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문희와 보량

조정우 2012. 11. 25. 10: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문희와 보량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었다. 승만왕후가 내전에서 자신의 가문 여인들을 불러 겨우 세 살인 승덕왕자를 태자의 위에 올리는 일을 모의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후마마, 보량궁주께서 오셨나이다."

   승만왕후는 여인들을 물리친 후 보량을 맞아들였다.

   "소첩 보량, 왕후마마를 알현하나이다."

   "보량궁주께서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신 것이오?"

   보량이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왕후마마께 청할 것이 있어 찾아왔나이다."

  "말씀해보시오."

  "소첩의 아버님께서 소첩에게 특별히 부탁하신 일이옵니다. 이번 인사 때 칠중성으로 발령이 나신 용춘공께서는 몇 해 전 작고하신 소첩의 언니의 시아버님 되시는 분으로, 소첩의 아버님과는 친형제처럼 정분이 두터우시니, 부디 왕후마마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서라벌로 귀환하실 수 있도록 발령을 내려주시기를 청하나이다. 또한 압독주로 발령이 나신 서현공께서는 아버님과 의형제를 맺으신 유신공의 부친이시니, 부디 두 분 모두 서라벌로 귀환하시도록 발령을 내려주시기를 청하나이다."

   승만왕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보량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일은 화랑도를 관장하고 있는 춘추공과 흠순공에게 달린 일이오."

   보량은 승만왕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왕후마마께서 춘추 오라버니와 흠순공에게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순간 보량은 승만왕후가 화랑도를 장악하려는 의중을 깨달았다.

   '왕후마마께서 화랑도를 장악하시고자 풍월주이신 춘추 오라버니와 부제인 흠순공이 화랑도를 떠나기 바라시는구나!'

   보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오면...... 왕후마마께서는 춘추공과 흠순공이 화랑도의 직위에서 물러나기를 바라시나이까?"

   승만왕후는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바로 그렇소. 화랑도를 관장하는 자들이 왕후인 나보다 태자를 더욱 따르니, 이 나라의 법도를 어찌 바로 세울 수 있겠소? 곧 춘추공과 흠순공이 나의 뜻을 알게 될 터인데, 어찌 나올지 모르겠소."

   보량은 승만왕후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전을 물러났다.

 

   보량이 승만왕후를 찾아간 것은 지방으로 좌천된 용춘과 서현이 조정의 요직에 복귀되도록 승만왕후에게 청하라는 아버지 보종의 분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춘추를 문희에게 빼앗긴 후 유신과 문희를 미워했던 보량은 보종으로부터 그러한 부탁을 받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었다.

   "소녀, 아버님께서 서현공과 깊은 인연을 맺으신 줄 미처 몰랐나이다."

   유신과 문희를 미워하는 보량의 마음을 눈치챈 보종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정녕 이 아비와 유신공과의 깊은 정분을 모른단 말이냐? 유신공은 이 아비에게 친형이나 다름없는 분이시다. 명심하거라."

   유신의 나이가 비록 보종보다 열다섯 살이 어렸지만, 풍월주는 전임 풍월주를 형으로 받드는 관례가 있어 16대 풍월주 보종은 15대 풍월주 유신을 형으로 받들었다. 보량은 보종이 엄한 얼굴로 말하자,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 유신과 문희에게 복수하고 싶었건만 아버님의 뜻이 이러하시니, 유신과 문희에 대한 원한은 갚을 수 없겠구나.'

   보량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정에 들러 아버지 보종에게 승만왕후가 자신의 청탁을 거절하였음을 알렸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보량은 승만왕후가 자신에게 한 말을 낱낱이 보종에게 고했다. 보량의 말을 들은 보종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왕후께서 승덕 왕자로 이 나라의 대통을 이으려 하심이 분명하다! 이를 막지 못한다면 자칫 피바람이 불어닥칠지 모르겠구나."

   보종은 한동안 숙고하다가 보량에게 말했다.

   "너는 너의 낭군 칠숙공께서 잘못된 길을 가지 아니하도록 잘 보필하거라. 알겠느냐?"

  순간 보량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낭군께서 왕위에 뜻을 품고 계시거늘, 아버님은 태자마마를 따르시니,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보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소녀,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보량은 보종에게 인사를 올린 후 문을 열고 나오다가 동생 양도와 마주쳤다. 양도는 오랜만에 친정을 찾은 보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님!"

   "양도야!"

   보량은 오랜만에 양도를 보자 기쁜 나머지 버선을 신은 채 마당으로 나와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양도야, 그간 잘 지냈느냐?"

   "소제, 누님 덕분에 잘 지냈사옵니다."

   "그간 어찌 지냈는지 이 누나에게 말해보거라."

   이때 마당에서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보량에게 인사를 하였다.

   "소제 군관, 보량 누님께 인사 올리나이다."

   소년은 진지왕의 딸 석명공주의 아들 군관으로 양도와 의기투합하여 얼마 전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양도가 보량에게 말했다.

   "군관은 올해 열다섯 살로 나이는 어리나 무예가 출중하여 소제가 아끼는 동생이옵니다. 소제, 이미 군관과 의형제를 맺었으니, 누님께서도 군관을 아우로 여기소서."

   군관은 보량을 처음 본 순간,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량은 대견스러운 눈으로 군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든든한 아우가 생겨 참으로 기쁘구나!"

   군관은 보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소제, 목숨을 바쳐 누님을 받들겠나이다."

   보량은 어린 군관이 어른스럽게 충성 맹세를 하자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는 보량의 모습이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군관은 보량이 자신을 대장부로 여기지 않고 어리게 보고 웃는 것이라 생각해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보량이 미안한 생각이 들어 군관을 위해 무슨 말을 할까 고심하고 있을 때 양도가 보량에게 말했다.

   "오늘 군관이 화랑도에 입문할 것이옵니다. 하여 화랑도 입문 시험을 치를 예정이라 이제 가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군관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 차라도 마실까 하였는데, 지금 떠나야 한다니, 참으로 유감이구나.“

   "누님께서도 저희들과 함께 화랑도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소제가 누님을 모시겠사옵니다."

   군관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누님이 생긴 것에 들떠서 불쑥 말을 내뱉었다. 군관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양도가 군관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내가 누님께 얘기해볼 터이니, 너 먼저 떠나거라."

   양도는 보량이 춘추를 대면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군관에게 혼자 떠나라 말한 것이었다.

   보량은 춘추를 대할 자신이 없었지만 군관이 실망할까 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나도 가마. 지금 같이 가자꾸나."

   양도가 보량의 안색을 살피며 눈짓으로 오지 말라고 했지만, 보량은 마당에 묶여 있는 양도의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출발하자."

 

   이 무렵 서라벌 전역에서는 흙비로 유실된 농경지의 복구 작업이 한창이라, 낭도들은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농경지 복구 작업에 참여하고 저녁부터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와서 무예를 연마하였다. 저녁노을이 짙어갈 무렵, 수련장에서 화랑들이 목검을 부딪치며 검술을 연마하고 있을 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우방화랑 양도가 누나 보량, 군관과 함께 말을 몰아 도착하였다. 화랑들은 보량을 보자 모두들 크게 반기며 소리쳤다.

   "보량궁주께서 오셨다."

   언니 보라가 화주가 되어 풍월주 춘추를 내조하고 있을 , 보라를 따라 매일같이 화랑도의 수련장을 찾아왔던 보량은 보라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처음이었다.

   작고한 화주 보라의 동생인 보량이 화랑도의 수련장에 나타나, 화랑들이 우르르 몰려와 보량에게 인사를 건넸다. 보량이 한꺼번에 몰려온 화랑들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을 때, 보량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량궁주, 그간 강녕히 잘 지내셨소?"

   보량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소싯적에 친하게 지냈던 예원이었다. 보량은 자신을 바라보는 예원의 눈빛에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만호태후의 막내딸 만룡공주의 외아들 예원은 보량을 깊이 사모하였지만,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보량이 춘추를 언니 보라에게 양보하고 방황했을 때도, 보량이 춘추에게 버림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칠숙과 보량의 혼례식을 지켜봐야 했던 예원이 한결같이 따뜻한 눈길로 보량을 바라보고 있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보량이 춘추를 사모하지만 않았어도, 예원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보량에게 다가서기만 했어도, 남녀 간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보량은 자신을 바라보는 예원의 눈빛을 마주보기가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보량이 예원에게 인사를 하려는 순간, 예원이 갑자기 보량의 뒤쪽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방대화랑 예원이 화주께 인사 올리나이다."

   화랑도의 화주 문희였다. 화주는 화랑도에서 풍월주 다음으로 높은 지위로, 문희의 작은 오라비인 부제 흠순조차 화랑도에서는 문희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화랑도의 화주, 문희의 위세를 실감한 보량은 질투심이 타올랐다.

   '저 자리는 나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춘추 오라버니도 화주의 자리도 모두 문희에게 빼앗겼구나!'

   보량은 타오르는 질투심을 감추며 문희를 바라보았다. 문희가 먼저 보량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오, 보량궁주. 그간 잘 지내셨소? 궁주께서 화랑도에 어인 일이시오?"

문희가 먼저 인사하자 보량도 마지못해 인사한 후 말했다.

   "제 아우 양도의 의아우인 군관이 오늘 화랑도에 입문한다기에 따라온 것이오."

   "그러셨군요. 허나 여인은 화랑도의 수련장에 올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소."

   보량과 문희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문희 입장에서는 춘추가 매일같이 머무는 화랑도에 보량이 드나드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는 없었기에 야박한 줄 알면서도 모질게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춘추와 보량, 문희 사이에 얽힌 사연을 모르는 군관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며 양도에게 눈짓으로 나서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양도는 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보량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랑도에 그런 법도가 생긴 줄 미처 몰랐소. 법도가 그러하다면, 이 몸은 이만 가보겠소."

   문희는 보량의 예의 없는 말투에 뭐라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이때 양도가 문희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인이 누님을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 하거라."

   양도가 보량을 데리고 화랑도의 수련장을 떠나려는 순간, 화랑들이 갑자기 한 방향으로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풍월주께 인사 올리나이다."

   춘추였다. 덕만공주의 명으로 흙비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작업을 총괄하고 있는 춘추가 공무를 끝내고서 마침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온 것이었다. 보량은 거의 2년 만에 춘추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보량이 양도와 군관을 따라 수련장에 온 것은 먼발치에서라도 춘추를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모든 화랑들이 춘추에게 무릎을 꿇자, 보량도 얼떨결에 무릎을 꿇으며 인사하였다. 춘추는 그런 보량을 보고는 황급히 다가가며 일어서라고 손짓했다.

   "궁주께서는 칠숙공의 부인으로 화랑도에 속한 자가 아니니, 내게 예를 갖출 필요가 없소. 일어나시오."

   보량은 쑥스러운 듯이 일어나 춘추에게 정중히 인사하였다.

   "풍월주께 인사드리오."

   주변을 둘러보다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보량을 바라보는 양도와 군관을 본 춘추는 사태를 짐작하고 보량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궁주께서 아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시러 화랑도의 수련장에 귀한 발걸음을 하셨으니, 좀 구경하다 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하겠습니다.”

   춘추가 보량과 대면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는 문희의 속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풍월주인 춘추의 말은 화랑도에서만큼은 절대적이어서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보량 역시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와 아쉬움, 그리고 춘추를 만난 설렘이 섞여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양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후, 군관의 화랑 입문 시험이 시작되었다. 춘추가 손짓하자 검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화랑 죽지가 군관의 검술을 시험하기 위해 목검을 들고 나섰다. 양도가 건네준 목검을 쥔 군관은 죽지와 검술을 겨루었다. 군관이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죽지를 찌르자 순간 둔탁한 목검 소리를 내며 죽지가 군관의 목검을 막아냈다. 이어 죽지가 반격에 나섰으나 군관이 막아냈다. 수십 합이 넘도록 승부를 겨루었으나 막상막하였다. 죽지도 군관의 검술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최선을 다해 공격했지만 군관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겨우 열다섯 살의 군관이 화랑도 내에서 검술로 유명한 죽지와 대등한 싸움을 벌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고, 화랑들은 혀를 내두르며 군관의 검술을 칭찬했다. 보량 역시 군관의 뛰어난 검술을 보고는 크게 감탄했다.

   '내 아우 군관이 이토록 용맹한 장사였구나! 앞으로 군관을 잘 보살펴준다면 유신을 능가하는 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량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유신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군관과 죽지의 대결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자, 춘추가 손짓으로 중단시켰다. 춘추는 박수를 치며 군관을 칭찬했다.

   "어린 나이에 이토록 검술이 뛰어나다니, 참으로 장하구나! , 너의 화랑도 입문을 허락할 터이니, 마음을 다하여 무예를 수련하여 이 나라의 기둥이 되거라."

   군관은 정말 기뻤다. 풍월주인 춘추로부터 극찬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선녀처럼 아름다운 보량 앞에서 남자로서의 기개와 무술 실력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어서 하늘을 나를 것만 같았다.

   보량은 양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보종과 어머니 양명공주께 하직인사를 올린 후 시집으로 돌아갔다. 보량은 칠숙에게 시집온 지 2년이 흘렀건만 춘추에 대한 연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아비와 나의 보로가 있거늘, 어찌 여태껏 춘추 오라버니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나의 운명이 원망스럽구나!'

   자신도 모르게 보량의 눈시울에 이슬이 맺혀졌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