타소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하디귀한 아내 고타소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품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결심을 굳힌 품석은 서천을 불러 명했다.

   "적장 윤충에게 내 뜻을 전하거라. 곧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갈 터이니, 성에서 오백 보 물러나라 하거라."

   서천이 품석의 말을 전하러 가려는 순간, 죽죽이 서천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성주님은 화랑의 도를 배운 분이시온데, 어찌 싸우지도 아니하고 항복하려 하시나이까? 성주님의 장인이 병부령을 관장하시는 춘추공이 아니옵니까? 춘추공께서 대야성의 위급한 사정을 들으시면 필시 구원군을 보내실 터이니, 부디 항복을 재고하소서."

   용석이 품석에게 말했다.

   "며칠 굶는다고 죽는 것 아닌데, 어찌 항복하려 하시나이까?"

   "굶주린 병사들이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

   품석은 죽죽과 용석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항복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타소를 무사히 서라벌로 귀환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천이 윤충에게 품석의 말을 전하자, 윤충은 병사들을 오백 보 물렸다. 품석에게 성 주변을 살펴보라는 명을 받은 서천이 병사들을 데리고 나와 백보 쯤 앞으로 나갔을 때, 갑자기 성 주변의 숲에 숨어 있던 백제군이 쏟아져 나와 질풍노도의 기세로 신라군을 덮쳤다. 품석은 자신이 윤충에게 속았음을 알고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아!“

   품석은 성문을 닫으며 사력을 다해 백제군을 막았으나, 이미 성문 안으로 백제군이 밀고 들어와 그 파상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품석이 고타소에게 말했다.

   "부인 먼저 떠나시오. 나는 병사들을 수습하여 떠나겠소."

   고타소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첩은 낭군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옵니다."

   "상황이 위급한데, 어찌 고집을 피우시는 게요?"

   "낭군이라면 첩을 두고 떠나시겠사옵니까?"

   이때 이미 대야성의 대부분이 백제군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백제군이 순식간에 대야성을 장악하자, 전의를 상실한 신라군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 품석은 고타소를 살리기 위해 결국 백제군에 투항하고 말았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