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

소설 징비록 2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5. 3. 15. 08:00

  소설 징비록 조정우 역사소설



소설 징비록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세시 | 2015-03-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옥 같은 7년 전쟁, 그 참회의 기록*임진왜란이 낳은 불멸의...
가격비교

  이 무렵 경상좌수사 박홍은 1만여 병력을 이끌고 부산진성 부근에 와 있었지만, 3만에 이르는 왜의 대군을 보자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정발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병력을 이끌고 퇴각해버렸다. 박홍이 퇴각하는 와중에서도 부산진성 주변의 군기 창고를 불지르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이미 봉화 체계가 무너져 조정은 여태까지도 왜가 대군을 일으켜 나라를 침략한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 사이 왜군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으로 동래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동래성에는 경상좌병사 이각, 조방장 홍윤관, 울산군수 이언성, 양산군수 조영규 등이 당도하여 총 1만여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경상좌도 1차 방어선인 부산진성은 함락되고, 정발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좌도 2차 방어선인 동래성에 집결한 것이다. 맹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의 함락 소식에 노심초사했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이들의 입성을 환대하였다. 송상현이 이각에게 지휘봉을 넘기며 말했다. 

   "함께 목숨을 바쳐 싸웁시다!" 

   이각이 호기롭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이 몸이 있는한, 왜적들이 동래성에 한 발짝도 들일 수 없을 것이외다!"

   이각의 호언장담이 어쩐지 못미더웠지만, 송상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군만 믿겠소이다."

   지휘봉을 거머쥔 이각은 위풍당당한 기세로 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명을 내리겠소! 양산군수는 기병 삼백기를 이끌고 나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왜군의 본대를 기습하시오!"

   이각은 절영도에 상륙한 왜의 함선이 90척이라는 응봉 봉화대의 파발만 믿고 왜군의 규모를 기껏 1만 이하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1만이라 해도 불과 수백기로 기습하라니! 무리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었지만, 양산군수 조영규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병사의 명에 따르리다."

   기병 3백기를 이끌고 성문을 나선 조영규는 곧장 부산진성에서 동래성으로 가는 길목 부근에 있는 황명산으로 올라갔다. 황명산에서 내려다보면 부산진성에서 오는 왜군의 동태를 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올해로 쉰여덟의 백전노장 조영규는 무인의 직감으로 응봉 봉화대의 파발이 못미더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두 눈으로 왜군의 규모를 확인할 참이었다. 호랑이 같은 장수라 정평이 나있던 부산진성 첨사 정발이 하루도 못버티고 전사한 것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경상좌수사 박홍이 싸우지도 않고 병력을 퇴각시킨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럴 수가......"

   황명산에 올라간 조영규의 시야에 구름떼처럼 새까맣게 몰려오는 왜의 대군이 들어온 것이다. 어림잡아 3만은 되어 보였다. 조영규는 급히 군대를 돌려 동래성으로 돌아갔다. 이각은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조영규를 보자 노기를 띤 얼굴로 물었다. 

   "어찌 상관인 내 명을 거역하고 그냥 돌아온 것이오?"

   "왜적은 어림잡아도 삼만은 되어 보이더이다! 어찌 삼백으로 삼만을 공격할 수 있겠소이까?"

   조영규의 말에 깜짝 놀란 이각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뭣이? 삼만이라 하였소?"

   조영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만은 족히 될 듯하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이각은 지휘봉을 송상현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대가 이곳을 지휘해야 되겠소. 이 몸은 소산으로 올라가 기회를 엿보아 적을 협공할 생각이오."

    이각이 도망치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송상현은 지휘봉을 받지 않은 채 간청했다. 

    "좌병사께서 성을 버리고 어디를 간단 말이오? 내, 공의 명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따를 터이니, 부디 공께서 이곳을 지휘해 주시오."

    송상현의 간청에도 이각은 재차 지휘봉을 내밀며 말했다. 

    "아군의 병력이 부족하니 병력을 더 모아 오겠소."

    송상현이 지휘봉을 끝내 받지 않자 이각은 지휘봉을 내팽개친 채 출성 명을 내렸다. 

    "북문으로 출성한다!"

    송상현이 이각의 손을 잡으며 길을 막아섰다. 

    "좌병사, 동래성마저 무너지면 조선팔도가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시오? 왜적들이 삼만이라 해도 우리 또한 일만의 병력이 있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소이까? 함께 죽기로 싸웁시다!"

   "이 손 놓으시오!"

   이각은 송상현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말을 몰아 자리를 떠났다. 송상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7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문으로 향하는 이각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각이 북문에 이르자 북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앞을 가로막으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경상좌도의 수장이신 좌병사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소이까? 못 보내드리오! 좌병사를 못 보내드리오!"
   이각이 검을 빼어 들며 호통쳤다. 

   "감히 수문장 따위가 좌병사인 내게 항명하겠다는 것이냐? 어서 길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수문장은 한발짝도 비켜서지 않고 연이어 소리쳤다. 

   "명이 명 같아야 따를 것이 아니겠소? 정 떠나려면 병력이라도 두고 가시오!"

   "죽고 싶은 게냐?"

   이각이 일갈하더니 수문장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각의 검에 베인 수문장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누구도 이각이 수문장을 베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큰 싸움을 두고 장수를 죽이는 것은 금기된 일이거니와 정 떠나려면 병력은 두고 가라는 말도 일리가 있지 않은가! 송상현이 달려오며 부르짖었다. 

   "좌병사! 어찌 죄없는 수문장을 죽이셨소이까?"

   송상현이 달려오자 이각은 도망치듯 7천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북문을 나섰다. 송상현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수문장을 부여잡은 채 절규했다. 

   "죽으면 아니 되네! 장수가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부디 나를 버리지 말게나!"

   수문장은 송상현을 처다보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사 영감, 꼭...... 이 성을...... 지켜 주소서......"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성을 사수하겠네."

   안도하듯 한숨을 내쉰 수문장은 끝내 숨을 멈추고 말았다. 한차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송상현에게 조영규, 홍윤관, 이언성이 약속이나 한듯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우리도 성에 남아 싸우겠소이다."

    비록 이각은 떠났지만, 조영규, 홍윤관, 이언성이 모두 성에 남는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송상현은 장졸들을 모아놓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좌병사는 떠났다! 허나, 양산군수, 울산군수, 조방장은 우리와 함께 성에 남아 싸울 것이다! 또한 조만간 구원군이 당도할 터이니 그때까지 힘을 내서 싸우자! 모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워 국은에 보답하라!"

   장졸들이 각자 맡은 위치로 일사불란하게 이동하고 있을 때 조영규가 급히 송상현을 찾아왔다. 

   "성문을 열어주시오. 내, 양산에 계신 어머님께 하직인사를 고한 후 꼭 돌아오겠소!"

   송상현은 조영규를 보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 생전에 다시는 볼 수 없을 어머님께 하직인사를 올리고자 하는 그 갸륵한 뜻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그리하시오."

   조영규가 떠나자 송상현은 함흥 출신의 기생으로 자신의 첩이 된 금섬을 불렀다.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여인은 전투에 도움이 안되니 너는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가 있다가 전투가 끝나면 돌아오거라."

   함흥에서 명기(이름난 기생)로 명성이 자자했던 금성은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과 같은 열여덟의 나이였다. 금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좌병사께서 떠나신 후로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사옵니다. 왜군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요."

   "왜군은 기껏해야 일만이 넘지 않는다 하더구나. 그 정도면 이곳 병사들의 힘만으로 충분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송상현은 금섬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진 동래성의 상황을 안다면 자신을 두고 혼자 떠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생토록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금섬은 별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영감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금섬이 시녀 금춘과 함께 성문을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송상현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금섬을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사시(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 무렵, 3만에 이르는 왜의 대군이 개미떼처럼 몰려왔다. 송상현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북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조영규가 당도하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상현은 조영규를 보내준 것이 후회되었지만,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왜군은 남문 바로 앞에 '전즉전의 부전즉가도'(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라고 쓴 커다란 팻말을 세웠다. 팻말을 읽은 송상현은 '전사이 가도난'(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이라 쓴 팻말을 성 밖으로 내던졌다. 팻말을 읽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총공격 명을 내렸다. 

   "총공격!"

   왜군이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네 갈레로 나누어 총공격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성벽을 겹겹이 에워싼 왜군의 진영을 필기단마로 뚫은 조영규가 북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상현이 외쳤다.  

   "양산군수가 왔다! 성문을 열어라!"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새까맣게 추격해오는 왜군에 앞서 북문을 통과한 조영규가 마중나온 송상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장군! 내가 왔소이다!"

   "때마침 돌아와주셔서 천만다행이오!"

   조영규가 성내로 돌아오자 동래성의 군민들이 우레 같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전투에 임했다. 

   "와!"

   기세를 올린 3천여 명의 조선군은 질풍노도와도 같은 왜군의 파상 공세에도 동래성을 철통처럼 지켜냈다. 두꺼운 통나무로 만든 나무 방패를 든 조선군은 사방에서 쏘아대는 왜군의 조총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노약자, 어린이, 부녀자 할 것 없이 2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전장에 나선 동래성은 몇 차례의 왜군의 파상 공세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동래성의 방어에 막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각 명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퇴각하라!"

   병력을 퇴각시킨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도 부산진성처럼 약점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동래성 부근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들을 집결시킨 후 물었다. 

   "동래성에서 가장 허술한 성벽이 어느 쪽이냐? 알려주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조선인 포로들은 약속이나 한듯 침묵할 뿐이었다. 상인 출신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국을 사랑하는 백성도 여자와 재물 앞에서는 속절없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모두 주겠다! 여자, 재물, 정확한 정보만 제공한다면 뭐든지 주겠다!"

   인간의 탐욕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조선인 포로들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말했다. 

   "소인이 알기로는 동쪽이 가장 허술하옵니다."

   탐욕으로 나라를 배반한 조선인 포로의 천금같은 제보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뻐 손뼉을 치며 명을 내렸다. 

   "이번에도 성동격서다! 남문으로 조선군을 유인한 후 동문을 집중 공격한다!" 

   다시 공격에 나선 왜군의 한 갈레가 남문으로 진격해 요란하게 꽹과리를 울리며 조총을 쏘아댔다. 두 말 할 것 없이 성동격서의 전략이었지만, 송상현은 이러한 왜군의 전략을 눈치채지 못하고 병력의 절반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왜적들이 남쪽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남쪽 사수에 총력을 기울여라!" 

   조선군의 절반이 남쪽으로 이동하자 왜군은 동쪽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왜군은 성벽 높이만큼 긴 장대에 깃발을 매달아 마치 왜군이 성벽에 올라 깃발을 꽂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허수아비를 성벽 안으로 던져 왜군이 성벽을 넘어온 것처럼 혼동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왜군의 눈속임에 조선군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서 수백 수천의 왜군이 성벽을 넘어왔다. 

   "동쪽이 뚫렸다!"

   동래성의 병사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뚫린 동쪽 성벽을 넘어와 조총을 쏘아대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동쪽을 맡은 울산 군수 이언성은 승세가 기울었다는 생각에 검을 버리고 항복했다. 

   "항복하겠소!"

   왜군은 이언성을 고니시 유키나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명했다. 

   "살고 싶으면 조선군에 항복을 권하라!"

   이언성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왜군의 꼭두각시가 된 이언성이 자기 휘하의 조선군을 향해 외쳤다. 

   "이미 승세는 기울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이언성의 외침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동쪽을 지키던 500여 명의 조선군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북쪽을 맡은 조영규가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방어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승패가 판가름났다는 생각에 조영규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왜군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조영규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왜군을 베며 돌진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조영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울산군수 이언성이 조선군을 향해 항복하라며 목청껏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울산군수라는 자가 제 목숨 살리자고 나라를 배신하다니! 격노한 조영규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이언성을 향해 돌진했다. 

    "이 매국노야! 내 검을 받아라!"

   목숨을 내던진 채 이언성을 향해 돌진하는 조영규를 향해 사방에서 왜군이 조총을 쏘아댔다.

   "탕! 탕! 탕!"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맞고 쓰러진 조영규는 조국을 배신한 이언성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명했다. 이언성은 조영규의 시신을 부여잡은 채 통곡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영규처럼 목숨을 내던져 싸우다 죽을 것을. 조국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영원히 벗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언성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동쪽을 맡은 이언성의 항복에 이어 북쪽을 맡은 조영규가 전사하자 동래성의 동문과 북문이 모두 열리고 말았다. 

   "아! 왜놈들의 성동격서에 당했구나!"

   이미 승패가 판가름났다는 생각에 송상현은 관청에 가서 조복으로 갈아입은 후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했다. 

   "신, 송상현, 하직하옵니다. 부디, 이 국난을 이겨내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어 송상현은 호상에 좌정한 채 부채에 혈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외로운 성은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는데

   큰 진의 구원군은 기척도 없네 

   군신의 의는 무거우나

   부자의 은정은 가볍도다


   송상현은 시종 하나를 불러 명했다.

    "이 부채를 아버님께 전해드리거라."

   송상현은 죽기 전에 아버지 송복흥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부채에 시로 남겨 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동래성을 점령한 왜군이 우르르 몰려오자 송상현은 의자에 앉은 채 우레 같은 목소리로 외쳐댔다.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의리를 저버리고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느냐?"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모른다면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웃 나라를 침범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겠느냐? 이제라도 너희 나라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즉시 군대를 돌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더이상의 전투는 의미없다는 생각에 송상현은 조선을 침략한 왜군을 논리로 꾸짖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치 어사가 죄인을 꾸짖듯 더없이 위풍당당하게 외치는 송상현을, 왜군은 사방에서 에워싼 채 바라볼 뿐이었다. 송상현이 왜군을 향해 호통치는 가운데 왜장 다이라 스키마스가 송상현에게 다가와 옷깃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송부사, 여기서 무모하게 죽을 필요가 있겠소? 이 성에서 나가시오. 내 그대를 그냥 보내드리겠소."

     송상현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호통쳤다.

    "우리 나라를 침략한 너희들이 감히 선심을 쓰려는 게냐? 나는 이 성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작년에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이곳 동래성에서 송상현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다이라 스키마스는 송상현을 살려주려 했지만, 송상현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로 물러섰다. 다이라 스키마스가 물러가자 왜병들이 송상현을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송상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계속 왜병들을 꾸짖었다. 

   "너희 나라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지금이라도 군대를 물리거라. 그러면 아국을 침략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

   송상현의 계속되는 꾸짖음에 열이 뻗힌 왜군 하나가 일갈하며 송상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구나!"

   "윽!"

   왜군의 검에 베인 송상현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송상현의 피를 본 왜병들은 공을 놓칠까봐 그랬는지, 약속이나 한듯 이쪽저쪽에서 송상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송상현의 몸이 난도질당하는 순간, 어디선가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안돼!"

    왠 여인 하나가 혈혈단신으로 수천 수만의 왜군 사이를 헤치고, 온 몸이 난도질당한 송상현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다름 아닌 송상현의 첩 금섬이었다. 금섬은 피를 철철 흘린 채로 의자에 앉아있는 송상현을 부여잡은 채 통곡했다. 

    "영감, 어찌......"

    금섬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 금섬을 보자 송상현이 겨우 입을 움직여 말했다. 

    "내, 전투가 끝나면 돌아오라 했거늘, 어찌 벌써 돌아왔느냐......"

    금섬이 원망하듯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어찌 소녀를 속이셨사옵니까? 이토록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어찌 소녀만 홀로 떠나 보낼 생각을 하셨사옵니까? 소녀, 피난을 가다가 수만의 왜군이 동래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한발 늦은 듯하옵니다......"

    온 몸을 검에 베이고 찔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송상현은 자신을 부여잡은 금섬의 손길을 느끼자 한결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송상현은 금섬이 왜군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할 수 없이 애석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아니다...... 잘 와주었다...... 이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만, 너를 왜군의 손아귀에서 지켜주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구나......"

    금섬이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영감을 뵈었사오니, 소녀는 이제 어찌 되어도 상관없사옵니다......"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송상현은 간신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세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관청에 집결한 수천 수만의 왜군이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송상현이 숨을 거두자 왜군의 시선은 금섬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송상현의 피로 붉게 물든 백의의 금섬은 관청에 집결한 왜군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금섬은 자신에게 왜군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송상현의 시신을 부여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금섬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슴에 성호를 긋더니 송상현의 명복을 빌며 중얼거렸다.

   "송부사, 그대는 천하에 둘도 없는 충의지사요!"

   크게 탄식을 내뱉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금섬을 가리키며 명을 내렸다. 

   "저 여인을 사로잡아라."

   왜군이 자신의 두 손을 포박하려 하자 금섬은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외쳤다. 

   "놔라!"

   이미 생사를 초월한 금섬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금섬은 송상현이 그랬던 것처럼 왜군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웃 나라의 도리를 져버린 너희 나라는 필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평화롭던 우리 나라를 침략해 죄없는 백성들을 살육한 너희들이 온전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 나라를 저주할 것이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였던가. 계속되는 금섬의 악담에 왜군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 차례 손을 휘두르자 왜군이 금섬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금섬이 끌려 나가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송부사를 누가 죽였느냐? 누가 감히 대장의 명을 어겼단 말이냐?"

   송상현을 사로잡으라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3만의 대군 앞에서도 한치의 흔들림없는 송상현의 기개에 감복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을 죽인 왜병을 죽여 송상현의 넋을 위로할 생각이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왜병 하나가 고니시 유키나가 앞으로 나왔다. 

   "소인이 동래부사를 죽였사옵......"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왜병의 목을 베어버린 후 송상현의 시신을 가리키며 명을 내렸다. 

    "송부사의 시신을 거두어 동문 앞에 정중히 장사지내 주거라!"


  출판사와의 출간 계약으로 미리보기에 해당되는 앞부분만 연재할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신재하 문예창작교실 (문창과, 작가지망 수강생 모집, 분당 미금역선릉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