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

선덕여왕 1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0. 12. 12. 06:00

   선덕여왕 1화

 

   연꽃문양의 자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덕만공주가 거처하는 사량궁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량궁을 지키는 호위병사들은 그를 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호위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물었다.

   "춘추공께서 어인 일로 태자마마의 처소에 발걸음하셨나이까?"

   사내는 덕만의 사촌동생이자,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의 외아들 춘추였다.

   "태자마마께 급히 아뢸 일이 있소이다."

   "알겠소."

   호위병사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문지기가 궁문을 열었다. 춘추는 다급하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덕만공주가 야생화를 그리느라 한참 붓놀림에 심취하고 있을 때, 시녀 서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춘추공께서 오셨나이다. 급한 일인 듯 하옵니다."

   "어서 모시거라."

   "춘추공, 안으로 들어오소서."

   서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춘추가 안으로 들어왔다.
   "태자마마, 당에서 변고가 일어났사옵니다. 진왕 이세민이 정변을 일으켜, 태자와 세째 왕자를 참살한 후 자신의 아비인 당의 황제를 별궁에 유폐시켰다 하나이다."

   덕만공주는 깜짝 놀란 듯 한동안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진왕은 야심이 큰 자가 아니더냐?"
   덕만공주는 이미 이세민이 정변을 일으키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붓을 놓았던 덕만공주는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춘추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덕만공주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공주마마......"

    춘추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림 그리기에 열중인 덕만공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덕만공주가 태연하게 그림을 그리며 춘추에게 물었다.

   "그 외에 다른 할말이 있느냐?"

   춘추는 신라가 상국으로 섬기고 있는 당나라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덕만공주의 태도에 할말을 잃었다.

   "없나이다."

   "허면, 잠시 기다리거라. 내, 곧 끝내마."

   한 식경 쯤 흘렀을까. 야생화 그리기를 끝낸 덕만공주가 춘추에게 말했다.

   "네가 아는 사실을 낱낱이 고하거라."

   춘추가 이세민이 일으킨 정변에 대해 아는 대로 모두 말하자, 덕만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필시 언젠가는 이세민과 연개소문이 충돌할 터, 우리 신라가 당과 고구려 양국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얻을 지 모르겠구나."

  기실, 덕만공주는 그림을 그리면서 당나라와는 동맹을, 고구려와는 평화협정을 맺어 백제를 고립시킬 계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성왕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래, 백제와 신라 양국은 70여 년 째 국운을 건 전쟁이 계속 되고 있었다. 덕만공주는 이러한 현실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한 민족인 신라와 백제가 서로 피를 흘리며 전쟁을 하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으면, 백제가 함부로 신라를 공격하지 못할 터, 덕만공주는 당과의 동맹을 통해 백제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달포가 지난 뒤, 제위에 오른 당태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냈고, 이에 화답하기 위해 진평왕이 어전회의를 열어 누구를 사신으로 보낼지 의견을 물었다.

   "짐은 이번 기화에 당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다. 누구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는가?"

   이때 덕만공주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녀를 사신단의 대표로 보내주시옵소서. 소녀가 당에 가서 우리 신라와 당의 동맹을 맺고 오겠나이다."

   진평왕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덕만공주에게 이번 일을 모두 일임할 터이니, 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

   "소녀, 아바마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토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당과 동맹을 맺는 것은 신라의 오랜 숙원이었다. 덕만공주는 일찌기 이세민이 고구려와 전쟁을 하리라 예견하였고, 이러한 이세민의 당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달포 뒤, 덕만공주가 장안에 도착하자 신라 공주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삽시간에 퍼졌다. 당태종은 덕만공주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문을 듣자 호기심이 생겨 신라 출신인 우영을 불렀다.

 "진평왕은 딸이 모두 몇인고?"
 "진평왕의 딸은 모두 셋이온데, 첫째인 천명공주는 왕족 김용춘과 혼인하였으며, 둘째인 선화공주는 백제의 왕후가 되었고, 덕만공주만이 아직 혼인하지 않았사옵니다. 덕만공주는 미색이 셋 중에 으뜸일 뿐만 아니라 몹시 총명한지라,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가장 총애하여 덕만공주의 부군을 후계자로 지명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우영은 가야 출신으로 예전에는 신라의 진평왕을 섬겼지만 당나라에 귀순한 자인데, 진평왕을 섬긴 관계로 신라의 내부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당태종은 덕만공주의 나이가 궁금하여 우영에게 물었다.
 "덕만공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가?"
 "덕만공주는 올해로 스물넷이옵니다."
 "헌데, 어찌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았단 말인가?"
 "소신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아마도 진평왕이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 하옵니다."
 당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만공주와 다른 공주들에 대해서 그대가 아는데로 말해보게."
 "본래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총애했사옵니다. 선화공주는 절세의 미녀로 소문나 백제의 왕자였던 무왕이 흠모하여 신라에 잠입한 후, 선화공주를 밤 몰래 만난다는 소문을 내었사온데, 진평왕은 소문만 믿고 선화공주를 절에 유폐시켰사옵니다. 무왕은 선화공주가 유폐된 절에 잠입하여 백제로 데려간 후에 정비로 삼아 지금의 백제의 왕후가 되었사옵니다."
 당태종은 무왕이 적국의 공주와 혼인했다는 말을 듣자 자신이 대신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수나라 양제의 공주 양비와 혼인했던 일이 기억났다.
 "무왕은 어찌 선화공주를 데려갈 수 있었는가? 신라는 적국의 왕자가 잠입하여 공주를 데려갈 정도로 허술한 나라인가?"
 "무왕의 본명은 서동이온데, 신라인으로 변장하여 어린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선화공주가 서동과 밤에 몰래 만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하옵니다. 소문을 사실로 믿은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절에 유폐시켰고, 서동은 유폐된 선화공주를 설득하여 백제로 데려갔다고 하옵니다."

 당태종은 진평왕의 경솔한 처사에 혀를 찼다.
 "어찌 자신의 딸을 믿지 않고 소문만 믿는단 말이냐? 진평왕도 참으로 딱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