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김춘추와 연개소문

조정우 2013. 3. 2. 08: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김춘추와 연개소문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되어 사위 품석은 백제군의 강요로 자결했고, 딸 고타소는 행방을 알 수 없으나 품석을 따라 자결한 것으로 사료된다는 소식이 당도하자, 춘추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고타소야! 네가 어찌 이 아비를 두고 먼저 떠났느냐? 어찌......"

   춘추는 충격으로 비틀거리다 기둥에 기댄 채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춘추는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 품석이 죽었다면 고타소는 충분히 따라가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끝까지 저항하다 성이 함락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적장의 부녀자들은 노예로 전락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장수나 귀족의 아내들은 자결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희가 달려와서 춘추를 위로하였다.

   "낭군, 인명은 재천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소서."

   문희는 온종일 춘추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춘추는 문희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침묵하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기둥을 내리치고는 절규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신라의 대장부가 어찌 간악한 백제를 없애지 못한단 말인가!"

   춘추는 넋이 나간 듯 문희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의관도 갖추지 않은 채 갑자기 마당에 있는 말에 올라타 급하게 대문을 나섰다. 문희는 전혀 딴 사람이 된 듯한 춘추의 태도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춘추는 그길로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입궁하여 선덕여왕의 처소를 찾았다. 춘추가 의관도 갖추지 않은 채로 선덕여왕의 처소에 이르자, 시종장이 춘추의 앞을 가로막았다.

   "춘추공, 어찌 의관도 아니 갖추시고 입궁하셨나이까? 집으로 돌아가시어 의관을 갖추고 오소서."

   이때, 문희가 춘추의 의관을 든 시녀와 함께 나타났다. 문희 애처로운 눈빛으로 춘추를 보며 말했다.

   "낭군, 의관을 가져왔나이다."

   춘추는 시녀가 든 의관을 낚아채 그 자리에서 입더니 시종을 밀치고 선덕여왕의 처소로 들어갔다. 춘추는 무릎을 꿇고 읍하며 말했다.

   "폐하! 소신의 딸이 백제왕 의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사옵니다. 딸의 피맺힌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고자 하오니,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춘추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쏟았다. 선덕여왕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타국에 원병을 청하는 것은 아국의 주권을 손상시킬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하느니라. 진흥대제 이래, 우리 신라는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거늘, 너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허리를 굽혀 원병을 청해서야 되겠느냐? 그간의 고구려와의 관계로 보아 우리의 요청을 들어줄 명분이 크지 아니하고, 원병을 보낸다 해도 원병을 빌미로 고구려가 우리 신라를 속국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내 너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니, 조금만 더 심사숙고 해보자. 지금 고구려의 정세가 심상치 아니하니 좀 더 상황을 알아보고 결정할 것이니라. 이럴 때일수록 감정에 휩쓸리면 아니된다. 우리 신라가 국력을 키운다면, 언젠가는 너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니라."

   선덕여왕의 뜻이 확고하여 춘추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나온 춘추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였다.

   '의자야, 기다리거라. 내 기필코 백제를 멸하여 이 원한을 갚으리라!'

   백제군이 신라 서남변의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옛 가야의 성들을 공격하자 불과 한 달 만에 40여 개의 성이 항복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는 막리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180여 명의 대신을 살해한 데 이어 영류태왕마저 시해하였다. 정변으로 고구려 조정을 한손에 쥔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의 동생 태양왕자의 아들 보장을 태왕으로 추대하였으니, 이가 고구려 최후의 태왕 보장태왕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선덕여왕은 대전회의를 소집하였다.

  "고구려의 대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새 태왕을 세웠으니, 이번 기회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청하고자 하는데, 누구를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

   춘추가 앞으로 나서며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을 사신으로 보내주소서! 소신이 연개소문을 설득하여 원병을 청하겠나이다."

   선덕여왕은 한동안 고심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본래 나의 사촌 자장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춘추공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 일을 춘추공에게 일임하겠소."

   "소신의 청을 거두어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춘추는 사신단을 꾸려 고구려로 떠날 채비를 마친 후 유신을 찾아갔다.

   "십육 년 전, 나와 공은 한 몸이 되어 나라의 고굉이 되기로 맹세하였소. 이제 내가 호랑이 굴과도 같은 고구려에 가는데, 내가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공은 어찌하시겠소?"

   유신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공이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세컨대 나의 말굽이 고구려 왕과 연개소문의 집 뜰을 짓밟게 될 것이오. 그와 같이 하지 못한다면, 내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겠소?"

   춘추는 크게 기뻐하며 유신의 주먹을 잡았다.

   "고맙소. 내 오늘 공과 서로의 분신이 될 것을 하늘에 맹세하고 싶소. 나는 공의 분신이 되고, 공은 나의 분신이 되어 죽기까지 함께하면 좋겠소."

   "나 또한 공의 뜻과 같소."

   춘추는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흘린 피로 하늘에 맹세하였다.

   "하늘이시여, 저 춘추는 유신공과 한 몸이 되고, 분신이 되어 죽기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에 맹세하나이다."

   이어 유신이 똑같이 맹세하자,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육십일 안에 돌아올 생각이오. 육십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내게 변고가 생긴 줄로 아시고 폐하께 아뢰어주시오."

  "육십일이 지나도 공께서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내 결사대를 이끌고 고구려 도성을 공격하겠소."

   "고맙소!"

   춘추가 사신단을 이끌고 평양성에 당도하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친히 마중 나와 춘추와 수행원을 고구려 태왕이 거처하는 안학궁에 데려온 후 큰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한창일 때 연개소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신라가 우리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지 아니한 지가 오래이거늘, 갑자기 사신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오?"

   "대국의 태왕께서 보위에 오르셨는데, 어찌 경하드리지 아니할 수 있겠소이까?"

   "내 들으니, 얼마 전 공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던데, 공이 사신으로 온 것은 바로 우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여 공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겠소?"

   춘추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연개소문의 말에 움찔하여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몸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왔을 뿐이오. 어찌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소이까?"

   "무릇 나라의 신하된 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사적인 일로 대의를 그르치는 것이오. 신라의 재상인 공께서 백제에 대한 사적인 원한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나라의 꼴이 뭐가 되겠소? 하루빨리 사적인 원한을 버리고 신하된 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시기 바라오."

   춘추는 연개소문에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비록 연개소문이 실질적인 권력자라고는 하나, 신라의 왕족이며 선덕여왕 다음가는 명실상부한 신라의 이인자인 춘추에게 똑같은 재상으로서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타이르듯 말하는 연개소문의 무례함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이번 기회에 어떤 형태로든 신라에 대한 우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춘추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춘추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함을 견지했다. 백제의 의자왕에게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모도 견딜 수 있었다.

   "대막리지께서 이 몸을 오해하신 듯하오. 이 몸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왔을 뿐이외다. 신하는 오로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신하 된 도리를 다함일 뿐이외다. 신하가 사적인 욕망을 위해 처신한다면 그것은 곧 임금을 능멸하는 것이고 만고의 역적이 아니겠소이까. 여하튼 대막리지의 말씀, 마음에 새겨듣겠소이다."

   순간 연개소문의 눈썹이 움찔하며 흔들렸다. 선왕인 영류태왕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연개소문을 빗대어 훈계한 것이 아닌가. 춘추의 범상치 않은 풍모와 흔들림 없는 차분한 언변에 연개소문은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개소문은 평정심을 잃지 않는 춘추를 날카로운 눈매로 한동안 쳐다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이 몸은 중요한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 하오. 즐거운 연회가 되기를 바라겠소."

   연회장을 나선 연개소문은 곧장 보장태왕을 알현하였다.

   "신이 헤아리건대, 얼마 전, 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였으니, 춘추가 사신으로 온 것은 아국에 원병을 청하여 원한을 갚기 위함이 틀림없사옵니다. 춘추는 왕실에 왕자의 씨가 마른 신라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이옵니다. 신이 듣기로, 그자는 문무를 겸비했으며 탁월한 지략과 덕을 가진 인물로 추앙받는다 하옵니다. 신이 만나본즉, 역시 그 비범함이 보통이 아니었사옵니다. 장차 춘추가 왕위에 오른다면 우리 고구려에 큰 위협이 될 게 분명하옵니다. 이 기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억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보장태왕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신을 억류하는 것은 상례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리하여도 괜찮겠소?"

   "태왕께 무례를 범하여 억류하였다 하오면 그만이 아니겠사옵니까?

   다음 날, 춘추는 고구려 시위의 인도를 받아 보장태왕의 처소를 찾았다. 보장태왕의 좌우에는 검을 찬 수십 명의 호위병사들이 도열하여 있었다. 춘추는 보장태왕에게 읍을 하였다.

   "지금 백제가 독사나 돼지처럼 우리 신라의 영토를 침탈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아국의 임금께서 대국의 원병을 얻어 치욕을 씻고자 소신을 사신으로 보낸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태왕께서는 원병을 파병하여 아국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죽령과 마립현은 본시 아국의 영토인데 신라가 침탈하였으니, 만약 신라가 원병을 원한다면 마땅히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해야 할 것이다.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하지 아니한다면, 그대는 신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춘추는 보장태왕이 신라에 원병을 보낼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억류할 속셈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춘추는 작심을 하고 말했다.

   "나라의 영토를 반환하는 일을 어찌 일개 신하인 소신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것은 소신의 역량 밖의 일이옵니다."

   보장태왕은 일부러 대노하는 척하며 명했다.

   "여봐라! 저자가 짐의 명을 업신여기니,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당장 하옥하거라."

춘추가 사신단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떠난 지 60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유신은 입궁하여 선덕여왕을 알현하였다.

   "폐하, 고구려가 무도하게도 사신으로 간 춘추공을 억류하고 있으니, 마땅히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응징해야 할 것이옵니다."

   선덕여왕은 자신의 아들과도 같은 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낸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일이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춘추를 보내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을......'

   선덕여왕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춘추는 나의 분신과 다름이 없소.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춘추를 구하고 싶으나, 이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 그럴 수가 없구려."

   "지금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태왕을 시해하고 새 태왕을 세운 직후라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중에 있으니, 군대를 내어 평양성으로 진격한다면, 필시 전쟁을 꺼려 춘추공을 귀환시킬 것이옵니다."

   선덕여왕은 한동안 고심하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 나라의 명운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

   경외병 1만 기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에 이른 유신은 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내 듣건대, 열사는 나라의 위태함을 보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다고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재상이신 춘추공께서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억류되어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열사의 의지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히 싸운다면 한 사람이 능히 백 명을 당해낼 수 있거늘, 무엇이 두렵겠는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나를 따르라!"

   유신의 말이 끝나자, 병사들이 창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소인들 죽기를 각오하고 장군을 따르겠나이다!"

   고구려 국경을 넘어선 신라군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성루에서 이를 본 고구려 파수장이 고구려 동남변의 국경을 수비하는 장수에게 전령병을 보냈다.

   "신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옵니다. 저들의 기세를 당해내기 힘들 듯하오니, 속히 후퇴하여 원병을 청하소서."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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