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비담의 난 (상)

조정우 2013. 3. 18. 00: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장편소설


특별회 - 비담의 난 (상)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밤, 춘추는 말을 거세게 몰아 월성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병세가 위독해진 선덕여왕이 후사를 부탁하기 위해 춘추에게 황급히 입궁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처소에 들어선 춘추는 쏟아질 듯한 눈물을 참으며 인사를 올렸다.

"소질, 춘추가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나이다."

선덕여왕은 자리에 누운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춘추야, 내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불렀느니라."

"나라의 지존이신 폐하께서 소신에게 부탁이라니, 당치 아니하나이다. 하명만 하옵소서."

선덕여왕은 가늘게 숨을 내쉬며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 본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정사를 돌보려 하였으나, 이미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진덕을 태자에 봉하여 대리청정토록 하려 하니, 네가 진덕을 잘 보필해다오."

자신을 혈육처럼 아끼던 선덕여왕이 진덕을 태자에 봉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춘추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선덕여왕에게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신, 신명을 바쳐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실은 내, 오래전부터 너에게 보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만, 작금에 와서 진덕을 태자에 봉하는 이유를 알겠느냐?"

춘추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신하는 폐하의 명을 받들 뿐, 어찌 감히 이유를 논할 수 있겠나이까?"

선덕여왕은 춘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춘추야, 너는 나의 분신과도 같으니라. 헌데도 진덕에게 태자의 위를 물려주는 이유는 네가 복수에 눈이 어두워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춘추는 그때서야 선덕여왕이 자신이 아닌 진덕에게 보위를 물려주려는 이유를 깨달았다. 고타소가 죽은 후, 지난 수년 간 복수에 혈안이 되어 살아왔던 춘추였다. 국가의 안위와 평화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선덕여왕이 이러한 춘추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폐하께 근심을 끼쳐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춘추야, 부디 네 마음속에 사무쳐 있는 원한을 잊도록 하거라.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은 무릇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정미년(647) 정월 초하루, 조정의 백관들이 선덕여왕에게 신년 하례를 올리기 위해 조원전에 모여들고 있었다. 신년 하례 행사가 예정된 오시가 되자, 시중 금강이 들어와 선덕여왕의 병으로 신년 하례가 취소되었음을 알린 후, 선덕여왕이 내린 조서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내렸다.

"짐이 옥체에 변고가 생겨 나라의 정사를 돌보기 어려운 까닭에 진덕궁주를 태자로 임명함과 동시에, 섭정에 임명하여 대리청정토록 할 터인즉, 백관들은 모두 충심을 다해 태자를 보필토록 하라."

선덕여왕이 정사를 돌보기 어려울 정도로 옥체에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춘추가 아닌 여자인 진덕이 태자와 동시에 섭정에 오르리라는 것이 알려지자 조원전은 백관들의 탄성으로 술렁였다. 시중 금강의 말이 이어졌다.

"섭정에 임명되신 태자마마께서 곧 여기 조원전에서 대전회의를 주관하실 터이니, 백관들은 모두 대기하고 계시오."

얼마 후, 진덕이 조원전 안으로 들어와 대전회의를 주관하였다.

"부족한 몸으로 섭정이 되어 나라의 정사를 돌봐야 하니, 마음이 심히 무겁소. 지금 백제와 고구려가 손을 잡고 하루가 멀게 침략을 일삼아 나라가 국난에 처하여 있으니, 나라의 대신인 경들은 마땅히 신명을 바쳐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오. 또한 부족한 이 몸이 나라의 정사를 그르치지 아니하도록 바른 말을 아끼지 말기를 바라오."

대전회의가 끝난 후 백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궁을 나섰지만, 상대등 비담은 신궁에 있는 진지왕의 영전을 찾아갔다. 비담은 진지왕의 영전에 향을 피운 후 눈물을 글썽이며 큰 절을 올렸다.

"아바마마, 불효막심한 소자 비담이 아바마마의 영전을 찾아왔나이다." (중략)


10년 전, 비담의 고모 태양공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비담을 불러 말했다.

"선왕(진지왕)께서 행음을 일삼아 폐위되셨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선왕께서는 누구보다 인자한 분이셨다. 모든 것이 미실궁주가 꾸민 일이었다. 어마마마(사도태후)께서 선왕을 폐위하신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때 화랑도의 낭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미실궁주가 화랑도를 앞세워 정변을 일으켜 선왕을 폐위시켰던 것이다. 어마마마께서는 조카인 미실궁주를 친딸처럼 총애하시어 화랑도의 낭정을 맡겼거늘, 그것이 화를 부를 줄이야......"

진지왕이 미실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비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담은 여태껏 진지왕이 행음을 일삼아 진지왕의 모후 사도태후에 의해 폐위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녕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태양공주는 눈을 감은 채 68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 미실궁주는 자신의 낭군인 세종전군을 보위에 내세우고자 하였다. 허나 태상태후마마(지소태후)께서 극렬히 반대하시어 미실궁주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천하의 미실도 물러서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게지. 효성이 지극한 세종전군께서 어찌 감히 자신의 모후인 태상태후마마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 결국 미실은 겨우 열세 살인 어마마마의 손자이신 선대왕(진평왕)을 보위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된 비담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헌데 어찌 여태껏 그 누구도 소질에게 말씀해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오래전, 고모님께서는 분명 아바마마께서 정치를 잘못하셔서 할마마마께서 조서를 내려 폐위하셨다 말씀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어찌 이 소질에게 거짓을 말하셨나이까?"

태양공주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어마마마께서 내게 미실의 정변에 대한 모든 일을 무덤에 갈 때까지 함구하라 엄명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어마마마께서는 또 다시 조정에 변란이 일어나 구륜 오라버니마저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셨던 것이다. 하여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나를 불러 특별히 신신당부하셨다. 헌데 내 어찌 어마마마의 뜻을 거역할 수 있었겠느냐?"

비담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주먹으로 땅을 치며 말했다.

"누구이옵니까? 미실의 정변에 동참하였던 자들이 누구이옵니까? 그들을 발본색원하여 반드시 아바마마의 피맺힌 원한을 풀고야 말겠사옵니다."

태양공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된다. 묻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네 조모이신 태상태후마마의 뜻이니라. 내가 너에게 진실을 말한 것은 선왕의 아들인 너라도 진실을 알아야 선왕께서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말한 것이었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날 이 고모의 부탁을 부디 저버리지 말아다오."

그 말을 남긴 후 태양공주는 세상을 떠났다. 그날, 아버지 진지왕이 미실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던 사실을 알게 된 후 비담은 원한과 함께 대의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아바마마, 소자 기필코 아바마마의 피맺힌 한을 갚겠나이다!"

진지왕의 영전에서 나온 비담은 태후전을 찾았다.

"상대등 비담이 태후마마를 알현하나이다."

"상대등께서 정월 초하루부터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오?"

"태후마마께 긴밀히 상의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나이다."

승만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해보시오."

"오늘 성상께서 대전회의에서 조서를 내려 진덕궁주를 섭정에 봉하셨사옵니다. 성상께서 대신들과는 상의하지도 아니하시고 독단으로 결정하신 일이라, 대신들의 반발이 예사롭지 아니한 듯하오니, 이제 태후마마께서 나서주시기를 간청드리나이다."

비담은 아버지 진지왕이 미실의 정변으로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품어왔는데, 지난겨울 상대등에 오른 후 자신의 양아들 보로를 왕위에 세우고자 하는 승만태후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승만태후가 정변이 실패할까봐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비담은 무릎을 꿇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태후마마, 비록 성상께서 이 나라의 지존이시긴 하나, 잘못된 정치를 하면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우리나라가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침략으로 국난에 처한 이때, 여자인 진덕궁주를 보위에 세운다면 백제와 고구려 양국이 우리나라를 얕잡아보고 침략할 것이 명약관화하오니, 바라건대 성상의 잘못된 결정을 태후마마께서 나서시어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승만태후는 오랜 망설임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여주께서 독단으로 세우신 진덕궁주를 폐하고, 영명한 왕손을 왕위에 세워주시기 바라옵니다."

"경의 생각을 말씀해보시오. 누구를 내세우는 것이 좋겠소?"

"태후마마의 양자이신 보로전군께서 대통을 잇는 것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소신들 모두 보로전군께서 대통을 이으시기를 바라오나, 태후마마께서 마음에 두신 왕손이 있으시오면 태후마마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대신들의 공론이 그러하다면 나 또한 공론을 따르고자 하오. 어미가 어찌 자식이 대통을 잇는 일을 마다할 수 있겠소?"

"태후마마께서 뜻을 정하셨다면 소신들은 신명을 바쳐 태후마마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승만태후는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성상께서 붕어하신다면 즉시 조서를 내려 보로를 보위에 세우도록 하겠소."

다음 날, 신라 전역에 봉화가 피어올랐다.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 2만 기가 신라의 가혜성에 이르렀던 것이다. 섭정이 되어 선덕여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고 있는 진덕은 이 소식을 듣자 대장군 유신에게 명을 내려 가혜성을 구원토록 하였다.

유신이 군대를 이끌고 도성을 떠난 지 닷새가 되는 저녁 무렵, 선덕여왕은 두 달째 자신을 간병하느라 얼굴이 초췌해진 춘추를 보며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

"춘추야, 나는 이제 많이 괜찮아졌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서 쉬도록 하거라."

춘추가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께서 위중하시온데, 소질이 어찌 폐하의 곁을 떠날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께서 쾌차하옵시면 떠나겠나이다."

선덕여왕은 춘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 참으로 갸륵하구나. 내 이승을 떠난다 하여도 그 마음을 결코 잊지 아니할 것이다."

선덕여왕의 말을 들은 춘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약한 말씀 마시옵고, 부디 힘을 내소서."

선덕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 너를 봐서라도 힘을 내마. 너무 심려치 말거라."

이때,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장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변란이 일어난 듯하옵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월성 안으로 들어와 시위들과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 하옵니다."

선덕여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누가 반란을 일으켰단 말이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직 확인된 바가 없사옵니다."

잠시 후, 호위대장 대학열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상대등 비담과 소판 염종이 반역을 일으켜 경사병을 이끌고 대궁으로 쳐들어 왔사옵니다."

선덕여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이 나라의 수장인 비담공이 반란을 일으켰다...... 틀림없는 사실이냐?"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비담이 앞장서서 시위들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있다 하옵니다."

춘추가 크게 탄식했다.

"숙부께서 반란을 주동하시다니, 어찌......"

그때, 진덕이 창백한 얼굴이 되어 호위병사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비담이 병사들을 이끌고 대전으로 오고 있사오니, 속히 별당으로 몸을 피하소서."

신라의 주력군인 경외병이 가혜성으로 원병을 떠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이 자신의 관할인 경사병 1만 기를 동원하여 대궁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칠숙의 난 때만해도 경사병은 5천 기에 불과했는데, 백제의 계속되는 침략으로 경사병을 두 배로 늘인 것이 화근이었다. 선덕여왕은 고개를 흔들며 결연한 표정으로 진덕과 춘추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 나라의 왕인 내가 어찌 대전을 떠날 수 있겠느냐? 나의 명줄이 붙어 있는 한 대전을 지킬 것이다. 너희들은 시위들을 이끌고 남산신성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기약하거라. 남산신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니, 병사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운다면 대군이 침입한다 하여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서 남산신성을 사수토록 하거라."

춘추는 고개를 가로저은 후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질이 어찌 폐하의 곁을 떠날 수 있겠나이까? 소질, 목숨을 바쳐 폐하의 곁을 지키겠나이다."

춘추에 이어 진덕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녀 또한 목숨을 바쳐 폐하를 지키겠나이다. 폐하의 곁을 결단코 떠날 수 없나이다."

선덕여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꾸나!"

이때 새주(옥새를 관리하는 직책) 보량이 호위병사 수십 명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신첩 보량이 목숨을 걸고 폐하를 지켜드리고자 왔나이다."

선덕여왕은 보량을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말했다.

"보량아, 참으로 고맙구나!"

병장기와 함성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춘추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용상에 걸쳐져 있는 용포를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 소질에게 좋은 방책이 있사옵니다. 소질에게 용포를 하사하시오면 시녀에게 용포를 입혀 저들을 대궁 밖으로 유인하겠사옵니다. 그 사이 태자마마께서는 반도들을 대궁 밖으로 몰아내소서."

진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은 예원과 선품이 지키고 있으니, 너의 계책이 성공한다면 충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너무 위험한 방책이 아니냐?"

춘추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궁에서 역도들을 막는 것보다 훨씬 안전한 계책이오니, 심려치 마소서."

진덕이 춘추에게 말했다.

"하늘이 너를 보우하시길 기도하겠다."

춘추는 진덕에게 당부했다.

"제가 병사들과 함께 후문을 빠져나가면 태자마마께서는 시위들을 대전 안으로 들여 시위들이 후문으로 나간 것처럼 보이도록 하소서. 그리하면 역도들의 눈을 속이기 용이할 것이옵니다."

"알겠다. 헌데 병력은 어느 정도 거느리고 나갈 생각이냐? 지금 대궁에서 폐하를 따르는 시위들은 이천쯤 되는데, 역도들을 유인하려면 일천 기는 필요하지 아니하겠느냐?"

"어두운 밤이라 수백 기면 족할 듯하옵니다."

병장기 소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춘추는 시녀들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너희들 중 폐하의 용포를 입고 역도들을 유인할 자가 없느냐?"

춘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량이 나섰다.

"제가 역도들을 유인하겠사옵니다. 춘추공께서는 여기서 폐하를 지키소서."

"보량궁주, 아니되오."

"첩은 남산의 지리를 잘 아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보량궁주, 허나......"

보량은 춘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용포를 들고 처소 밖으로 나가버렸다.

보량이 수백의 시위들을 이끌고 후문을 나서려고 할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호성장군으로 월성의 경비를 맡고 있는 군관이었다. 군관은 의형 양도의 누이 보량이 용포를 입고 수백의 시위들과 후문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비담을 유인하려는 보량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누님, 소제가 누님을 모시겠나이다."

보량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된다. 호성장군인 네가 어찌 월성 방비의 책임을 져버리려 하는 게냐?"

보량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군관은 보량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소제, 누님을 보호하라는 예원공의 명을 받았사오니, 속히 소제를 따르소서."

군관이 시위들을 이끌고 앞서 나가자, 보량은 군관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용포를 입고 가마를 탄 보량이 군관의 호위 하에 후문을 빠져나가자, 이를 본 비담의 병사들이 외쳤다.

"시위들이 폐하를 모시고 후문을 빠져나갔다!"

어두운 밤인데다 선덕여왕의 조카인 보량이 선덕여왕과 닮았기 때문에 비담의 병사들은 용포를 입은 보량을 당연히 선덕여왕으로 여긴 것이다.

대전 앞에서 시위들과 비담의 병사들 간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비담의 파수병이 비담에게 보고했다.

"호성장군 군관이 폐하를 모시고 후문을 빠져나갔다 하옵니다."

이때 비담의 병사들과 죽자 사자 싸우던 시위들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대전 안으로 철수하였다. 비담은 군관이 선덕여왕을 모시고 대궁을 탈출한 줄 알고 다급하게 외쳤다.

"시위들이 폐하를 인질로 삼아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중군은 대궁을 사수하고, 좌군과 우군은 추격하라!"

비담은 병권을 잡고 있는 병부령 춘추가 선덕여왕을 협박하여 진덕을 허수아비 섭정에 임명한 후 전권을 휘두르고 있으니, 춘추의 무리들을 제거하자며 휘하 병사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비담은 중군 4천 기를 염종에게 맡기고 좌군과 우군 6천 기를 이끌고 군관을 추격하였다.

6천에 이르는 비담군이 후문으로 물밀듯이 밀려오자, 후문을 지키던 시위들은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중과부적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담의 병사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비담이 병사들을 풀어 남산을 수색하고 있을 때,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한 마장 떨어진 숲길에서 군관의 무리들을 발견하였나이다."

"군관의 무리들이 북서쪽으로 한 마장 거리에 있다! 추격하여 모두 생포하라!"

비담의 명이 떨어지자 비담군은 북서쪽으로 향했다. 비담군이 좁은 숲길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병사들이 숲에서 뛰쳐나와 덮쳐왔다. 비담의 척후병이 본 것은 군관이 비담을 유인하기 위해 보낸 시위들이었다. 비담군을 유인한 군관은 수백 기의 시위들을 좁은 숲길에 매복시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 군관이 여기 있다! 역적의 무리들은 나의 검을 받으라!"

군관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비담군의 선봉군을 덮쳤다. 급히 추격하던 비담군이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군관이 순식간에 수십의 비담군을 베자, 비담군은 간담이 서늘해져 혼비백산하였다. 군관은 오직 보량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비담군을 베었다. 군관이 천지를 개벽시킬 듯한 용맹을 떨치자, 군관의 시위들도 용기백배하여 비담군의 진영을 무너뜨렸다. 좁은 숲길에서 군관과 시위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끝에 마침내 비담군의 선봉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비담은 퇴각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라!"

군관이 이끄는 3백 명의 시위들이 6천 명의 비담군을 이긴 것이다. 좁은 길이라는 지형적 이점도 있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하게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재 글 : 장옥정 4화 : 알라딘 창작 블로그 연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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