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총아 2화 조정우 무협소설

조정우 2014. 11. 20. 06:00

   왕총아 2화 조정우 무협소설

   

   얼마나 달렸을까. 두 모녀는 손을 꼭 잡은 채 숲이 울창한 산속으로 내달리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한 숲에 이르자, 약속이나 한듯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가 시야를 가린 면사포를 벗겨내자, 마치 백옥처럼 하얗고 고운 천하절색의 얼굴이 드러났다. 열여섯 쯤 되었을까. 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를 근심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님! 괜찮으시옵니까?"

   이내 앙칼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미가 괜찮을 리가 있겠느냐? 네가 만주 사람을 봉으로 때려 눕혔으니 이를 어찌할 참이냐?"

   순간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면 소녀가 어찌해야만 했사옵니까? 저 파렴치한 만주족에게 저당이라도 잡혔어야 했사옵니까?"

   어머니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한족이 만주 사람을 때리는 것은 중죄임을 모르느냐? 필시 저들이 우리 모녀를 관아에 고발할 터인데, 이제 어찌할 참이냐?"

   소녀는 말문이 막혔다. 한순간의 분기를 참지 못해 벌어진 일이 아닌가! 소녀는 자신의 잘못으로 어머니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소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사옵니다. 모든 것이 소녀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일이오니, 마땅히 소녀가 책임지겠사옵니다."

   소녀는 관아에 자수할 생각이었다. 어머니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딸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어머니가 눈물을 쏟으며 딸의 손을 꼭 잡았다. 

   "행여라도 쓸데없는 생각일랑 말거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거늘, 설마 우리 모녀가 몸을 둘 곳이 없겠느냐? 필시 하늘이 죄없는 우리 모녀를 가호해 주실 것이다."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오나, 소녀, 어머님께 누를 끼칠 수 없사옵니다. 소녀가 방책을 마련하겠사오니, 어머님께서는 당분간 숙부님의 집에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어머니와 다시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지금은 달리 그 도리 밖에 없는 듯했다. 기실, 두 모녀 모두 당분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했지만, 이유는 제 각각이었다. 소녀는 어머니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 어머니는 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어미에게 딸의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 성싶으냐? 시숙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는 일, 이 어미는 당분간 예전에 거처한 사찰로 돌아가마. 너도 아미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싶구나."   

   아미. 이 한마디에 소녀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미는 지난 10여 년 간 소녀가 무예를 닦은 곳이었지만, 소녀는 아미에서 도망쳐 나왔기에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섯 살의 어리디 어린 나이에 아미의 장문인 천명 사태의 직계 제자가 되었던 소녀는 어느날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가 보고 싶어 장문인의 승락도 없이 한밤 중에 담을 넘어 하산했었다. 그러한 소녀가 아미로 돌아간다면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소녀의 속도 모르고 어머니가 문득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미는 네가 아미의 제자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구나!"

   순간 소녀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직감으로 딸의 마음을 눈치챈 어머니가 화들짝 놀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어미에게 사실대로 말해보거라."

   소녀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털썩 무릎 꿇고 주저앉으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소녀, 더이상 아미의 제자가 아니옵니다. 소녀, 사부님의 승락을 받고 하산한 것이 아니라 도망쳐 나온 것이옵니다. 어머님을 실망시켜 드려 송구하옵니다......"

   소녀의 말에 깜짝 놀란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대,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도,도망쳐 나왔다니! 그,그게 정녕 사실이란 말이냐?"

   소녀가 땅에 쓰러지듯 엎드린 채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송구하오나, 들으신 그대로이옵니다."

   어머니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내 딸이 아미파 장문인의 직계 제자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거늘,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대체 어찌......"

   소녀가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님, 소녀, 사부님께 사죄하러 다시 아미로 돌아갈까 하옵니다. 하오나 그것이 어머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머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어머니는 근심어린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며 침묵할 뿐이었다. 무림에선 사부의 승락없이 하산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았다. 어찌 딸이 걱정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아서라. 이미 엎지른 물이거늘, 이제와서 어찌 돌이킬 수 있겠느냐?"

   엎지른 물이라는 말에 소녀는 가슴이 아려왔다. 사부의 승낙없이 아미를 떠난 것이 엎지른 물이란 말인가! 지난 10여 년 간 자신을 친딸처럼 돌본 사부를 배신한 것만 같아 가슴이 찢어질 듯아팠다. 소녀가 눈물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자애로우신 분이시니, 필시 소녀를 용서하실 것이옵니다."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딸이 사부에게 용서를 비는 수 밖에 없는 듯했다. 백여년 전 소림이 무너진 이래, 무림의 으뜸이 된 아미파의 장문인이라면 이 난국에 빠진 딸을 구해낼 수 있으리라. 

   당분간 헤어지기로 결심한 두 모녀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눈물을 진정시킨 어머니가 말했다.

   "총아야, 이제 그만 돌아가보거라. 어미도 예전에 있던 사찰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다."

   백의를 입고 있는 소녀의 이름은 왕총아였다. 올해로 열여섯인 왕총아는 수개월 전에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 몇 차례 사부에게 한번이라도 어머니를 뵙고 올 수 있게 해달라 간청하였지만, 그때마다 사부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마침내 밤에 담을 넘어 하산했다. 왕총아는 여느 소녀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었다. 그녀의 사부는 늘 때가 되면 하산을 허락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도저히 기다릴 수 없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쫓기는 몸으로 어머니를 모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총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부디, 소녀가 다시 어머님을 모시러 갈 때까지 만수무강하소서."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왕총아는 어느새 사천의 명산 아미산에 있는 아미파의 근거지인 복호사에 이르렀다. 왕총아가 기별을 넣기도 전에 아미파의 제자들이 대문을 열고 뛰어 나왔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마치 적을 상대하듯 북두칠성진을 펼치며 왕총아를 에워쌓다. 왕총아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장문인의 허락없이 하산한 제자라지만, 동문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때 대문에서 장문인의 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나왔다. 여인은 왕총아에게 10여 년 간이나 무예를 가르친 아미의 장문인 천성사태가 아니었다. 왕총아가 아미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대사매였던 양소청이 아닌가! 왕총아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사매! 사부님을 뵙게 해주세요."

   왕총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미의 제자 하나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쳤다. 

   "대사매라니? 대체 장문인께 무슨 망발이냐? 어서 장문인께 무릎 꿇지 못할까?"

   장문인이자 사부인 천성사태는 이미 아미를 떠난 듯했다. 천성사태가 아미에 없다면 누가 자신을 도우랴!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왕총아는 털썩 주저 앉으며 무릎 꿇었다. 잠시 흐느끼던 왕총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사부님을 뵙게 해주세요."

   왕총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소청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너는 이미 아미에서 파문당하였거늘, 누가 네 사부란 말이냐? 한때 동문이었던 정을 생각하여, 네 죄를 묻지 아니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거라."

   너무도 무정한 말에 왕총아는 발끈해서 벌떡 일어났다. 왕총아가 양소청을 쏘아보며 말했다. 

   "한때 대사매였던 그대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지요? 그대에게 일말의 동문의 정이라도 있다면 내게 이럴 수는 없어요!"

   그리고는 자신을 둘러싼 여승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사부님께서 평소에 동문을 친자매처럼 아끼라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부디 사부님을 뵙게 해주세요."

   양소청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아미를 배신하고 떠난 네가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하는게냐? 사부님께서 어디에 계신지는 우리도 모르거니와 혹여 안다고 해도 사부님의 허락없이는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양소청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왕총아는 다시 무릎을 꿇고 양소청에게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한때 소녀의 대사매였습니다. 부디 소녀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부디 동문의 정을 생각하시어, 사부님께 연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양소청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께서 너를 만날 이유가 없다! 억지부리지 말고 이만 물러가거라!"

    이 한마디만 남기고, 양소청은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양소청이 복호사 안으로 들어가자, 아미의 제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홀로 남은 왕총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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