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고타소야, 너를 가슴에 묻는다!

조정우 2013. 3. 8. 10: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역사소설


   고타소야 고타소야, 너를 가슴에 묻는다!



   이 무렵 백제의 의자왕은 고타소의 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와 왠지 신비감마저 느껴지는 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 은근히 고타소를 설득하고 있었다. 고타소는 품석이 살아 있을 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결을 결심하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의자왕으로부터 백제에서 살면 어떠냐는 회유가 시작되자 어쩌면 의자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타소는 일부러 생각할 말미를 달라며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어느덧 고타소에게 안달이 난 의자왕은 고타소를 별궁으로 옮기고 시녀들로 하여금 극진히 모시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자왕은 술이 취해 고타소가 있는 별궁을 찾았다.

   “내 너를 이 백제의 우왕후로 삼을 생각이니, 오늘 밤 내 처소에 들라. 그리하겠느냐?”

  “신라와 백제는 본디 한 민족이온데, 이처럼 원수국이 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옵니다. 저를 왕후에 봉하시면 신라와 백제 양국에 평화의 가교가 되는 일이오니, 양국의 큰 경사가 될 것이오며, 백제와의 평화를 원하셨던 저의 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고타소의 말에 의자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밤, 고타소는 화장을 곱게 하고 의자왕의 처소에 들었다. 어려서부터 미색이 출중했던 고타소는 이제 열여덟 살, 절정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백옥 같은 피부에 별빛 같은 눈망울하며, 앵두 같은 입술, 부드러운 섬섬옥수는 아름답다 못해 고혹적이었다. 의자왕은 혼이 나간 듯 고타소를 품에 안았다. 고타소는 최대한 의자왕을 안심시킨 후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려고 했으나 침소로 들기 전, 욕통에서 목욕할 때부터 시중을 들며 감시하는 시녀들 때문에 비수를 감추는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폐하, 불을 꺼주시옵소서.”

   “아니다. 내 너처럼 아름다운 몸을 본 적이 없구나. 불을 끄지 않고 너를 품을 것이다.”

   “그러시다면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소녀는 이미 폐하의 것이옵니다.”

   (중략)

   이미 늦게까지 마신 술에 취한 의자왕은 고타소를 밤 깊도록 품은 후 기가 빠져 한숨을 토해내며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의자왕이 잠이 들었다고 생각되자, 고타소는 잠자리에 들 때 머리에서 뽑아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옥비녀를 쥐었다. 옥비녀를 잠자고 있는 의자왕의 목에 정확히 찔러 넣을 수만 있다면 단박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불도 켜져 있는 터라 천우신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옥비녀를 힘주어 쥔 고타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의자왕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고타소가 두 손으로 옥비녀를 부여잡고 있는 힘을 다해 의자왕의 목을 내리찍었다. ‘하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불과 하얀 요에 의자왕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옥비녀는 의자왕의 숨통을 빗나가고 말았다. 목에 큰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치명적이진 못했던 것이다.

  “이 요망한 계집!”

   갑작스런 소란에 호위병사들이 왕의 처소로 몰려왔다. 의자왕은 피가 흐르는 목을 손으로 부여잡은 채 극도로 분노하여 호위병에게 명을 내렸다.

   “이 계집을 당장 끌어내어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라!”

   호위병들이 끌고 나가는 순간, 고타소는 발악을 하며 악을 썼다.

   “의자야, 네 이놈, 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를 저주할 것이다!”

   고타소가 몸부림을 치며 악을 쓰자 호위병들은 고타소의 팔을 무자비하게 꺾고, 머리채를 잡고는 끌고 나갔다.

   신라의 왕족이자, 후에 태종무열왕이 된 춘추가 가장 사랑했던 딸 고타소는 이렇게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속옷 바람으로 끌려가 사지가 잘리고 목이 베이고 말았다.


   감옥에 갇힌 지 60일째, 이미 죽음을 각오한 춘추는 딸 고타소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어린 고타소는 설화를 좋아하여 춘추는 고타소를 무릎에 앉힌 후 삼국 각지에 떠돌아다니는 설화를 이야기해주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춘추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던 고타소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순간, 고타소가 귀토지설설화를 듣다가 재미있다며 손뼉 치던 모습이 춘추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렇다. 나 또한 토끼가 거북과 용왕을 속였듯이 임기응변으로 나 자신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

   춘추는 옥졸을 불러 말했다.

   "여보시오. , 선도해 대형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나의 뜻을 대형께 전해주시오."

   옥졸의 말을 전해들은 선도해가 감옥으로 와서 춘추를 면회하였다. 선도해는 보장태왕의 외삼촌으로 얼마 전에 춘추에게 비단 300필을 선물 받았기 때문에 춘추의 부름에 응해주었다.

   "춘추공께서 내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니,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할 생각이 있으신 게요?"

   "바로 그렇소. 나를 석방하여 주시면 반드시 우리 임금을 설득하여 죽령과 마립현을 반환토록 하겠소. 태왕을 알현하게 해주시오."

   "좋소이다."

   선도해의 주선으로 보장태왕을 알현한 춘추는 신라로 돌아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였다.

   "죽령과 마립현은 본시 대국의 영토인데 아국이 침탈한 것이오니, 태왕께서 소신을 귀환시켜 주신다면 우리 주상을 설득하여 반환토록 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겠나이다."

   그 무렵 연개소문은 신라에 있던 밀정으로부터 춘추를 구하기 위해 유신이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그간의 전쟁으로 유신이란 이름은 가히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십수년 전 유신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는 연개소문으로서는 유신이란 인물의 크기가 태산과 같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유신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건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당과 첨예한 대치를 이루고 있는데다, 지난겨울 대신들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5부 귀족들의 반발이 거센 이때에 신라와 전면전을 한다는 것은 고구려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때에 마침 춘추의 의사를 전해 들은 연개소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춘추의 맹세를 들은 보장태왕은 크게 기뻐하며 시종장에게 춘추를 신라로 전송할 것을 명하였다.

   유신이 이끄는 1만의 결사대가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때, 멀리서 한 떼의 군마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유신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방진(사각형 모양으로 진영을 구축하는 진법)을 펼쳐라!"

   방진을 구축한 신라군의 진영에서 궁수들이 맨 앞 열에 나서 시위를 겨누자, 백기를 든 병사 하나가 말을 몰아 달려오며 외쳤다.

   "쏘지 마시오! 우리는 신라의 사신단을 국경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고구려 병사들이오."

   그때 춘추가 수십 명의 수행원들과 수백 명의 고구려 병사들과 함께 말을 몰아 나타났다. 유신은 혹시라도 복병이 있을까봐 병사들에게 전투태세를 명한 후 춘추를 맞이하였다. 말에서 내린 춘추가 유신을 보며 반갑게 인사하였다.

   "유신공, 공을 적국에서 이렇게 뵈니, 반갑기 그지없구려."

   "춘추공, 무사하시어 참으로 다행이오. 어찌 나오신 것이오?"

   "귀토지설의 설화를 이용하여 고구려왕을 속인 것이오."

   춘추는 유신에게 선도해와 보장태왕을 속인 일을 이야기하였다. 유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공께서 토끼처럼 꾀를 내어 고구려 왕을 속이셨구려. 공께서 조금만 늦으셨더라면 전쟁이 일어날 뻔하였소."

   “고맙소, 공께서 이리도 나를 생각하여 출병했으니, 틀림없이 고구려도 위협을 느꼈을 게요.”

   춘추의 사신단 일행이 유신에게 인도된 후 고구려 병사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고구려 병사들이 종적을 감추자, 유신은 결사대를 이끌고 춘추의 사신단 일행을 호위하여 서라벌로 향했다.

   서라벌에 도착한 춘추는 백제의 사비성에서 군졸 행세를 하다 넘어온 밀정으로부터 청  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신의 딸 고타소가 사비성까지 끌려가 천하의 호색한으로 소문난 의자왕에게 능욕을 당한 후 사지가 잘리는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춘추는 밀정에게 자초지정을 자세히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틀림없사옵니다. 의자왕의 잠자리에 끌려간 궁주께서 날도 밝기 전에 속옷만 걸친 채 끌려나와 끔찍하게 참수당하고 말았사옵니다. 사비성 군졸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사옵고, 소인이 분명 이 두 눈으로 궁주의 시신이 들려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사옵니다.”

   춘추는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이놈…… 의자…… 내 반드시 백제를 멸망시켜 네 간을 씹어 먹으리라……

   분에 못 이겨 눈앞에 보이는 탁자와 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밀쳐대던 춘추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무서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한동안 절규하던 춘추의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더니 핏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네 이놈 의자…… 내 반드시 이 원한을 갚아주리라…… 고타소야, 고타소야…… 이 아비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 너를 대야성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데…… 이 아비가 너를 사지로 몰았구나. 미안하다, 고타소야……

   어려서 어미를 잃었고, 커서는 시집간 지 여섯 달 만에 눈앞에서 낭군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아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적국까지 끌려가 철전지 원수인 의자왕에게 능욕을 당하고 끔찍한 참형에 처해진 열여덟의 꽃다운 자신의 딸 고타소에 대한 미안함에 춘추는 오열하고 또 오열하였다.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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