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승만왕후

조정우 2012. 12. 9. 08: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승만왕후

 

 

    얼마 후, 6두품인 경주 손씨 가문의 후궁 승만이 곤위에 올라 마야왕후의 뒤를 이었다. 신라왕실에서 왕실의 가문인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이 아닌 여인이 곤위에 오른 것은 신라 왕조 창건 이래 처음으로, 진평왕의 유일한 왕자 승덕을 낳은 승만이 곤위에 올라 승덕이 대통을 이어야 민심이 안정될 수 있다고 중신들을 설득한 칠숙의 공이 컸다. 승만은 올해 스물두 살로 나이는 덕만공주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야심은 큰 여인이었다.

   곤위에 오른 승만왕후는 진평왕에게 주청하여 진평왕의 동생 백반을 상대등으로, 백반의 아들 칠숙을 이찬으로 임명토록 한 후, 춘추의 부친 각간 용춘과 유신의 부친 소판 서현은 지방의 성주로 좌천시켰다.

    이는 조정에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의형제와 다름없는 유신과 춘추, 그리고 그들이 한결같이 믿고 따르는 태자 덕만공주 모두에게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왕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칠숙과 그를 따르는 중신들이 언제든지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장 덕만공주가 태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여자로서 몸이 약한데다, 승만왕후가 낳은 왕자 승덕이 자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 아닐 수 없었다. (중략)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었다. 승만왕후가 내전에서 자신의 가문 여인들을 불러 겨우 세 살인 승덕왕자를 태자의 위에 올리는 일을 모의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후마마, 보량궁주께서 오셨나이다."

   승만왕후는 여인들을 물리친 후 보량을 맞아들였다.

   "소첩 보량, 왕후마마를 알현하나이다."

   "보량궁주께서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신 것이오?"

   보량이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왕후마마께 청할 것이 있어 찾아왔나이다."

   "말씀해보시오."

   "소첩의 아버님께서 소첩에게 특별히 부탁하신 일이옵니다. 이번 인사 때 칠중성으로 발령이 나신 용춘공께서는 몇 해 전 작고하신 소첩의 언니의 시아버님 되시는 분으로, 소첩의 아버님과는 친형제처럼 정분이 두터우시니, 부디 왕후마마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서라벌로 귀환하실 수 있도록 발령을 내려주시기를 청하나이다. 또한 압독주로 발령이 나신 서현공께서는 아버님과 의형제를 맺으신 유신공의 부친이시니, 부디 두 분 모두 서라벌로 귀환하시도록 발령을 내려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승만왕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보량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일은 화랑도를 관장하고 있는 춘추공과 흠순공에게 달린 일이오."

   보량은 승만왕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왕후마마께서 춘추 오라버니와 흠순공에게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순간 보량은 승만왕후가 화랑도를 장악하려는 의중을 깨달았다.

   '왕후마마께서 화랑도를 장악하시고자 풍월주이신 춘추 오라버니와 부제인 흠순공이 화랑도를 떠나기 바라시는구나!'

   보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오면...... 왕후마마께서는 춘추공과 흠순공이 화랑도의 직위에서 물러나기를 바라시나이까?"

   승만왕후는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바로 그렇소. 화랑도를 관장하는 자들이 왕후인 나보다 태자를 더욱 따르니, 이 나라의 법도를 어찌 바로 세울 수 있겠소? 곧 춘추공과 흠순공이 나의 뜻을 알게 될 터인데, 어찌 나올지 모르겠소."

   보량은 승만왕후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전을 물러났다.

 

   보량이 승만왕후를 찾아간 것은 지방으로 좌천된 용춘과 서현이 조정의 요직에 복귀되도록 승만왕후에게 청하라는 아버지 보종의 분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춘추를 문희에게 빼앗긴 후 유신과 문희를 미워했던 보량은 보종으로부터 그러한 부탁을 받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었다.

   "소녀, 아버님께서 서현공과 깊은 인연을 맺으신 줄 미처 몰랐나이다."

   보량의 마음을 눈치챈 보종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정녕 이 아비와 유신공과의 깊은 정분을 모른단 말이냐? 유신공은 이 아비에게 친형이나 다름없는 분이시다. 명심하거라."

   유신의 나이가 비록 보종보다 열다섯 살이 어렸지만, 풍월주는 전임 풍월주를 형으로 받드는 관례가 있어 16대 풍월주 보종은 15대 풍월주 유신을 형으로 받들었다. 보량은 보종이 엄한 얼굴로 말하자,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 유신과 문희에게 복수하고 싶었건만 아버님의 뜻이 이러하시니, 유신과 문희에 대한 원한은 갚을 수 없겠구나.' (중략)

 

   춘추는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마당의 정자에서 작고한 아내 보라의 유일한 혈육인 고타소를 안은 채 상념에 잠겼다.

   '보라, 어제 그대의 동생 보량을 보았소. 보량을 보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그대가 사무칠 정도로 보고 싶구려!'

    춘추는 보라가 보고 싶어지면 보라의 혈육 고타소를 보며 위안을 삼곤 했는데, 지금도 보라가 몹시 보고 싶어져 고타소를 안고 있었다. 고타소는 어미인 보라를 닮아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었다. 천진난만한 고타소는 조금도 구김살 없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비인 춘추를 바라보다가 살포시 안기는 것이었다. 춘추는 고타소를 볼 때마다 태어날 때 친어미를 여의고, 그나마 혈육인 이모 보량이 어미가 될 수 있는 운명도 비껴가고 만 첫째 딸이 그렇게 가여울 수가 없었다. 춘추가 넋이 빠진 듯 처량한 얼굴로 고타소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희가 두 살배기 아들 법민을 안고 정자로 오다가 춘추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낭군께서 아직도 보라궁주를 잊지 못하고 계시는구나!'

   춘추가 내색은 안 했지만 문희는 여자만의 느낌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법민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춘추가 문희를 바라보자, 문희는 당황하여 법민을 얼렀지만 법민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법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유모가 달려와 법민을 안으려 하자, 문희가 미소를 지으며 춘추에게 말했다.

   "법민이 낭군께 안기고 싶어 우는 듯하오니, 고타소는 첩에게 주시고 법민을 안아주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게 좋겠소."

   춘추는 고타소를 유모에게 건네준 후 문희의 품에 안겨있는 법민을 건네받아 안았다. 과연 문희의 말대로 춘추가 품에 안자 법민은 울음을 멈췄다. 문희는 유모에게서 고타소를 건네받은 후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법민이 낭군의 품이 그리웠나 봅니다."

    "그런 것 같구려."

    이때 시종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정자로 다가와 춘추에게 말했다.

    "염종공께서 왕림하셨나이다."

    순간 춘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17대 풍월주 염장의 동생으로 춘추의 종숙부인 염종은 최근 칠숙에게 회유를 당해 승만왕후의 편으로 돌아서 소판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러한 염종이 춘추에게 달가운 손님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춘추는 시종을 시켜 염종을 자신의 처소에서 맞았다.

   "숙부님께서 어인 발걸음이시옵니까?"

   염종은 잠시 후 운을 뗏다.

   ", 너에게 왕후마마의 뜻을 전하러 왔느니라."

   "말씀하소서."

   "왕후마마께서 너를 대아찬에 임명하고자 하시는데, 왕후마마의 뜻을 따르겠느냐?"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왕후마마께서 나를 대아찬에 임명하시려는 것은 나의 풍월주 지위를 빼앗아 화랑도를 장악하시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왕후마마의 뜻이 그러하시다 해도 내겐 태후마마가 있지 아니한가!'

   춘추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후마마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오나, 소질, 화랑도에 대한 태후마마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사오니, 숙부님께서 왕후마마께 잘 말씀드려주소서."

   춘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종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다그쳤다.

   "왕후마마의 뜻을 거역하겠단 말이냐?"

   "소질이 어찌 왕후마마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소질이 화랑도의 풍월주에 오른 것은 태후마마의 뜻이라, 소질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염종은 말문이 막혀 묵묵히 있다가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다. 허나 잘 생각해 보거라. 왕후마마의 뜻을 거슬러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란 말이다. 내 이만 가보마."

   염종이 떠나자, 춘추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허허, 종숙부님께서 어찌 저리도 변하신 것일까?"

   이때 문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문희는 춘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낭군의 안색을 보니 염종공께서 낭군께 좋지 못한 소식을 가져온 듯하옵니다."

   "그렇소. 종숙부님께서 내게 왕후마마의 뜻이라며 풍월주를 내려놓고 대아찬에 오르라 하셨소. 이는 왕후마마께서 화랑도를 장악하려 하심이 아니겠소?"

   문희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첩은 염종공께서 낭군을 무척 아끼셨다 들었사온데, 격세지감이라더니 그새 왕후마마의 편에 서서 낭군을 난처하게 만드시다니, 어찌 이러실 수가......"

   춘추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손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법민을 총애하시니, 법민으로 하여금 태후마마께서 나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게 한다면, 왕후마마께서 더는 나서지 못하실 것이오!"

   문희 역시 반색하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태후마마께서 낭군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신다면, 누구도 낭군의 일을 간섭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시종으로부터 염종의 서찰을 전해 받은 승만왕후는 크게 노하였다.

   "춘추가 감히 태후마마를 내세워 이 나라의 국모인 내 뜻을 거역하다니! 참으로 발칙한지고!"

   승만왕후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춘추를 화랑도에서 몰아낼 방도를 궁리하고 있을 때, 시종이 안으로 들어와 칠숙의 서찰을 전해주었다.

   '흙비로 인해 민심이 태자를 이반하고 있사오니, 폐하께 이를 아뢰어 태자의 대리청정을 중지시키고 폐하께서 친정에 나서시기를 권하소서. 하오면 태자의 지위가 흔들릴 것이옵니다.'

   칠숙의 서찰을 읽은 승만왕후는 곧장 진평왕의 처소를 찾았다.

   "폐하, 신첩이 듣건대, 지난번 내린 흙비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하오니, 태자의 대리청정을 중지시키고, 폐하께서 친히 친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진평왕은 한동안 숙고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라를 통치하다 보면 숱한 어려움이 있는 법이거늘, 어찌 이제 와서 대리청정을 중지시킨단 말이오? 태자에게 좀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오."

   승만왕후는 진평왕의 말이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신첩은 폐하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하오나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사오니, 앞으로 더욱 민심이 고단해지고 왕실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된다면 대리청정을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라옵나이다."

   “알겠소. 짐도 태자를 지켜보고 있소. 이 난국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왕후께서도 태자를 잘 도와주시구려.”

   "신첩, 폐하의 뜻을 받들어 태자를 돕겠나이다."

 

   승만왕후가 승덕왕자를 안고 태후전에 도착하자, 시녀가 승만왕후의 왕림을 알렸다. 잠시 후, 만호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안으로 모시거라."

   승만왕후가 안으로 들어가니, 아기를 안은 만호태후의 곁에 문희가 있었다. 승만왕후는 순간 멍한 얼굴로 문희를 바라보다가 만호태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태후마마께 문호인사 올리나이다."

   "왕후께서 우리 승덕이를 데려왔구려. 참으로 잘 오셨소. 마침 문희가 법민이를 데려왔다오. 두 왕자가 이렇게 함께 재롱떠는 것을 보게 되다니, 내가 오늘 호사를 누리는구려. 벌써 이만큼 큰 법민이 좀 보시구려. 어찌나 재롱이 귀여운지......"

   유난히 왕자들을 좋아하는 태후는 귀여운 두 왕손을 보게 되자 마냥 즐거워하였다.

   문희는 승덕왕자를 안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승만왕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후마마께 인사 올리나이다."

   승덕왕자를 만호태후에게 보여주러 태후전에 방문하는 참에 춘추의 관직 진출을 건의하려 했던 승만왕후는 문희에게 당한 느낌이 들었다.

   '문희가 나보다 한발 앞섰구나!'

   문희는 법민을 안고 태후전을 방문하여 화랑도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앞으로도 계속 춘추와 함께 화랑도를 관장하게 해달라고 청한 후 만호태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법민의 재롱에 기분이 좋아진 만호태후는 미소를 머금으며 승만왕후에게 말했다.

   "문희가 화주 노릇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오. 내게 법민이 자라 화랑도에 입문할 때까지 화주 노릇을 하도록 윤허해 달라 하는구려. 왕후의 뜻만 괜찮다면, 내 윤허할 생각이오. 왕후의 뜻은 어떠하오?"

   승만왕후는 마음 같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만호태후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첩은 태후마마의 뜻을 따를 뿐이옵니다."

   만호태후에게 고개를 숙여 찬성 의사를 표시한 승만왕후는 곧이어 문희에게 말했다.

   "문희 화주, 법민이 자라 화랑도에 입문하려면 십년은 넘게 있어야 할 터이니, 그대의 낭군 춘추공이 관직에 오르면 함께 화랑도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듯하오."

   문희는 승만왕후가 한발 물러서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낭군께서 아직 관직에 진출하실 마음이 없사오나 관직에 진출한다면 소첩도 왕후마마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승만왕후는 문희에게 당한 것 같아 분한 생각이 들었지만, 두 아기를 보며 마냥 즐거워하는 만호태후의 흥을 깰까 만호태후의 품에 안겨 있는 법민을 일부러 달라고 해서 안았다. 법민은 승만왕후가 낯설었는지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승만왕후는 만호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문희에게 법민을 건네주었다.

   "그대의 아들이 내 품이 낯선가 보구려. 받으시게나."

   "황공하옵니다."

   승만왕후에게서 법민을 건네받은 문희는 법민을 어르며 생각했다.

   '법민아, 네가 이 어미를 두 번이나 구해주었구나! 네가 나의 복덩이로다! 내가 너를 임신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가문에서도 버림받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을 터인데, 너로 인하여 네 아비와 혼인하여 화주가 되었고, 이제 네 덕분에 네 아비와 내가 화랑도를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으니, 하늘이 너로 인하여 나에게 복을 내리시는구나!'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