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고타소의 선택

조정우 2013. 2. 10.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고타소의 선택

 

  칠흑처럼 어두운 밤, 월성 동북쪽에 있는 첨성대에서 한눈에 보아도 빼어난 미모의 낭자가 중년 사내의 손을 잡은 채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자는 신기한 듯이 밝게 빛나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다가 외쳤다.

   "아버님, 오늘따라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밝사옵니다. 나라에 큰 경사가 날 조짐이 틀림없사옵니다."

   중년 사내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고타소가 천문가가 다 되었구나!"

   춘추는 친어미 없이도 너무나도 곱게 잘 자라준 고타소를 사랑스럽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열여덟의 어엿한 낭자가 된 고타소는 천하절색이었던 어머니 보라를 쏙 빼닮아 대단히 아름다웠다. 고타소는 야밤에 별 구경하기를 좋아하여 종종 아버지 춘추를 졸라 첨성대에 오곤 하였는데, 때마침 북두칠성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것이다.

   "품석 오라버니께 이 광경을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사옵니다."

   춘추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품석이 그리도 좋으냐?"

   고타소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서로 그리 연모하시어 운명적으로 혼인하셨다 들었사옵니다. 아마도 소녀와 품석 오라버니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생각되옵니다."

   춘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이모이신 새주께서 너와 보로를 맺어주자 하여 이미 승낙하였는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새주가 되어 선덕여왕을 보필하고 있는 보량이 얼마 전 춘추에게 자신의 아들 보로와 고타소의 혼담을 꺼냈다. 이미 고타소의 마음은 품석에게 기울어 있었지만, 이를 몰랐던 춘추는 보량에게 흔쾌히 허락하여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이다. 고타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녀가 보로를 만나 혼인 문제를 매듭짓겠사오니, 아버님께서는 심려치 마소서."

   상대등 수품의 차남인 품석은 화랑도의 풍월주 천광의 이복동생으로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도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대아찬과 호성장군을 역임하고 있었다. 수품은 진흥제와 미실 간의 딸 반야공주의 아들로 품석은 고타소와 육촌지간이었다. 고타소는 소싯적부터 품석의 이복누이 천운과 친자매처럼 지내며 수품의 집에 자주 왕래하다 품석과 정분이 생겼던 것이다. 춘추와 고타소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시위 하나가 말을 몰아 첨성대로 달려왔다.

   "이찬 어르신! 백제의 태후이신 선화공주께서 승하하셨다 하나이다. 하여 폐하께서 이찬 어르신을 부르시오니, 속히 입궁하소서."

   언니 선화의 부음 들은 선덕여왕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지병인 심통이 악화되어 자리에 몸져 누워있었다. 춘추가 처소 안으로 들어와 읍을 올리자, 선덕여왕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위에 오른 지도 어언 십년, 그간 우리 신라와 백제의 화친을 중재해 오셨던 선화공주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양국의 평화가 유지되기 힘들 듯하구나.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소신이 듣건대, 백제는 선왕 때부터 국력을 기울여 군사력을 키워왔다 하오니, 유능한 장수로 하여금 아국의 요충지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내 너에게 모든 것을 일임할 터이니, 중신들과 상의한 후 보고토록 하거라."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춘추가 대전을 나서자, 태후전의 시종이 다가왔다.

   "태후마마께서 춘추공을 부르시나이다."

   춘추가 태후전에 들어와 인사를 올리자, 승만태후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량 새주께 들으니, 춘추공이 우리 보로와 공의 딸 고타소의 혼인을 승낙하였다 하더이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소."

   고타소의 의사도 묻지 않고 보량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고타소는 사촌동생인 보로를 친동생인 법민보다 더 아꼈는지라, 보로를 두고 품석과 혼인하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승만태후가 이미 혼담이 성사된 것처럼 여기자, 춘추는 난감하였지만 애써 감추며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소신의 딸을 어여삐 여기시오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오랜만에 보로를 만난 고타소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보로야, 내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불렀다."

   친어머니 보량에게 고타소와의 혼담이 성사되었다는 말을 들은 보로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제가 궁에서 지내 누님을 자주 뵐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사옵니다. 누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갈 터이니, 불러만 주소서."

   보로는 소싯적부터 사촌누이인 고타소에게 깊은 연모의 정을 품어왔었다. 어려서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읜 고타소와 보로는 동병상련이라 서로를 의지하여 친남매보다 정분이 두터웠는데, 날이 갈수록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고타소에게 보로가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고타소는 이러한 보로가 말할 수 없이 안쓰러워 차마 사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보로야, 실은 내 이미 혼인을 약조한 사람이 있다. 미안하구나."

   보로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소제에게 어찌 일언반구의 말씀도 아니하셨나이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일이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진작 말할 것을...... 내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보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한숨을 짓다가 물었다.

   "누님과 혼인을 약조한 분이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품석공이시다."

   보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보로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품석공이시라면 가히 누님의 배필이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소제, 누님이 행복하기만을 바라겠사옵니다."

   보로는 그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고타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타소 역시 뒤돌아서 떠나는 보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보로야, 참으로 미안하구나. 그간 네가 어려 사내로 보이지 아니하였다. 네가 사내로 보이기 시작할 때는 이미 품석 오라버니께 마음이 기울어 삼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한 후였다. 허니 이제 와서 어찌하겠느냐? 너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부디 용서하거라.'

   며칠 후, 품석이 고타소를 찾아왔다.

   "어제, 소랑의 아버님께서 내 아버님을 찾아왔소."

   품석은 고타소를 소랑이라 불렀다. 고타소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소랑의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와 소랑이 부모님께 여쭙지도 아니하고 혼인을 약조하여 왕실에서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내가 소랑을 잊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하오. 하여 내 아버님 역시 내게 크게 노여워하시며 나를 대야성으로 발령하여 소랑을 잊으라 하셨으니, 내 어찌 아버님의 명을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소?"

   "결단코 아니되옵니다.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겠사옵니까? 아버님께 품석 오라버니께 시집가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사온데, 이리 나오실 줄은 몰랐사옵니다."

   "자식 된 도리로 어찌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소?"

   "저희 아버님께서도 할머님의 명을 어기고 어머님과 혼인하셨사옵니다. 어찌 소녀에게 품석 오라버니와 헤어질 것을 강요하실 수 있겠사옵니까? 소녀가 오늘 부모님과 담판을 짓겠사오니, 오라버니께서는 심려치 마소서."

   품석이 떠나자 고타소는 문희의 처소를 찾아가 말했다.

   "어머님, 소녀, 품석 오라버니를 소녀의 목숨보다 사랑하오니, 부디 소녀를 도와주소서."

문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너와 보로를 맺어줄 생각이셨다. 미리 언질을 주었어야 하는데, 네가 누구보다 보로를 아꼈기에 말하지 아니하였건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소녀도 보로를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옵니다. 하오나 소녀의 마음이 이미 품석 오라버니께 기울어졌사온데,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겠사옵니까?"

   "정녕 잊을 수 없겠느냐?"

   고타소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녀의 명줄이 붙어 있는 한, 결단코 품석 오라버니를 잊을 수 없사옵니다."

   문희가 한숨만 지으며 침묵하자, 고타소가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어머님, 부디 소녀를 도와주소서."

   문희는 16년 전, 그토록 사모했던 춘추와 이루어지지 못해 가슴 태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법민을 갖고 만삭이 되어갈 때까지 춘추를 만나지도 못하고 영원히 잊어야만 하는 운명에 내던져졌을 때가 지금도 생생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였기에 지금의 고타소를 바라보는 문희의 가슴이 아려왔다.

   "알겠다. 고타소야. 내 너의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보겠다."

   고타소는 눈물을 글썽인 채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소녀의 일생 소원을 들어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나이다."

고타소가 와락 문희의 품에 안겼다. 문희는 그런 고타소를 끌어안으며 함께 울어주었다.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감격의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모녀의 모습이 더없이 정겨웠다.

   춘추가 집으로 돌아오자, 문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낭군, 우리 고타소가 품석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춘추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이미 우리 고타소와 보로가 혼인하는 줄로 알고 계신데, 어찌하면 좋겠소?”

   기실 춘추는 태후 핑계를 댔지만, 보로가 보량의 아들이기에 더욱 정이 갔다. 고타소가 보로와 혼인만 한다면 보량과 사돈지간이 되어 더욱 돈독하게 보량을 지켜줄 수 있다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의 생각을 말씀해보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타소의 행복이 아니겠사옵니까? 고타소가 품석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는데, 이별하여 불행해진다면 태후마마의 간택을 받아 왕후가 된다 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허면 태후마마와 보량 새주께는 뭐라 말씀드려야 하겠소?"

   "그 문제는 첩이 알아서 하겠사옵니다."

   춘추는 한동안 한숨만 짓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뜻대로 하시구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