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총아 3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4. 12. 5. 06:00

   왕총아 3화 조정우 역사소설


   회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왕총아가 눈물을 그쳤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대문이 굳게 닫힌 복호사를 망연히 바라보던 왕총아는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마침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는 일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10년에 이르는 어린 시절을 지낸 복호사에 다시는 발을 디딜 수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정녕 돌이킬 수 없단 말인가! 돌이킬 수만 있다면 10년이라도 더 사부의 슬하에서 아미파의 무예를 익히며 예전처럼 평화로이 지낼 수 있으련만...... 대체 어쩌다 이제는 사부의 슬하로 돌아갈 수도, 어머니의 슬하로 돌아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몰래 사부의 곁을 떠난 자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하늘 같은, 하해 같은, 스승의 은혜를 무심하게 저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질듯이 아파왔다. 철없는 제자의 배신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길래, 장문인의 자리를 내어 놓고 육십 평생을 보낸 복호사를 떠나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실컷 울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킨 왕총아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몇 걸음 걷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일어나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왕총아가 가까스로 눈꺼풀을 떴을 때는 날이 눈부실 정도로 밝아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왕총아는 땅바닥이 아닌 푹신한 솜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벌떡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왕총아의 시야에 등을 돌린 채 문지방에 있는 회색 승복을 입은 인영이 들어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스르륵 방문이 열리더니 인영이 밖으로 사라졌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빨랐는지 왕총아가 무예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헛것을 본 것이라 착각했으리라. 재빨리 방문 밖으로 나와 사라져가는 인영을 주시하는 순간 왕총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인영의 뒷모습이 사부와 흡사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 

   왕총아가 이 한마디를 외치자, 마치 유령처럼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은 채 멀어져가던 인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인영은 마치 세상이 정지한 듯 꼼짝도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왕총아는 나는 듯이 내달려 인영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사부님!"

   틀림없었다. 왕총아의 사부이자, 아미파의 장문인이었던 천명사태였다. 인영의 앞모습을 보지 않고도, 인영의 뒷모습만 보고도, 이미 왕총아는 사부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10년 간이나 모셔온 사부이건만, 뒷모습이라 한들 어찌 못 알아볼 리가 있겠는가! 발걸음을 다시 멈춘 천명사태는 그녀를 보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부님!"

   절규하듯 이 한마디를 내뱉은 왕총아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쏟아내리기 시작했다. 천명사태는 왕총아의 눈물을 외면하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누가 시주의 사부란 말이오? 노부는 제자가 없는 몸이오."

   왕총아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주라니! 눈앞에 있는 사부가 자신을 모르는 척하다니! 앞으로는 자신을 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이리라. 엄격한 사부의 성정을 생각할 때 이미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을 당하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왕총아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크나큰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던 왕총아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으며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부디 이 못난 제자를 용서하소서!"

   천명사태는 마치 돌부처처럼 꼼짝도 않은 채 말이 없었다. 왕총아는 더욱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부님의 하해 같은 은혜를 저버린 제자의 죄를 부디 용서하소서!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오니, 부디 제자에게 한번만, 부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소서!"

   왕총아는 두손을 싹싹 빌며 연신 눈물을 떨구었다. 천명사태는 여전히 꼼짝도 않은 채 말이 없었다. 이러한 천명사태의 모습을 보자, 왕총아는 온몸의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천명사태는 허락없이 자신의 곁을 떠난 제자를 용서할 뜻이 없음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부의 뜻을 깨달은 왕총아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부님......."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왕총아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연신 흐느낄 뿐이었다. 흐느낌이 잦아들자 긴 침묵 끝에 천명사태가 입을 열었다. 

   "시주와 이 몸은 이미 끝난 인연이오. 이미 엎지른 물이거늘, 이제와서 어찌 돌이킬 수 있겠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사부의 위엄 서린 말에 왕총아는 흐느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내 보아하니, 시주의 심신이 많이 지친 듯하니, 몸조리 잘 하시오."

   천명사태는 이 한마디를 남긴 채 유유히 사라져갔다. 마음 같아서는 사부의 옷깃이라도 잡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감히 사부의 말을 어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총아는 사부가 사라져간 방향을 망연히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망연자실하게 눈물을 흘리던 왕총아의 뇌리에 10여 년 전 아버지를 잃고 사부를 처음 만났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10여 년 전, 아버지를 잃은 그 아픈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때도 수십의 만주족 한량들이 당시 양양에서 명성을 날리던 곡예사였던 아버지 왕충보에게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했다며 터무니 없이 시비를 걸어왔었다. 왕충보는 그날 번 돈을 모두 내주어 그들을 달래려 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왕총아의 어머니 서천련이었다. 한량 하나가 서천련의 손목을 잡아 끌며 행패를 부리자, 왕충보는 참다 못해 봉을 휘둘러 서천련의 손목을 잡은 한량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들의 흉악한 간계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들은 즉시 한족이 생사람을 봉으로 때렸다며 왕충보를 관아에 고발했고,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된 왕충보를 이곳 아미산까지 쫓아와 서천련을 강탈하려 했다. 그들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봉을 들고 저항하던 왕충보를 죽인 그들은 서천련 뿐만 아니라 겨우 여섯살의 어리디 어린 왕총아마저 끌고 가려했다. 어린 왕총아는 자신보다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젖먹던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그때만 해도 왕총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를 죽인 그들이 어머니마저 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나이였다. 어린 왕총아의 비명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복호사 마당에서 바람을 쏘이던 천명사태의 귀에까지 들려왔었다. 사태를 짐작한 천명사태는 즉시 어린 소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내달렸고, 왕총아 모녀의 입을 틀어막고 끌고 가던 그들을 산길에서 맞닥뜨렸다. 천명사태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들의 손아귀에서 두 모녀를 구해내었다. 마치 귀신이 사람을 낚아채가듯 천명사태는 양손으로 두 모녀를 차례로 낚아채 신출귀몰하게 사라져 버렸다. 천명사태와 왕총아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천명사태는 갈곳없는 두 모녀를 복호사에 머물도록 배려하였고, 철없이 무예를 배우겠다며 때를 쓰던 어린 왕총아를 제자로 거두어 들였다. 얼마 후에 서천련은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복호사를 떠났고, 왕총아는 10여 년 간이나 천명사태에게 무예를 배웠다. 그 오랜 세월동안 왕총아는 간간히 어머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뿐, 만나지도 심지어 서신을 쓰지도 못했었다. 그것이 아미의 법규였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신을 왕래하면 더욱 간절히 보고 싶어져 수련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수백년 전의 아미파 장문인이 정한 법규로 천명사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생이별을 한지 10여 년이 되어갈 무렵,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진 왕총아는 마침내 사부의 명을 어기고 한밤중에 아미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될 줄이야! 천명사태는 제자에게도 자신에게도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그 즉시 제자를 파문시킨 후 자신도 제자를 잘못 가르친 책임을 지고 아미파의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엎지른 물이 되고 만 것일까? 왕총아는 이루 말할수 없는 회한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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