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덕만공주의 부탁

조정우 2012. 11. 18.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덕만공주의 부탁

 

 

   서라벌 전역에 이레째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덕만공주가 식음을 전폐하고 나흘째 신궁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며 흙비가 멈추기를 기도하였건만 흙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농작물을 해치는 흙비로 인해 백성들이 고초를 겪을 것을 생각하니 덕만공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시종장에게 명했다.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하늘이 나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듯하니, 제단을 밖으로 옮겨 기도할 것이다. 지금 즉시 명을 내려 제단을 밖으로 옮기도록 하거라."

   덕만공주의 옆에 있던 춘추가 만류하였다.

   "태자마마,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어찌 옥체를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덕만공주는 춘추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궁에서 나와 억수로 쏟아지는 흙비 속에서 절규하며 기도했다.

   "하늘이시여, 어찌 우리 신라에 이토록 큰 재앙을 내리시나이까? 이 나라를 대리 청정하는 소녀의 덕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면 소녀의 목숨을 거두시고 이 재앙을 멈추어 주소서!"

   덕만공주가 쏟아져 내리는 흙비를 맞으며 기도한 지 몇 시진 만에 흙비가 잦아들더니 얼마 후 멈췄다. 덕만공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하늘에 감사하였다.

   "하늘이시여,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오니 감읍하기 이를 데 없나이다!"

   기력이 쇠한 덕만공주는 제단을 내려오다가 실신하여 쓰러졌다. 춘추가 크게 당황하며 시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어서 태자마마를 처소로 모시거라! 속히 내의녀를 부르거라!"

   지난 열흘 간 덕만공주는 얼마 전 작고한 마야왕후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불국사에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불공을 드렸었다. 게다가 연일 쏟아지는 흙비로 인하여 나흘 전부터 연이어 혼신을 다한 천제를 올리느라 완전히 기력이 소진되어 버린 것이었다.

   실신한 지 반나절 만에 의식을 회복한 덕만공주는 춘추를 처소로 불러들였다. 이미 밤이 깊어 자시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덕만공주는 자리에 누운 채 지긋한 눈빛으로 춘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춘추야, 내 너에게 당부할 것이 있어 불렀느니라."

   "소질, 목숨을 바쳐서라도 태자마마의 뜻을 따를 것이오니, 하명만 내리소서."

   덕만공주는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나에게 지병이 있다. 재작년부터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생겨 내의녀에게 진맥을 받아보니, 나에게 심통이 있다 하더구나. 병이 이미 깊어 쉬이 나을 수 없다고 하니, 내가 장수하기는 힘들 듯싶구나. 아바마마보다 먼저 이승을 떠나지 아니하기를 하늘에 기도할 뿐이다. 내 처지가 이러하니, 내 너만을 의지하게 되는구나. 너는 반드시 건강하고 오래 살아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야 할 것이다."

   "태자마마, 소질이 반드시 명의를 찾아 태자마마의 병환을 치료토록 하겠나이다. 심려를 거두소서."

   덕만공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지병은 약으로 낫는 병이 아니다. 그저 마음이 평안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 하니, 네가 나의 마음을 평안케 해다오."

   춘추는 덕만공주의 심중에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질, 태자마마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두렵지 아니하오니 방도를 가르쳐 주소서."

   "인명은 재천이거늘, 이승을 떠나는 것이 무엇이 두렵겠느냐만, 내 어찌 이 나라의 대통을 이으라는 아바마마의 뜻을 저버리고 떠날 수 있겠느냐? 나는 지병으로 인하여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몸이다. 행여나 내가 명이 다하여 이승을 떠나게 되면 네가 대통을 이어야 하니, 부디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다오. 춘추야, 이 이모에게 약조할 수 있겠느냐?"

   춘추는 덕만공주에게 큰절을 올렸다.

   "소질, 신명을 바쳐 태자마마의 크신 뜻을 따르겠나이다."

   덕만공주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나의 뜻을 따르겠다니, 이제 마음이 놓이는구나."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덕만공주는 뭔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조서를 써 춘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헌데 춘추야, 내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태자마마께서 소질에게 부탁이라니 당치 아니하나이다. 무엇이든 하명하소서.“

   "지금 백성들이 흙비로 인하여 큰 고초를 겪고 있을 터이니, 잠행을 하며 백성들의 고초를 살펴본 후 대책을 강구하여 오거라. 할 수 있겠느냐?"

   "태자마마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얼마 후, 6두품인 경주 손씨 가문의 후궁 승만이 곤위에 올라 마야왕후의 뒤를 이었다. 신라왕실에서 왕실의 가문인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이 아닌 여인이 곤위에 오른 것은 신라 왕조 창건 이래 처음으로, 진평왕의 유일한 왕자 승덕을 낳은 승만이 곤위에 올라 승덕이 대통을 이어야 민심이 안정될 수 있다고 중신들을 설득한 칠숙의 공이 컸다. 승만은 올해 스물두 살로 나이는 덕만공주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야심은 큰 여인이었다.

   곤위에 오른 승만왕후는 진평왕에게 주청하여 진평왕의 동생 백반을 상대등으로, 백반의 아들 칠숙을 이찬으로 임명토록 한 후, 춘추의 부친 각간 용춘과 유신의 부친 소판 서현은 지방의 성주로 좌천시켰다.

   이는 조정에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의형제와 다름없는 유신과 춘추, 그리고 그들이 한결같이 믿고 따르는 태자 덕만공주 모두에게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왕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칠숙과 그를 따르는 중신들이 언제든지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장 덕만공주가 태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여자로서 몸이 약한데다, 승만왕후가 낳은 왕자 승덕이 자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