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낭비성 전투

조정우 2012. 10. 28.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낭비성 전투

 

 

 

   단풍이 붉게 물든 남산의 봉화대에서 적국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마 후, 화랑들이 삼삼오오 말을 몰아 남산의 들판에 나타났고, 이어 사방에서 낭도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들더니, 어느새 오천에 이르는 낭도들이 집결하였다. 앞서 당도한 춘추가 낭도들의 우두머리인 화랑들에게 명을 내렸다.

   "곧 출정에 대한 어명이 당도할 터이니, 당장이라도 출정할 수 있도록 채비하거라!"

   이때 멀리서 거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유신이 달려오고 있었다. 유신은 말에서 내려 춘추에게 병부를 보여주며 말했다.

   "춘추공, 칠중성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어 태자마마께서 이 몸에게 화랑군을 이끌고 칠중성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춘추의 아버지 용춘이 성주로 있는 칠중성이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왕궁에 당도하자, 섭정인 덕만공주는 유신을 대장에 임명하여 화랑군을 이끌고 칠중성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춘추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나 또한 공과 함께 가겠소. 나의 아버님께서 칠중성의 성주로 계시거늘, 내가 어찌 출정하지 아니할 수 있겠소?"

   유신은 춘추의 주먹을 맞잡으며 말했다.

   "좋소. 춘추공이 화랑도의 주인이니, 뜻대로 하시오."

   춘추의 출정 소식을 들은 문희는 만삭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마차를 타고 춘추를 마중 나왔다. 춘추의 둘째 자식을 임신한 문희는 자신이 손수 짠 가죽 갑옷을 춘추에게 건네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낭군께서 무탈하게 돌아오시기를 하늘에 기도하겠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결심한 춘추는 어쩌면 다시는 문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고한 아내 보라를 잊지 못해 방황했던 지난날이 생각나 문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춘추는 한동안 지긋한 눈빛으로 문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인, 하늘이 나를 보우하실 터이니, 심려 마시오."

   이때 보량이 말을 몰아 달려왔다. 보량을 본 양도와 군관이 동시에 외쳤다.

   "누님!"

   보량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아우들아, 부디 무탈하게 돌아와다오. 무탈하게 돌아오겠다고 이 누이에게 약조할 수 있겠느냐?"

   양도가 보량에게 말했다.

   "소제와 군관, 모두 무탈하게 돌아올 터이니, 누님께선 심려치 마소서."

   보량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춘추를 힐끗 쳐다본 후 양도에게 속삭였다.

   "양도야, 춘추 오라버니를 잘 모시거라."

   "누님......"

  양도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 누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이때 유신이 화랑군에게 출정 명을 내렸다. 양도와 군관은 명을 따르고자 다급히 보량에게 하직인사를 한 후 말을 몰아 자리를 떠났다. 보량은 떠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양도야, 군관아, 꼭 무탈하게 돌아와야 한다. 모두 무탈하게 돌아올 때까지 매일같이 하늘에 기도하마!"

   “염려 마소서, 누님. 내 누님을 끝까지 보필하기 위해서라도 꼭 이기고 돌아오겠나이다.”

   의동생이 된 후로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는 보량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군관은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유신과 춘추가 화랑군을 이끌고 월성(왕성)을 지나가고 있을 때, 갑주를 입은 덕만공주가 경사병 5천 기를 이끌고 나타났. 작년, 백제와의 가잠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덕만공주는 이번 기회에 3년 전 빼앗겼던 낭비성을 탈환하여 태자로서의 입지를 굳힐 생각이었던 것이다. 유신이 근심 어린 얼굴로 덕만공주를 만류했다.

   "태자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대통을 이을 귀하신 몸이시온데, 어찌 시석이 빗발치는 전투에 나서려 하시나이까?"

   "유신공과 소질이 목숨을 걸고 싸워 반드시 승리를 이룰 것이오니, 태자마마께서는 뜻을 거두소서."

   춘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덕만공주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 또한 목숨을 바쳐 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나의 뜻을 따르거라."

   덕만공주는 이어 유신에게 말했다.

   "내 비록 여자의 몸이나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할 작정이니, 명을 받드시오."

   덕만공주의 두 눈은 결연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유신과 춘추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삼가 태자마마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덕만공주의 신라군이 서라벌의 관문을 지날 무렵, 유신의 스승인 유오랑이 수백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검술이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8대 풍월주 문노에게 검술을 배운 유오랑의 어머니 유지는 가야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공을 인정받지 못하자 신분제도에 불만을 품고 무리들을 이끌어 소요를 일으킨 전과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유지의 아들인 유오랑은 신라 최고의 검객으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는데, 이를 안타깝게 생각해오던 덕만공주는 얼마 전 칙서를 내려 유지의 자식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유오랑이 덕만공주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고 나선 것이다. 유오랑은 말에서 내려와 덕만공주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소인 유오랑, 태자마마께 충성을 바치고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왔나이다. 부디 거두어 주소서."

   유오랑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덕만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유오랑, 그대와 그대의 제자들이 나를 따르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오. , 그대를 참모에 임명할 터이니, 나를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주시오."

   "소인, 미력하나마 힘을 다하여 태자마마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이때 갑주를 입은 아름다운 낭자가 유오랑의 옆으로 다가왔다.

   "소녀, 유란이 태자마마를 뵙나이다."

   유오랑이 덕만공주에게 말했다.

   "소인의 딸이옵니다. 검술이 쓸만 하오니, 태자마마께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 그대의 어미, 유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만, 그대의 딸 또한 명검객인 줄은 미처 몰랐소. 내 반드시 중히 쓰겠소."

   유란은 덕만공주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녀, 태자마마께 신명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덕만공주는 유오랑에게 작전을 물어볼 생각으로 막사를 세운 후 작전회의를 열었다. 덕만공주가 유오랑을 보며 물었다.

   "칠중성을 포위하고 있는 고구려군을 깨뜨릴 좋은 방책이 없겠소?"

   유오랑은 품 안에서 천 조각을 꺼내 덕만공주에게 바쳤다.

   "이 나라의 길과 지리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옵니다. 소인이 제자들과 함께 만든 것이온데, 태자마마께 바치겠나이다."

   지도에는 신라 영토의 지리와 길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지도를 살펴본 덕만공주는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참으로 귀한 지도요! 고구려군을 깨뜨릴 좋은 방책이 있다면 말씀해보시오."

   "아군에게 군마 이천이 있으니, 용맹한 병사들을 기병으로 선발하여 저들이 모르는 사잇 길로 진군해 어두운 야밤에 기습한다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은 방책이오. , 그대의 방책을 따르리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적성산 뒤편에 위치한 신라의 칠중성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 간에 일전일퇴의 치열한 공성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충차(앞부분에 쇠망치가 달려 성문이나 성벽을 부수는 전차)와 운제(이중 사다리로 성벽을 오르는 공성용 전차) 등 공성전 무기를 동원해 칠중성에 맹공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성산의 숲 속에서 입에 나뭇가지를 문 병사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칠중성을 향해 다가왔다.

숨을 죽여 진군하던 병사들은 고구려군 진영으로부터 백 보 정도 거리의 숲에 이르자, 입에 문 나뭇가지를 뱉고서는 죽은 듯이 명을 기다렸다. 맨 앞 열에 있던 기수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자, 이를 신호로 병사들은 고구려군 진영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였다. 이를 본 고구려 파수병이 외쳤다.

   "적군의 기습이다!"

   이들은 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었다. 유오랑의 계책대로 용맹한 병사 2천 명을 기병으로 선발한 유신은 군대를 이끌고 사잇길로 행군하여 칠중성에서 십여 리 떨어진 숲 속에 당도했었다. 이후 몰래 숲길로 진군하여 공성전 중인 고구려군을 기습한 것이었다. 유신은 번개처럼 돌진하여 고구려군의 대장 손대영의 목을 베었다. 갑작스러운 신라군의 기습에 대장을 잃은 고구려군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이때 성루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용춘이 3천 기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와 고구려군을 협공하자, 앞뒤에서 적을 맞은 고구려군은 한순간에 진영이 무너졌다. 창졸 간에 진영이 무너진 고구려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낭비성으로 퇴각하였다. 유신과 용춘은 병사들을 이끌고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였지만, 고구려군은 기병을 내세워 신라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낭비성 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용춘이 유신에게 말했다.

   "곧 태자마마께서 당도하실 것이라 하니,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일단 태자마마께 전령을 보내 작전을 여쭙는 것이 좋겠소."

   "그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튿날, 덕만공주가 8천 기를 이끌고 당도하여 낭비성에 총공격을 명하였다. 한창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전령병이 다급하게 말을 몰아 중군(작전 지휘부가 있는 군대)의 진영에 당도하여 덕만공주에게 보고하였다.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만쯤 되어 보이는 기병을 이끌고 수십 리 밖까지 진군해왔다 하나이다."

   고구려 조정의 실권자인 막리지 연개소문은 올해 스물세 살로,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막리지에 올라 고구려의 병권을 장악한 이래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전승을 거둔 천하의 영걸이었다. 연개소문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덕만공주는 근심 어린 얼굴로 유오랑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기병 이만을 이끌고 온다 하는데, 어찌 하는 것이 좋겠소?"

   유오랑은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낭비성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만에 유오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인이 듣건대, 연개소문은 용맹과 지략을 갖춘 천하의 영걸이라 하오니,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아군의 진지가 있는 적성산 기슭의 들판으로 퇴각하여 맞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칠성성주 용춘이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진지를 세워둔 적성산 기슭의 들판에는 참호와 누벽(흙이나 돌로 만든 벽)이 곳곳에 있어 수비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덕만공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퇴각 명을 내렸다.

 

   한편 막사에서 장수들과 작전을 의논 중이던 연개소문은 척후병에게서 덕만공주가 이끄는 신라군이 적성산 기슭의 들판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자인 덕만공주가 신라군의 수장이라니, 신라가 망할 때가 되었나보구나!"

   연개소문의 누이동생 연수진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소녀 또한 여자이온데, 오라버니의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소녀가 고구려군의 수장이 된다 하여도 그리 말씀하시렵니까?"

   올해로 열여덟 살인 연수진은 용병과 검술에 능한 천하의 여걸로 언니 연수영과 함께 연개소문과 장수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여자를 깔보는 듯한 연개소문의 말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누이동생의 당돌한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신라에는 너와 같은 여걸이 없기에 그리 말한 것이니, 이 오라비의 말을 마음에 두지 말거라."

   연개소문은 이어 장수들에게 말했다.

    "나 연개소문이 이번 원정에 나선 것은 신라가 자랑하는 화랑도를 깨뜨리고, 여세를 몰아 서라벌까지 점령하여 신라를 고구려에 합병시키기 위함이오. 지금 당주 이세민이 대군을 보내 돌궐 정벌에 나섰으니, 당장이야 괜찮다 하나 머지않아 우리 고구려를 침략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 아니겠소. 그 전에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여 삼한을 통일해야만 우리 고구려가 총력을 기울여 당을 대적할 수 있을 것이오. 나의 뜻이 이러하니, 장수들은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주시오."

   장수들이 동시에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막리지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병사들을 이끌고 적성산 기슭의 들판에 당도한 연개소문은 대형 온군에게 명을 내렸다.

   ", 장군께 철기병 오천기를 줄 터이니, 신라군을 깨뜨리시오."

   "소장, 막리지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온군은 39년 전 신라에 빼앗긴 고구려의 영토 계립현과 죽령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전사했던 온달의 아들로, 아버지 온달의 복수를 위해 아들 온사문과 함께 연개소문을 따라 신라 원정에 나섰던 것이다. 온군은 아들 온사문과 함께 철기병 5천 기를 이끌고 적성산 기슭의 들판에 진을 친 신라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병사의 머리에서부터 말의 다리까지 온통 철갑을 두른 고구려 철기병은 요란한 금속성의 출동음을 내며 신라군의 진영을 덮쳤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39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린 온군이 아들 온사문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맹렬하게 돌진하니, 들판에 구축한 신라군의 수비망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자 들판에 포진한 신라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바로 그때, 유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신라군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내 듣건대, 옷깃을 떨쳐야 옷이 바르게 펴지고, 벼리를 당겨야 그물이 바르게 펴진다고 하니, 내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다. 뜻있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유신은 말을 마치자마자, 단기필마로 고구려군 진영을 향해 돌격하였다. 양손에 쌍검을 쥔 유신은 신들린 듯이 검을 휘두르며 돌진하여 순식간에 수십 명의 철기병을 베었다. 고구려 철기병 수십 기가 유신을 에워싸자, 유신이 걱정된 덕만공주가 다급하게 명을 내렸다.

   "유신공을 엄호하라!"

   덕만공주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춘추가 예원, 선품, 진주, 양도, 군관 등의 화랑들과 함께 5천여 화랑군을 이끌고 고구려 철기병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어 유오랑이 딸 유란과 함께 수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유신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고구려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유신이 단기필마로 적진을 누비며 용맹을 떨치자, 유신이 화랑에 입문했을 때부터 20여 년 간이나 따라왔던 용화향도 2백여 명도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유신공, 우리 용화향도 모두 목숨을 바쳐 유신공을 따르겠나이다!"

   5천여 명의 화랑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분전하니, 신라군의 기세는 전장을 삼킬 듯하였다. 화랑군의 파상공세에 고구려 철기병은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총공격!"

   덕만공주의 명에 신라군이 총공격에 나서자,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본 연개소문은 즉시 전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지만, 승세를 탄 신라군은 거침없이 돌진하여 고구려군 진영을 무너뜨렸다. 연개소문은 패전을 직감하였지만 여자인 덕만공주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 연개소문은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거늘, 여자인 덕만공주가 이끄는 신라군에 패하다니!"

   연수진이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오니, 낭비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연개소문은 연수진의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오기가 생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전열을 정비하여 역공한다면 능히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창을 치켜들어 작전을 지휘하고 있을 때, 유신이 용화향도를 이끌고 순식간에 고구려군을 초토화시키면서 연개소문의 앞에 나타났다. 유신이 고구려군의 중앙을 뚫고 온 것이다. 고구려 최고의 장수 연개소문과 신라 최고의 장수 김유신이 맞닥뜨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유신은 쌍검을 휘둘러 고구려 병사들을 사정없이 베며 연개소문 앞으로 다가갔다.

   8척 거구에 한눈에 봐도 호랑이와도 같은 기상이 뻗쳐나는 연개소문이었지만, 한 마리 성난 독수리처럼 양 날개의 쌍검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적진의 심장부까지 돌진해온 유신의 용맹함에 비록 적장이지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신라에 저런 장수가 있다니, 죽이기는 너무 아깝구나. 어차피 삼국은 모두 배달민족의 후예가 아닌가!'

   연개소문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유신을 향해 외쳤다.

   "나는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이다. 너는 누구냐?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네가 고구려에 귀순한다면 내 후히 대하리라. 항복하라!"

   유신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 김유신, 너의 목을 베려 애써 여기까지 왔거늘, 어찌 항복하겠느냐? 허튼소리 말고 내 검이나 받거라!"

   유신은 연개소문을 향해 말을 몰아 돌진하였다. 연개소문도 유신을 향해 돌진하였다. 유신이 태산을 쪼갤 듯한 기세로 검을 내리치자, 연개소문이 창으로 막았다. 그 순간 연개소문의 팔과 몸 전체에 엄청난 전율이 전해졌다. 연개소문이 지금까지 그 어떤 싸움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한 힘이었다. 유신의 쌍검이 어지러이 연개소문을 찌르자, 연개소문은 방패를 버리고 허리에 찬 5(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개의 검을 찼다고 전해진다) 중 하나를 뽑아 유신의 쌍검에 맞섰다. 연개소문은 힘이 천하장사로 힘에서는 압도했지만, 유신은 번개처럼 빠른 쌍검술로 힘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유신과 연개소문은 50합을 넘게 겨루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화려한 유신의 쌍검술에 적잖이 놀랐다. 지금까지 일대일 싸움에서 연개소문은 자신을 대적할 만한 장수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연개소문이 온 힘을 다해 아무리 맹공을 가해도 유신은 조금도 물러섬 없이 더욱 기세등등하게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개소문의 주변에 신라군이 늘어갔다. 이때 연수진은 유오랑의 딸 유란과 여장부의 자존심을 건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 전황이 크게 불리함을 깨닫고 연개소문에게 외쳤다.

   "전세가 지극히 불리하오니, 속히 퇴각 명을 내리소서!"

   연개소문이 사방을 둘러보니, 방진(사각형 모양으로 진영을 구축하는 진법)을 펼친 고구려군의 진영이 신라군의 맹공에 붕괴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마침내 퇴각 명을 내렸다.

   "퇴각하라!"

   고구려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덕만공주는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추격 명을 내렸다.

   "추격하라!"

   덕만공주의 명을 받고 유신은 말을 몰아 질주하여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사정없이 베며 외쳤다.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라!"

   연개소문은 두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한 기세로 전장을 휘젓고 있는 유신에게서 난생처음 위협을 느꼈다. 유신이 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질풍노도의 기세로 고구려군을 추격하자, 고구려군은 서로 앞다투어 퇴각하느라 전열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고구려군이 낭비성에서 10 리 떨어진 숲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말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이어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어라! 함정이다! 온통 마름쇠(날카로운 쇠가시가 달린 마름 모양의 무기)와 철질려(마름쇠를 줄로 이은 무기)가 깔려 있다."

   순간, 사방에서 쇠뇌와 화살이 쏟아져 고구려군을 덮쳤다. 전세가 신라쪽으로 기울자 춘추가 수천의 낭도들을 데려와 숲길에 마름쇠와 철질려를 깔아놓고 숨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당황한 틈을 타 춘추가 말을 몰아 돌진하여 맨 앞 열에서 지휘하고 있던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었다. 동시에 매복해 있던 낭도들이 뛰쳐나와 고구려군을 덮치자, 고구려군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다. 때를 같이하여 후방에서 유신이 거세게 몰아붙이자, 앞뒤로 적을 맞은 고구려군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수진이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이대로 낭비성으로 퇴각한다면 퇴로가 끊길 우려가 있사오니 낭비성을 포기하고 패하(임진강)를 건너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한순간의 방심에 이 지경이 되었구나!"

   연개소문은 크게 탄식한 후 패잔병을 수습하여 패하를 건넜다. 연개소문에게는 치욕적인 패배였다. 수나라와 당나라도 어쩌지 못하는 대고구려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 고구려의 수장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막리지 연개소문일진데…… 연개소문은 오늘의 패배가 너무나 뼈아팠다. 신라군의 수장이 공주라고 얕본 것부터가 실수였다.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적진 한가운데 혈혈단신 뛰어들어,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검술을 불을 뿜듯 휘둘러대는 유신의 얼굴이 연개소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