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

이순신 불멸의 신화, 주요 장면

조정우 2014. 10. 1. 08:00

   


    이순신 불멸의 신화 조정우 역사소설 


    주요 장면

   

   구름 한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은 날,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는 여수 해안가에 수만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검은 전립을 쓰고, 푸른 납의을 입은 1만여 병졸들의 맨 앞 열에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붉은 소매를 단 남색 철릭(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군복)을 입고, 산호주로 만든 구슬갓끈을 단 검은색 전립(군장용 모자)을 쓰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굴강(조선 시대 선박의 수리 및 정박을 목적으로 만든 굴강은 썰물 때 물이 빠지고 밀물 때 물이 차는 구조로 거북선을 건조하고 정박한 장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랑이 눈썹, 부리부리한 눈, 우뚝 솟은 코, 제비턱, 용수염의 팔척 장신의 사내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의 시선은 굴강에 정박되어 있는 거북선에 집중되었다. 때마침 밀물이 굴강 안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온통 철갑을 씌운 거북선이 햇살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귀갑 무늬의 동철을 씌운 등판은 한치의 발 디딜 틈도 없이 송곳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길이 13척, 넓이 3척인 거북선의 머리는 마치 살아있는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하여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180여명의 장졸들이 일제히 거북선에 승선했다. 이순신이 깃발을 치켜들며 외쳤다. 

   "발진하라!"

   길이 113척 (약 34 m), 폭 34척 (약10 m), 높이 21척 (약 6.3 m)의 육중한 거북선이 오색기를 펄럭이며 굴강의 입구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양옆에는 전라순철사 이광을 대신해 온 군관 남공심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서 있었다. 남공심이 굴강을 벗어나는 거북선을 찬찬히 훑어 보더니 용머리 아래에 달린 도깨비 머리 모양의 돌출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돌출부는 대체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이오?"

   "충각(뱃머리에 장착하여 적의 배를 부수는 장치)이오."

   거북선 머리 아래에 있는 도깨비 머리 모양의 반구형 돌출부는 돌격시 적군의 배에 충돌시켜 부수는 충각이었다. 남공심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철갑을 씌운 저 육중한 거북선이 제대로 앞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억기가 남공심의 말에 동의하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한 거북선은 바다 가운데로 나가자 마치 나는듯이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질주했다. 수만의 군중들이 예상을 훨씬 뛰어 넘은 거북선의 속도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남공심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 저럴 수가......"

   격군 여섯이 젓는 거대한 노를 양쪽에 여덟개씩 단 거북선은 조선의 그 어떤 배보다 속도가 빨랐다. 온통 철갑을 씌운 육중한 거북선이 이토록 빠를 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남공심은 입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며 철갑을 씌운 거북선의 등판을 가리켰다. 

    "속도는 참으로 빠르오. 허나, 이수사, 저 거북선 한척에 저토록 많은 동철을 쓰다니,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니오?"

   이순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외다. 거북선 스무 척만 있다면, 수백 척의 왜선이 쳐들어온다 한들 능히 물리칠 수 있을진데, 어찌 무모하다 할 수 있겠소?"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이순신의 초청에도 거북선 진수식에 오지 않고 부하 군관 남공심을 보냈다.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인 이광은 이순신을 철썩처럼 신임했지만, 거북선을 건조하려는 이순신의 계획 만큼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로 여겼다. 남공심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철을 씌운 육중한 거북선이 전투 중에 침몰하지 아니한다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여하튼 거북선에 대한 전라도 차원의 지원은 불가하다는 것이 순찰사 나리의 뜻이오."

    이순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 바다의 방비를 위해 거북선이 꼭 필요하니, 공이 순찰사께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하오."

    남공심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이수사의 뜻을 순찰사께 전해드리리다."

    안타까워하는 이순신의 눈빛과 마주친 이억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북선 한척에 저토록 많은 동철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판옥선과 대포를 더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이순신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밀정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축성한 나고야에 10여만의 일본군이 집결해 있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순신이 답답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적선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려면 최소한 세척의 거북선이 필요하오. 일단 거북선의 진수식을 지켜본 연후에 다시 의논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거북선은 순천부 선소, 방답진 선소, 여수 선소, 세곳에서 각각 한척씩 건조되었지만, 동철이 부족하여 겨우 여수 선소에서 지은 거북선만 등판을 비롯한 배의 윗 부분에 철갑을 씌울 수 있었다. 

    남공심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억기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일단 한번 봅시다."

   양녕대군의 4대손 이연손의 아들인 이억기는 누구보다 이순신을 아끼고 있었지만, 거북선 건조 만큼은 찬성할 수 없었다. 판옥석 수십여 척을 만드는 재정이 필요한 거북선이 침몰이라도 한다면 이순신이 그 책임을 면치 못하리라. 이억기는 이순신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순간 거북선의 입에서 천지를 진동시킬 듯한 굉음을 내며 불을 뿜었다. 

   "쾅!"

   거북선의 입에서 발포한 포탄이 해안가에 세운 목책에 적중했다. 목책이 산산히 부서졌다. 실로 엄청난 대포의 위력에 이억기가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저, 저것은 천자포가 아니오?"

   굳게 다물었던 이순신의 입가에 흐믓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렇소. 천자포가 맞소."

   구경 4치 4푼, 외경 9치 4푼, 포신 4자 5치, 무게 천근의 육중한 천자포를 배에 장작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뱃머리 앞으로 튀어 나온 길이 13척의 거북선 용머리에 천자포를 설치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쾅! 쾅!"

   거북선에서 포성이 연이어 울렸다. 천자포에 이어 지자포가 발사된 것이다. 포탄 한발에 목책이 힘없이 부서졌다. 이억기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지자포의 위력이 천자포에 못지 않구려!"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조선 수군이 개량한 지자포요."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조선 수군의 주력 대포인 지자포 개량에 힘써왔다. 무게가 천근이나 되는 천자포를 주조하는데는 한계가 있어 지자포 개량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거북선이 부두에 정박하자, 이순신은 이억기, 남공심과 함께 거북선에 올라탔다. 

    -중략-

    거북선의 병사들은 이순신과 함께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이억기는 병사들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북선이 세척만 있다면 천 척의 왜선이 온다해도 두려울 것이 없을 듯싶구나!'

   거북선에서 내려서자, 이억기가 이순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소. 내, 거북선 건조에 지원을 아끼지 아니하리다!"

   이순신이 이억기의 손을 꼭 잡았다. 

   "참으로 고맙소!"

   남공심도 마음이 바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순찰사 나리를 설득해 보리다."

   이때 군중들이 이순식 쪽으로 몰려와 만세를 외쳤다. 

   "조선 수군 만세! 조선 만세!"

   이 무렵 조선팔도에는 조만간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지만, 전라도의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전라도의 백성들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순신이 있는 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천하에 적수가 없으리라.

   -거북선 진수식-


   하늘이 유난히도 맑게 게인 여수 앞바다에서 대대적인 군사 훈련이 거행되고 있었다. 출전 준비를 마친 거북선을 중심으로 수십 척의 함선이 2열로 정자진을 펼치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푹푹 찌는 삼복더위 속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고난도의 훈련이 몇 시진 째 이어졌지만, 장졸들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순신이 대장선에서 북을 울리며 훈련을 독려하고 있을 때, 전령기를 꽂은 배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원균이 또 다시 청병을 요청해 온 것이다. 원균이 보낸 서신에 의하면 10여 척의 왜군 대함선이 사천과 곤양에 침입하여 마을을 불지르고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순신은 대장선으로 제장들을 소집하여 명을 내렸다. 

   "경상우수영이 청병을 요청해 왔다! 내일 인시 정각에 출전토록 채비하라!"

   원래 이순신은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군이 당도하면 함께 출전할 계획이었지만, 전라도의 관문인 진주성과 불과 수십리 거리인 사천에 나타난 왜군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왜군이 사천에 왜성을 쌓아 거점을 만든다면, 진주성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영마저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처소로 돌아온 이순신은 자신이 본영을 비운 사이에 왜군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기 위해 조방장 정걸을 불렀다. 올해로 일흔 아홉의 백전노장인 정걸은 판옥선을 고안한 장본인으로 조선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 다음가는 해전의 명수였다. 이순신은 정걸의 손을 공손히 잡으며 말했다. 

   "정장군, 공께서 흥양을 지켜주시면 왜군이 감히 본영을 넘보지 못할 것이외다!"

   정걸이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끄덕이며 말했다. 

   "이 노부의 명줄이 붙어있는 한, 왜군이 감히 본영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겠소!"

   정걸이 떠나자, 이순신은 군관 윤사공을 불렀다. 

   "그대를 책임 장수에 임명할 터이니, 내가 없는 동안에 본영의 수비를 맡아주시오."

   실로 뜻밖이었다. 군관에 불과한 윤사공을 전라좌수영 본영의 책임 장수로 임명할 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침묵하던 윤사공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 영감께서 소생에게 분에 넘치는 중책을 맡기셨으니, 목숨을 걸고 본영을 사수하겠소이다."

   윤사공의 말에 이순신은 마음이 놓였다.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윤사공은 육전의 명수라 수만의 왜군이 본영으로 쳐들어 온다해도 능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이때 처소 밖에서 대단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소자들이 아버님을 뵙고자 하옵니다."

   이회와 이울이 찾아온 것이다. 처소로 들어온 이회와 이울은 이순신과 윤사공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윤사공이 처소 밖으로 나가자, 이순신이 두 아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아비에게 할 말이 있느냐?"

   이회와 이울이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소자들도 아버님을 따라 이번 출전에 참여하기를 원하나이다."

   이순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수전을 아느냐?"

   전혀 예상치 못한 이순신의 물음에 이회, 이울 모두 침묵할 뿐이었다. 이순신이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수전은 육전과 달라 아무리 용맹한 장수라도 물을 알지 못하면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아니함을 모르느냐? 바다에서 훈련 한번 받지 못한 너희들이 과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겠느냐 말이다."

   이순신의 꾸짖듯한 말에 이회와 이울이 용서를 구하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회가 말했다. 

   "소자들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하오면 소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명을 내려주소서. 소자들이 목숨을 걸고 아버님의 명을 수행하겠나이다."

   이순신은 물불 안가리고 전장에 뛰어드려는 두 아들이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이순신이 두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윤군관을 잘 모시거라. 윤군관이 아비가 없는 동안에 책임 장수의 소임을 맡았으니, 너희들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윤군관을 보필해야 한다. 알겠느냐?"

   이울과 이회가 종군을 시작한 하루만에 첫번째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이회와 이울은 약속이나 한듯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아버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이회와 이울이 처소를 떠나자, 이순신은 눈을 감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부디, 온통 너희들 걱정 뿐인 아비의 마음을 알아다오."

   5월 29일 인시 정각(새벽 4시), 이순신은 거북선 1척과 판옥선 22척을 이끌고 출항했다. 세계 최초의 장갑선(겉을 철판으로 씌운 함선) 거북선이 첫 출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시(오전 9시에서 11시) 무렵에서야 원균과의 약속 장소인 노량에 이르렀다. 원균은 이미 3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균은 이몽룡, 이영남, 우치적, 기효근과 함께 대장선에 올라 이순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수사! 때마침 잘 와주었소! 왜적들이 지금 사천에서 왜성을 쌓고 있는 듯하니, 속히 공격하여 왜적들을 섬멸토록 합시다!"

   이순신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사천 앞바다로 가서 왜적들의 동태를 살펴본 연후에 작전을 세웁시다."

   원균은 이몽룡에게 눈짓을 하더니 이몽룡이 못본 척 외면하자 겸연쩍은 듯이 고개를 숙이며 이순신에게 말했다. 

   "이수사, 지난 번처럼 대포와 포병을 빌려주었으면 고맙겠소."

   원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정운이 이순신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지난 번 옥포 해전에서 경상우수영의 병사 두 명이 전라좌수영 병사 두 명과 왜군의 시신을 다투다 화살을 쏘아 중상을 입힌 바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이 전사한 왜군의 목을 베어 전공을 올리려는 원균에 대한 반감이 커진 탓에 자기 휘하의 대포를 내어주려는 장수도, 자기 휘하의 포병을 내어주려는 장수도 없었다. 이순신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지난 번에 있었던 양군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로 이번에는 대포와 포병을 지원하는 것이 어려울 듯하오. 원수사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원균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허면 장편전이라도 지원해 주셨으면 좋겠소."

   전라좌수영군과 경상우수영군의 연합 작전이 힘을 발휘하려면 어느 정도의 지원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편전(장전과 편전)이라면 얼마든 지원해 드리리다."

   노량에서 조우한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양군이 곤양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였다. 세케부네 한 척이 그야말로 쏜살처럼 사천 앞바다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순신이 장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추격하여 격침하라!"

   척후장 김완이 수 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추격했지만, 신속하게 달아나는 세케부네를 따라잡지 못했다. 사천만에 상륙한 왜군은 세케부네를 버린 채 언덕으로 달아났다. 앞장서 세케부네를 추격하던 김완이 왜군이 달아난 언덕을 바라보더니 순간 흠칫 놀라며 대장선을 향해 두 발의 신기전을 잇다라 쏘았다. 10척 이상의 왜선을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사천 해안의 언덕에는 400명 쯤 되어 보이는 왜군이 장사진을 펼친 채 조총을 들고 서 있었고, 언덕 바로 밑의 해안에는 12척의 아타케부네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중략-

   대장인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이자 부장인 도도 다카토라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이때였다. 언덕 꼭대기에 일렬로 늘어선 왜병들이 약속이나 한듯 조선의 함선을 향해 일제히 야유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네 놈이 사내 대장부라면 이리로 올라와 일대일로 싸워보자!"

   "이순신, 기다리고 있거라! 우리가 도선하여 네 놈의 목을 베어주마!"

   한때 왜구였던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병사들은 입이 거칠기로 악명이 높았다. 언덕 꼭대기에서 일본말로 목청껏 소리치는 왜군의 야유가 왜선이 늘어선 선창에서 100보 거리까지 다가온 이순신의 귀에 들려왔다. 이순신은 일본말을 몰랐지만, 왜군이 자신에게 야유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운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순신에게 말했다. 

   "수사 영감! 당장 진격 명을 내리소서! 나 정운이 저 왜놈들을 섬멸해 버리겠소!"

   이순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해안가를 가리켰다. 

   "지금은 썰물 때라 더이상 배가 접근하기 용이치 아니할 뿐더러, 설령 왜선을 모두 격침시킨다 하여도 왜적들이 언덕으로 도망쳐 왜성을 쌓아 거점을 마련한다면, 이겨도 조금도 덕이 되지 않을 것이외다."

   성미가 급한 정운이 검을 들어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면 아군이 언덕으로 올라가 왜군과 한판 붙으면 되지 않겠소이까?"

   이순신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유인책을 써야하오. 왜적들이 교만한 빛을 띠고 있으니 아군이 퇴각하면 필시 쫓아올 것이오!"

   이순신이 갑판에 있는 해시계를 바라보니 이미 밀물이 밀려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만간 밀물이 들어올 것이니, 왜적을 깊은 바다로 유인하여 일망타진하자!'  

   결단을 내린 이순신이 북을 울리며 명을 내렸다.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라!" 

   이순신이 퇴각 명을 내리자, 정운이 답답한 듯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적들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어찌 하시겠소이까?"

   이순신이 담담하게 말했다. 

   "적들이 따라오지 아니하면 밀물이 밀려 올 때 공격하면 되지 않겠소이까."

   순간 어영담이 해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곧 밀물이 들어올 듯하오!"

   정운은 이제야 이순신의 계략을 이해한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수사 영감은 정녕 해전의 신이오!"

   조선 수군이 북을 울리며 퇴각하자,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앙천대소하며 말했다. 

   "하하하, 이순신이 겁을 먹은 게로군!"

   이어 서릿발같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추격하라!" 

   이때 도도 다카토라가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아니되오! 필시 이순신의 유인책이 틀림없소!"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두눈을 부릅뜨며 호통쳤다. 

   "비키시오! 대장은 나요! 이순신이 그리 겁나거든 그대는 여기서 구경이나 하시오!"

   -중략-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검을 뽑아 든 채 바다를 바라보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썰물이 밀려오고 있으니 바다도 나의 편이다. 썰물을 타고 단한숨에 도선하여 이 검으로 너의 목을 베리라!' 

   12척의 아타케부네가 썰물을 타고 전속력으로 추격해 오자, 이순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니다. 밀물이 들어오면 일제히 공격하리라!'

    어느새 바다의 흐름이 바뀌더니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단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뱃머리를 돌려 공격하라!"

    순간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이순신이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

   썰물을 타고 나아가 이순신의 대장선을 집중 공격하려는 것이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전략이었다. 앞머리에 대포 2문을 장착한 12척의 거대한 아케다부네가 일제히 썰물을 타고 진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썰물이 밀물로 바뀌며 전략에 차질이 생기고 만 것이다. 조선 함선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자,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오기가 생겨 이를 갈며 외쳤다.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대장선을 집중 공격하라!"

    이순신은 전속력으로 노를 저어 진격해 오는 아카네부네를 바라보며 외쳤다. 

    "2열로 정자진을 펼쳐라!"

    26척의 조선 함선은 2열로 정자진을 펼쳤다. 

    "좌현으로 회전하라!"

    순식간에 조선 함선은 좌현으로 회전하였다. 아카네부네가 60보 거리까지 다가오는 순간, 이순신이 장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일렬, 발포하라!"

   조선 수군의 정자진 일렬에 있는 판옥선에서 백여 문의 대포가 천지를 진동시킬듯한 굉음을 내며 불을 뿜었다. 앞장서 돌진하며 대포를 쏘던 세척의 아카네부네가 화염에 휩싸였다.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절규하듯 외쳤다. 

    "돌진하라! 50보 거리 안으로 다가가란 말이다!" 

   수 척의 아카네부네가 조선 수군의 진영에서 50보 안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이순신이 다시 외쳤다. 

    "이열, 발포하라!"

   이열에 있는 판옥선에서 백여 문의 대포가 요란한 포성을 울리며 불을 뿜자 두 척의 아카네부네가 침몰했다. 

    "퇴각하라!"

    퇴각 명을 내린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분한 나머지 가슴을 치며 괴성을 질렀다. 

    "아! 이순신! 내가 이 놈한테 당했구나!"

    7척의 아카네부네가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는 순간 이순신의 눈이 거북선을 향했다. 이순신이 눈빛을 번뜩이며 외쳤다. 

    "거북선은 돌격하라!" 

    이순신의 명이 떨어지자, 수 척의 판옥선 뒤에 가려 있던 거북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북선의 돌격장 이언량이 외쳤다. 

    "적진으로 돌격하라!"

    괴상한 모양의 거북선이 쏜살처럼 돌진하자, 왜군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악! 이 한마디 외에 왜군의 공포를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으리라!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생긴 무시무시한 용머리에서 포성을 울리며 불을 뿜는 것이 아닌가! 거북선은 밀물을 타고 마치 물만난 물고기처럼 전속력으로 퇴각하는 아타케부네를 추격하였다. 어느새 거북선이 50보 안으로 돌격해 들어오자,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호승심이 불처럼 일어났다. 

   "용선이 50보 안에 있다. 뱃머리를 돌려 조총으로 집중 사격하라!" 

   용선을 집중 사격하라는 대장의 명에 아카네부네가 뱃머리를 돌렸다. 

   "탕! 탕! 탕!" 

   수백 명의 조총수들이 거북선에 집중 사격을 가했지만, 총알은 거북선에 씌운 철갑에 맞고 튕겨나가고 말았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왜의 조총수들이 거북선을 집중 사격했지만 총소리만 요란할 뿐 끄덕도 하지 않았다. 순간 거북선이 아카네부네 한 척을 향해 돌진하여 도깨비 머리 모양의 충각으로 박아버리고 말았다. 

    "쾅!"

   거북선의 충각에 부딛친 아카네부네는 뱃전이 부서져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실로 엄청난 거북선의 위력에 왜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하지만 구루시마 미치유키는 거북선만 침몰시켜도 큰 공을 세우는 것이라는 생각에 거북선을 가리키며 사격 명을 내렸다. 

   "용선을 집중 사격하라!"

   왜군의 계속되는 집중 사격에도 거북선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거북선에 철갑이 씌여 있음을 깨달은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새로운 명을 내렸다.

    "용선에 도선하라!" 

    거북선에 다가간 아카네부네에서 수십 명의 왜군이 뛰어내리는 순간,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거적이 덮여 있는 거북선의 등판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송곳이 빼곡히 박혀 있었던 것이다.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다시 퇴각 명을 내렸다. 

    "퇴각하라!" 

    "모두 추격하라!" 

    이순신의 명에 26척의 판옥선이 정자진을 펼치며 퇴각하는 5척의 아카네부네를 추격했다. 그때 조선인 포로를 가득 태운 아카네부네 한 척이 조선 진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선인 포로를 총알받이로 내세운 것이리라. 이순신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왜군을 모두 추격하여 섬멸하라!" 

   바로 그때였다.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검으로 이순신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자가 이순신이다! 집중 사격하라!" 

   순간 사방에서 총성이 울렸다. 

   "윽!"

   이순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총탄 하나가 이순신의 어깨를 뚫어버리고 만 것이다. 

    "장군!" 

    -중략-

    대장선이 조총의 사정 거리 밖으로 물러나자,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뭣들 하느냐? 돌진하라! 저 이순신을 집중 사격하란 말이다!"

   아카네부네 5척이 대장선을 향해 돌진해 오자, 이순신이 눈빛을 번뜩이며 명을 내렸다. 

   "정자진으로 적선을 포위하라!"

   어느새 정자진을 펼친 조선 함선이 5척의 아카네부네의 퇴로를 막고 포위했다. 이미 이순신의 갑옷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이순신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이순신이 간신히 신음을 참으며 외쳤다. 

    "발포하라!"

    "으악!"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대장선이 조선 수군의 집중 포격에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조선 수군에 포위당한 아카네부네 5척이 순식간에 격침되고 말았다.

     -사천해전-

   

   이순신이 파직되어 백의종군에 처하게 되었다는 요시라의 보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릎을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이순신 뿐이거늘, 조선의 왕이 스스로 자신의 손발을 자른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한바탕 너털웃음을 쏟아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돌연 의미심장한 얼굴로 요시라를 보며 말했다. 

   "자네의 공이 실로 크나 이순신이 살아있는 한 안심할 수 없다! 이순신을 죽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이란 말이다! 이순신을 죽이면, 내 너를 영주에 봉하겠다! 알겠느냐?"

   영주에 봉하겠다는 말에 요시라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마를 쿵하고 바닥에 찧으며 큰 절을 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순신의 목숨은 소신의 세치 혀에 달린 것이나 다름없사오니, 소신에게 맡겨주소서."

   대마도 출신의 장사꾼인 요시라는 온갖 감언이설로 김응서를 비롯한 장수들과 서인 동인 할 것 없이 조선의 대신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요시라는 자신이 항왜(조선에 귀순한 일본인)임을 자처하여 조선에 충성할 것을 거짓으로 맹세하여 선조마저 요시라의 말이라면 팥으로 매주를 쑨다 하여도 철석처럼 믿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자네만 믿겠네."


   이순신이 떠난 한산도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비옥했던 둔전은 황량해져 갔고, 민심은 날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이순신이 파직당한 후 권준, 정걸, 입부 이순신, 송희립, 정경달, 이봉수, 나대용, 이언량, 이기남 등의 유능한 장수마저 사직하고 한산도를 떠났다. 삼도 수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천하무적이었던 예전의 위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7월 3일, 원균은 술을 마시며 날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 전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조정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곤장 50대를 맞은 원균은 술잔을 들이키며 분통을 삭히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몇 차례나 조정이 선전관을 파견하여 부산포로 출전하라 재촉했지만, 원균이 함대를 움직이지 않자 권율이 한산도로 찾아와 원균에게 장형을 내린 것이다. 연신 술잔을 들이키던 원균이 돌연 탄식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아! 내가 이순신의 전철을 그대로 밞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산포로 출전하지 아니하면, 결국 파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달포 전, 조정은 요시라로부터 대마도에 대기 중인 일본의 10만 대군이 조만간 부산포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는 조선 수군을 부산포로 유인하려는 요시라의 속임수였지만, 조정은 요시라의 말만 믿고 원균에게 부산포로 출전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었다. 원균은 장형을 당한 사실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원균이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부산포로 가자! 왜적들에게 조선 수군의 위용을 보여주마!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마!"

  날이 저물 무렵, 마침내 원균이 명을 내렸다.

  "내일 새벽에 출전한다! 부산포로 진격할 참이니, 오늘밤까지 채비토록 하라!" 

   7월 4일 새벽, 원균은 200여 척의 함선에 2만에 이르는 조선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항했다. 때마침 닥친 장마 탓에 조선 수군은 닷새 후인 7월 9일에서야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였다. 척후병이 원균을 향해 외쳤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선이 출몰했사옵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왜선이 까마득하게 몰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절영도(부산포 앞바다의 섬)에 무려 1000여 척의 왜선이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의 함대에 주눅이 든 원균은 다급히 퇴각 명을 내렸다. 

   "가덕도로 퇴각하라!"

   때마침 거센 역풍이 불어와 조선 수군은 녹초가 되도록 노를 재촉하여 반나절 만에 가덕도에 당도했다.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400여 명의 병사가 해안가에 상륙하여 물을 기르고 있을 때, 사방에서 산천을 뒤흔들듯한 총소리가 울렸다. 

   "탕! 탕! 탕!"

   수천에 이르는 왜의 조총수들이 이곳 가덕도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균은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즉시 퇴각하라!"

   원균은 물을 길던 400여 명의 병사를 버려둔 채 함선을 수습하여 견내량을 향해 퇴각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새벽에 견내량에 당도한 조선 수군이 해안가에 상륙할 무렵이었다. 또 다시 사방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탕! 탕! 탕!"

   견내량에서도 왜군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캄캄한 새벽이라 왜군의 규모를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원균은 급히 명을 내렸다. 

   "퇴각하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해보고 퇴각하기에 바빴다. 전례없는 연전연승으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던 조선 수군이 이토록 허무하게 연전연패를 당할 줄이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급히 철천량으로 퇴각한 후 5일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머물렀다. 이대로 한산도로 귀환한다면 파직을 면할 길이 없기에 칠천량에 200여 척의 함선을 정박시킨 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6일 칠흑처럼 어두운 새벽, 칠천량은 이미 1000여 척의 왜선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해상의 퇴로가 완전히 봉쇄된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원균은 대장선의 누각에서 날이 새도록 술에 대취하여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순신보다 못한 게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이래뵈도 바로 며칠 전 부산포로 진격했단 말이다! 이순신이라면 죽었다 깨도 부산포로 진격할 수 없을게야. 나 원균이 담력 하나는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단 말이다! 왜놈들이 쥐새끼처럼 여기저기 매복하여 당했을 뿐, 이 원균이 왜놈들의 잔꾀에 당할 사람인가 말이다!"

   이때였다. 척후장 김완이 다급히 누각 안으로 들어왔다. 

   "통제사 대감! 왜적들이 칠천량을 겹겹이 포위하였소! 속히 포위를 뚫고 나가야 하오!"

   원균은 술기운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검을 뽑아 들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잘되었군! 왜적들이 오면 이 검으로 모조리 배어버리라!"

   사방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들려오자, 그제야 원균은 제 정신으로 돌아와 갑판으로 나가 허겁지겁 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대포를 쏘며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라!"

   조선 수군이 미처 대포에 포탄을 장착할 겨를도 없이 왜군이 갈고리를 걸어 도선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속하기 짝이 없는 기습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원균의 뇌리에 거북선이 떠올랐다. 원균은 깜빡 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거북선이 있지!"

   원균이 급히 명을 내렸다. 

   "거북선은 출격하여 퇴로를 뚫으라!" 

   원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균의 아들 원사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북선이 모두 노가 부러져 출격할 수가 없다 하옵니다!"

   원균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라! 거북선이 노가 부러졌다고! 전부 다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미 수십 척의 아타케부네가 지척에서 5척의 거북선을 둘러싸 대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빗발치듯한 포탄에 거북선의 거대한 노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던 것이다. 원사웅이 절망하듯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해상의 퇴로가 막혔으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퇴각하는 수 밖에 없을 듯하옵니다!"

   이때 수백 수천의 왜군이 대장선에 갈고리와 사다리를 걸어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이 칠천량의 싸움에 무려 1000여 척의 왜선과 10만에 이르는 대군이 동원되었다. 마침내 원균은 숲속을 가리키며 육지로 퇴각하라 명을 내리고 말았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퇴각한다!" 

   이때 순천부사 우치적이 원균의 앞을 가로막으며 만류했다. 

   "수군이 배를 버리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이 없사옵니다! 명을 거두소서!"

   우치적을 외면한 원균은 원사웅과 휘하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대장선을 버리고 육지로 퇴각했다. 대장인 원균이 육지로 퇴각하자, 장수 병사 너 나 할 것 없이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원균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숲속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탕! 탕! 탕!"

   이미 수만에 이르는 왜의 육군이 칠천량 해안의 숲속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왜군의 총소리와 조선 수군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원균은 크게 탄식했다. 

   "이! 이순신이 대장이었을 때 조선 수군은 천하무적이었거늘, 나 원균이 조선 수군을 망치고 이리도 허망하게 죽는구나!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 아닌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