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승만왕후의 야심

조정우 2012. 11. 11. 08: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특별회 - 승만왕후의 야심

 

  

   보름달이 휘영청 환하게 비추던 어느 봄날, 자색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달빛에 여울져 흐르듯 살랑거리는 옷자락을 날리며 아기를 보듬고 있는 여인의 자태가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인은 아기를 안은 채 정자에 올라 보름달을 우러러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언니, 언니가 보고 싶어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정숙하고 지극히 아름다우신 언니를 그토록 일찍 데려가셨을까요? 제가 언니께 춘추 오라버니를 양보했을 때는 언니만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랐건만, 언니도 춘추 오라버니도 잃은 지금 허망하기 짝이 없군요."

   여인은 보량이었다. 두 달 전, 칠숙과의 사이에 아들 보로를 낳은 보량은 마음을 추스려 춘추를 잊으려고 하였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녀의 뺨에 흐르던 눈물이 보로의 뺨에 떨어졌다. 그러자 아기가 어미를 탓하기라도 하듯 잠에서 깨어나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보로야, 울지 말거라. 이 어미가 잘못했다. 착하지, 나의 아기야. 이 어미가 노래를 불러주마."

   그녀는 아기를 어르기 위해 잔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기가 겨우 잠들었을 즈음, 뒤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 능보였다. 보량이 칠숙에게 시집올 때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 능보는 그녀의 수족과도 같았다. 보량은 아기가 잠이 깰까봐 검지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능보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능보가 보량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승만후께서 왕림하시어 마님을 뵙고자 하시나이다."

   보량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승만후를 내실로 모시거라."

   보량은 이 시간에 승만후가 찾아왔다는 게 이상했다. 요즘 부쩍 살갑게 대하는 사이가 되긴 했으나 왠지 그냥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마마, 어서 오소서. 후궁마마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귀하신 발걸음을 하셨나이까?"

   승만후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 보량궁주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 왔소."

   승만후는 품속에서 서찰로 보이는 비단 조각을 꺼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승만후의 말이 이어졌다.

   "이 서찰을 궁주의 부군께 전해드리시오."

   "그리하겠나이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만 가보겠소. 보로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으나 밤이 늦은 터라 그냥 가리다."

   “마마, 차라도 내오라 하겠나이다. 잠시만 기다리소서.”

   “아니요. 오늘은 이 서한만 전하러 온 것이니 그만 가보겠소. 해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불편할 터인데 나오지 마시오. 또 보겠소. 산후조리 잘 하시게.”

   승만후는 보량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을 했으나 왠지 오늘은 비장함이 느껴졌다.

승만후가 떠난 후, 보량은 한동안 서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연유로 야심한 시각에 찾아와 낭군께 서찰을 전해달라는 걸까?'

   1년 전 즈음인 보량의 혼례식 날, 승만후가 왕자를 낳은 지 보름밖에 안 된 몸으로 진평왕과 마야왕후를 따라 혼례식장을 찾아왔었다. 이후부터 승만후는 보량이 진평왕을 알현하러 입궁할 때마다 시녀를 보내 자신의 처소에 초대하여 호의를 보였다. 칠숙에게 시집간 후 친정과 떨어져 적적했던 보량으로서는 승만후의 호의가 고맙게 느껴졌다. 당시 아기가 없었던 보량은 승만후의 왕자 승덕에게 깊은 정을 느꼈다. 그때부터 둘은 서로의 처소를 자주 왕래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보량이 보로를 낳자, 승만후는 종종 보로를 보러 오기도 했던 것이다. 한동안 서찰을 바라보던 보량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찰을 펼쳤다.

 

   '칠숙공께 상의드릴 것이 있어 글월을 올리오.

왕후께서 병이 위중하시니 얼마 사시지 못할 듯하오. 폐하께서 이 몸을 총애하시니, 칠숙공께서 대신들의 중론을 모아주신다면 금상첨화일 것이오. 무엇보다 태후마마의 윤허를 받는 것이 중요하오. 태후마마께서는 칠숙공을 누구보다 총애하시니, 칠숙공께서 잘 말씀하여 주시면 반대하지 아니하실 것이오. 칠숙공께서 이 몸이 곤위에 오르도록 힘써주신다면, 이 몸은 칠숙공께서 태자의 위에 오르시도록 힘쓰겠소.'

 

   보량은 서찰을 읽다가 자신을 총애하였던 마야왕후가 위중하다는 대목에 이르자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왕후마마께서 아직 멀쩡히 살아계시거늘, 어찌 벌써 곤위의 자리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보량은 승만후가 칠숙을 태자의 위에 오르도록 힘쓰겠다는 대목에 이르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내로서 어찌 지아비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허나 승만후의 약조를 믿을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로구나. 승만후는 자기 소생의 왕자가 있거늘, 과연 낭군을 태자의 위에 앉히려 하겠는가?'

   보량은 서찰을 탁상에 놓고 생각에 잠겼다. 이때 문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주인어른께서 왕림하셨나이다."

   칠숙이 하인으로부터 승만후가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보량을 찾은 것이었다.

   "안으로 모시거라."

   그녀는 탁상 위에 있는 서찰을 칠숙에게 건넸다.

   "이 서찰을 낭군께 전해드리라 하더이다."

   칠숙은 보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찰을 펼쳤다.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승만후가 곤위에 오른다면, 내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칠숙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찰을 보량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서찰을 읽어보시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실직고하였다.

   "송구하오나, 첩이 감히 낭군의 서찰을 미리 보았나이다."

   "괜찮소. 어차피 부인께서도 아셔야 할 일이 아니오."

   칠숙은 서찰을 촛불로 태운 후 보량에게 말했다.

   "오늘 일을 절대 발설하면 아니될 것이오. 부인의 부모 형제에게도 절대 아니되오. 알겠소?"

  "첩은 낭군의 뜻을 따를 뿐이나이다."

  "고맙소."

   이 무렵, 마야왕후의 병이 위중하여 진평왕이 총애하는 후궁 승만후가 왕후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승만후의 가문 경주 손씨는 6두품으로 신라가 개국한 이래 왕후를 배출한 적이 없었으나, 승만후는 진평왕 재위 48년 만에 왕자를 낳은 위세를 앞세워 왕후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이때 진평왕에게는 승만후 외에도 지소태후의 소생인 숙명공주의 딸 화명과 옥명, 두 명의 후궁이 있었다. 혈통으로 봐서는 진골정통인 화명과 옥명 중에서 왕후를 간택하는 것이 순리이나, 진평왕의 마음은 왕자를 낳은 승만후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다만 중신들이 반대한다면 왕후의 자리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승만후는 만호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중신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칠숙에게 청탁한 것이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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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글 : 김춘추 대왕의 꿈, 나당동맹의 정당성을 묻는다. (사자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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