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

소설 징비록 3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5. 3. 29. 08:00

   소설 징비록 3화 조정우 역사소설 



소설 징비록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세시 | 2015-03-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옥 같은 7년 전쟁, 그 참회의 기록*임진왜란이 낳은 불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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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의 건청동, 작은 정자가 딸린 아담한 기와집 사랑채에서 유난히도 눈빛이 영롱한 사내가 여러 문서들을 뒤적여가며 읽고 있었다. 쉰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는 좌의정 류성룡이었다. 류성룡은 탁자에 쌓인 문서들을 차례로 흝어보더니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조정에 인물이 이토록 없단 말인가!"

   조정의 신료들이 추천한 장수 중 쓸만한 자가 눈을 씻고 봐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조선팔도 전체에서 찾는다면 쓸만한 인물이 설마 없기야 하겠냐만, 조정에 출사한 인물 중에서는 가뭄에 콩나듯 드물었던 것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양분된 조정은 나라를 지키는 장수의 자리에 자기 당파 사람을 임명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해전의 경험이 전무한 원균이 작년에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다가 교체되었던 것에 이어 올해에 경상우수사에 임명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전란이 코앞에 닥쳐 올지도 모르는데 조정은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이 무렵 조선에 있던 왜인들이 일제히 본국으로 철수해 조선팔도가 전란 소문에 휩싸여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정은 당파의 이해득실만 따지고 있었으니 장차 나라의 안위는 어찌될 것인가! 

   "나라가 어찌 되려고 조정의 대신이라는 자들이 이다지도 정신을 못 차린단 말인가!"

   크게 탄식을 내뱉은 류성룡이 머리를 싸매고 나라 걱정에 잠겨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굴까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대감 안에 계시느냐?"

   도승지 이항복의 목소리였다. 이항복은 서인임에도 동인인 류성룡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왠일로 이렇게 다급히 뛰어오는가 의아하여 류성룡이 급히 방문을 여는 순간, 허겁지겁 방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이항복과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깜짝 놀라 몇 걸음 물러선 류성룡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항복의 입에서 실로 놀라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전란이 일어난 듯하오! 부산진성이 왜적들에게 함락되었다고 박홍 경상좌수사가 장계를 보냈소이다!"

   이항복이 박홍의 장계를 내밀자, 류성룡이 급히 받아 펼쳤다. 

  '부산진성에서 연기가 나고 총포가 하늘을 진동하니 아마도 왜적의 손에 함락된 듯하옵니다. 무수한 붉은 깃발이 성위에 나부끼니 이는 모두 왜적의 군기인줄로 아옵니다.'

   류성룡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이럴 수가! 허면 정첨사가......"

   "정첨사는 필시 전사했을 것이오!"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면 전장에서 물러설 줄 모르는 정발 또한 성과 운명을 함께 했으리라. 류성룡이 푸념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전란이 이리도 빨리 찾아올 줄이야......"

   류성룡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난해 국서를 보내 군대를 일으켜 명나라를 정벌할 것을 천명한 만큼 언젠가는 전란이 일어나리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빨리 일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것이 불과 2년 전이 아니던가! 섬나라인 일본이 전란을 일으키려면 최소한 삼사년은 걸릴 터, 아무리 빨라야 전란은 내후년이나 일어날 것이라 섣불리 예측한 것이 화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기 3년 전인 정해년(1587년)부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해왔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은 류성룡은 멍하니 선 채로 생각에 잠겼지만, 마치 바보가 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항복이 류성룡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속히 방책을 세워야 하오! 대전으로 갑시다!"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듯 류성룡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

   류성룡과 이항복이 대전에 당도했을 때는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이양원, 이조판서 이원익, 병조판서 김응남 등의 조정 대신들이 모여 난상 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대전 회의를 주관해야 할 선조는 자리에 없었다. 동인 쪽에선 전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왜구가 난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했고, 서인 쪽에선 전란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이원익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이산해에게 말했다.

   "전란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소. 고작 왜구 따위에 하루도 못버티고 성을 빼앗길 정첨사가 아니질 않소이까?"

   올해로 마흔여섯인 이원익은 남인이었음에도 전란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는 서인의 의견에 동조했다. 남인의 영수인 이산해는 이러한 이원익이 몹시 못마땅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만 가로저으며 말했다. 

   "왜구의 소행이 틀림없다니까요. 전란 준비가 한두 해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질 않소이까?"

   이산해 역시 전란이 일어난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총포가 하늘을 진동하고 무수한 붉은 깃발이 성위에 나부꼈다는 박홍의 장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전란이 일어날 리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그가 이제와서 전란이 일어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각이 급한데 무의미한 난상 토론만 계속 되자 류성룡이 답답해 이산해에게 물었다. 

    "주상께서는 아직 기침을 하지 않으셨소이까?" 

    이산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선조는 아직 기침도 하지 않았다. 전날 인빈 김씨의 처소에서 밤을 지센 탓이었다. 류성룡이 나무라듯 말했다. 

   "어찌 주상을 여지껏 모시고 오지 않으셨소이까?"

   이산해가 난처한듯 말끝을 흐렸다. 

   "이미 주상께 사람을 보내었으니 곧 오실게요......" 

   나라에 전란이 일어났는데 선조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벌써 여러 명의 내시가 대전과 임금의 거처에 들락날락하며 소식을 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선조가 나타나지 않자 류성룡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산해에게 물었다.

   "주상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이산해가 귓속말로 대답했다. 

   "인빈마마의 처소에 계시다 들었소만......"

   임금이 거처한 처소가 어디인지는 기밀 사항이었지만, 때가 때인만큼 상선이 어쩔 수 없이 조정의 수장인 이산해에게만 선조가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이었다.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한 얼굴로 박홍의 장계를 집어든 류성룡이 이산해에게 말했다. 

   "지금 이렇게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니오."

   "어찌 하려 그러시오?"

   "지금 당장 주상을 알현해야겠소!"

   대전을 나선 류성룡이 다짜고짜 인빈 김씨의 처소로 향하자, 이산해가 당황하며 따라가 류성룡의 옷깃을 잡으며 만류했다. 

   "좌상, 진정하시오. 이미 연통을 넣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주상께서 오시지 않겠소? 대신이 후궁마마의 거처에 가는 것은 금기사항이거늘, 자칫 그대의 목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다소 과장된 말이었지만 선조의 노여움을 사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류성룡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목이 떨어져도 주상을 알현해야겠소!"

   류성룡이 이산해의 손을 뿌리치고 인빈 김씨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좌상!"

    이항복이 류성룡을 향해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류성룡이 박홍의 장계를 집어들고 대전을 나서자 선조를 알현하러 가는 것임을 알고 따라 나선 것이다. 이항복이 류성룡의 손에 들린 박홍의 장계를 빼앗으며 말했다. 

   "좌상, 장계를 주상께 올리는 것은 도승지의 임무가 아니오이까? 설마 그걸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이항복이 마음이 조급한 류성룡을 진정시키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다. 이항복의 뜻을 알아챈 류성룡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어찌 그걸 모르겠소이까? 허면 도승지가 앞장서시지요."

    "그러려던 참이었소."

   류성룡이 이항복과 함께 인빈 김씨의 처소로 발걸음을 향하자 이산해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도 가겠소이다!"

   류성룡, 이항복, 이산해가 인빈 김씨의 처소에 이르자, 상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대감들께서 어찌 인빈마마의 처소에 오셨소이까? 그만 돌아가소서. 주상께서 그 책임을 물으시면 소인의 목이 떨어질 것이옵니다."

   상선은 애원하듯 이산해를 바라보며 류성룡과 이항복을 만류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산해는 류성룡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류성룡이 상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터이니, 자네는 주상께 우리가 왔음을 기별하게나."

   상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더니 인빈 김씨의 처소에 기척을 넣었다. 

   "주상, 영의정 대감, 좌의정 대감, 도승지 대감이 알현을 청하였나이다."

   여태까지도 인빈 김씨와 함께 이부자리에 누워 있던 선조는 이산해, 류성룡, 이항복이 왔다는 보고에 날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조정 대신들이 과인의 후궁 처소에 어인 일로 왔단 말이냐?"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상선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태평하게 누워 있던 선조가 역정을 낸 것이다. 류성룡이 무릎을 꿇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주상, 부산진성이 왜적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사옵니까? 전란이 일어난 듯하오니 속히 대전으로 납시옵소서!"

   전란이라는 말에 선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전란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기껏 성 하나가 함락되었다고 전란이라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을 잘하기로 유명한 류성룡이었지만, 이때만큼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경상좌도의 1차 방어선인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데도 태평한 소리를 하니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오히려 인빈 김씨가 눈짓, 손짓을 해가며 대전으로 갈 것을 재촉하자 선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꾸짖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령 전란이 일어났다 한들 대신들이 어찌 후궁의 처소로 몰려 올 수 있단 말이냐? 알았으니 모두 물러가라!"

   류성룡은 이항복에게 장계를 바치라 눈짓하며 아뢰었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를 대령하였사오니, 읽어 보시옵소서."

   류성룡은 선조가 박홍의 장계를 읽어봐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류성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조의 명이 떨어졌다. 

   "장계를 들이라!"

   상선으로부터 이항복이 바친 장계를 건네받은 선조는 급히 펼쳐 읽고 나더니 그제서야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정녕 전란이 일어났단 말인가?"

   박홍의 장계를 읽기 전까지 선조는 기껏 수천 명 규모의 왜구가 쳐들어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전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김성일의 말만 철썩처럼 믿었던 선조는 전란이 일어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대 대학자인 이황의 수제자 김성일이 거짓 보고를 한 사실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으랴! 선조는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명을 내렸다. 

   "속히 대전으로 갈 채비를 하거라!"


  출판사와의 출간 계약으로 미리보기에 해당되는 앞부분만 연재할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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