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총아 4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4. 12. 21. 06:00

   왕총아 4화 조정우 역사소설


   눈물이 메마른 것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실컷 울고 나니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려 시야를 가렸다. 머리에 댕기를 달고 있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왕총아는 자신도 모르게 하룻밤을 보낸 처소로 시선을 돌렸다. 방 한칸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초가집이었다. 이 초가집이 사부의 거처일까? 문득 호기심이 생겨 방문이 열린 채 텅 비어있는 방 안을 훓터 보았다. 방바닥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댕기가 떨어져 있었다. 몇 발짝 걸어가 방바닥에 떨어진 댕기를 살펴보니 역시 그녀의 댕기였다. 몹시 아끼는 댕기였지만, 사부의 방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발을 방안에 내디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척의 거리에서 천명사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방에 시주의 물건이 있으니, 모두 가져가시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천명사태가 불과 몇 발짝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왕총아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천명사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 몸은 시주의 사부가 아니라 하지 않았소? 예의 차릴 것 없소. 어서 일어나시오!"

   사부가 일어나라니, 왕총아는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던 왕총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천명사태가 말을 이었다. 

   "시주가 자기 물건을 챙겨 갔는지, 궁금해 온 것이오."

   오른 손에 염주를 쥐고 있는 천명사태는 왼쪽 손을 들어 방 안을 가리켰다. 천명사태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벽에 왕초아가 아미에서 무예를 익힐 때 쓰던 장검이 걸려 있었다. 

   "그 장검은 시주의 것이니, 가져가시오."
   왕총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미에서 파문당한 제자에게 장검을 돌려준 적은 여지껏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파문당한 제자의 검을 압수하는 것은 아미의 법규였다. 순간 왕총아의 가슴에 실낱같은 희망이 떠올랐다. 사부가 제자의 죄를 용서하려는 것일까? 

   "사부님!"

   왕총아는 다시 급히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쿵하는 소리가 났다. 천명사태가 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으며 말했다. 

   "어허, 이 몸은 시주의 사부가 아니라도, 그리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려!"

   기대가 낙담으로 바뀐 왕총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허면, 허면 어찌, 소녀에게 검을......."

   "그 검은 애초에 이 몸이 시주에게 준 것이 아니오? 시주의 것이니, 응당 시주가 가져가야지."

   왕총아는 천명사태의 의도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왕총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해싿. 

   "하오나, 평민은 검을 소유할 수도 없거니와...... 더욱이 소녀는 아미에서 파문당한 몸이온데......"

   왕총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명사태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시주는 참으로 고지식하구려. 아미에서 일어난 일은 아미의 제자들만 아는 일이거늘, 세상이 어찌 알겠소? 시주만 입을 다물면 그만인 것을......"

   왕총아는 이제야 깨달았다. 천명사태가 장문직을 내려놓기 전에 제자들에게 그녀가 파문당한 일을 불문에 부치라 단단히 일러두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문득 왕총아는 천명사태가 자신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장문직을 내려놓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총아의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왕총아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사이, 천명사태는 어느새 초가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천명사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바닥에 떨어진 댕기도 검과 함께 챙겨 가시오."

   왕총아는 벌떡 일어나 사부에게 하직인사라도 하려 하였으나,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천명사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왕총아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천명사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두손을 모아 큰 절을 올렸다. 

   "사부님의 하해 같은 은혜, 결단코 잊지 아니하겠나이다."

   왕총아는 곧장 방안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장검과 바닥에 떨어진 댕기를 들고 나왔다. 방안에서 나오는 왕총아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부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장문직을 내려놓은 것만 같아 마음이 태산을 짊어진 듯 무거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갖 상념에 빠진 채 우두커니 서 있던 왕총아는 문득 어머니가 있는 청룡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미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마당에 지난 10여 년 간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당분간이라도 어머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겠다.'

   결심을 굳힌 왕총아는 그 즉시 청룡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미산에서 하산한 왕총아가 시내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시내 거리에 붙어 있는 방 주변으로 적지 않은 인파가 몰려있는 모습이 왕총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생사람을 잡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 탐관 오리들이 멀쩡한 백성을 백련교도로 몰아 세워 죽인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나......"

   사람들은 낯선 왕총아를 보자 입을 다물었다. 왕총아는 문득 호기심이 들어 방을 향해 다가갔다. 방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틈 사이를 지나 방을 쳐다보는 순간, 왕총아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에 그려진 사람은 다름 아닌 왕총아의 어머니와 면사포를 쓴 그녀 자신이 아닌가!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울컥 치솟았지만, 어머니 걱정에 왕총아는 이내 냉정을 찾고 온힘을 다해 청룡사를 향해 내달렸다. 

   '어머님!'

   왕총아는 어머니가 걱정되어 더 이상 빨리 뛸 수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뛰어가다가, 사천의 아미산에서 호복 양양까지의 먼 거리를 뛰어갈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왕총아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탈진한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 궁리하던 중 시야에 때마침 길을 지나가던 짐을 실은 마차가 들어왔다. 급한 마음에 어디로 가는 마차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왕총아는 검을 찬 채 마차로 뛰어올랐다. 

   "양양으로 급히 가는데, 길이 같으면 태워주시오!"

   마차를 몰던 사내는 갑자기 검을 찬 사람이 마차로 뛰어오르자 깜짝 놀랐지만, 왕총아의 미모가 빼어남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양양으로 가기는 하오만, 낭자는 양양 어디로 가시오?"

   왕총아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행적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왕총아가 두손을 모으며 정중히 말했다. 

   "양양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오. 그리하여 주시겠소?"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듯 아리따운 왕총아의 미모에 반한 것일까. 사내는 대뜸 대답했다.

   "내 그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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