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총아 6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5. 1. 25. 09:00

   왕총아 6화 조정우 역사소설


   말할 수 없는 곡절

    

   쉴새 없이 달려 성문까지 한달음에 이른 왕총아의 시야에 실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문에서 성벽까지 수천 수만의 병사가 물샐 틈없이 지키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성문은 철통처럼 폐쇄되어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왕총아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암흑 같은 절망감에 왕총아는 탄식의 신음을 토했다. 

   "아!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문득 절망에 빠진 왕총아의 뇌리에 몰래 성벽을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성벽을 넘어간다 해도 철통처럼 폐쇄된 성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주저앉은 채 망연히 성벽을 바라보는 왕총아를 향해 누군가 말했다. 

   "성벽을 넘어가려는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성벽 밖엔 병사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있으니 말이오!"

   귀에 익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왕총아는 아미산에서 마차를 태워준 사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순간 벌떡 일어나 몸을 돌린 왕총아가 사납게 쏘아보며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당장 정체를 밝히시오!"

   아직 왕총아의 가슴에는 이 사내가 호인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수상쩍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왕총아는 당장이라도 사내의 손목을 낚아챌 기세였다. 어머니 걱정에 마음이 다급해진 왕총아는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 

   "따라오시오!"

   사내는 따라오라며 손짓하고는 유유히 걸어갔다. 왕총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창졸간에 수배자가 된 왕총아로서는 큰 소리를 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사내의 정체를 알려면 조용히 따라가는 도리 밖에. 사내의 발걸음은 매우 가볍고 날랬다. 왕총아는 사내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왕총아의 의혹은 점점 증폭되었다. 아미산에서 마주친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왕총아는 의혹스러운 눈초리로 사내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발걸음이 한적한 곳에서 멈추자, 순간 적막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왕총아가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당신의 정체를 밝혀 보시오!"

   사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또한 낭자의 정체를 모르거늘, 어찌 나의 정체를 알려고 하는 것이오?"

   사내가 순순히 정체를 밝힐 것이라 예상한 왕총아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아미파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 또한 그대가 어느 문파에 속하였는지 알아야 하겠소!" 

   사내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내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줄 수 없다면 어찌할 것이오?"

   화가 치민 왕총아는 번개처럼 신속하게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사내는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왕총아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 것이다. 왕총아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말하시오!"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낭자에게 일점일획도 잘못한 것이 없거늘, 어찌 나를 핍박하는 것이오?"

  왕총아는 말문이 막혔다. 기실 이 사내에게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 이외엔 아무 적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내에게 두 차례나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순간 흥분이 가라앉자 왕총아는 자신이 사내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손을 놓고 말았다. 마치 양볼에 연지를 찍은 것처럼 붉게 물든 왕총아의 두 뺨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사내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왕총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낭자,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소......"

   왕총아는 난데없는 사내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따위 한가한 소리 집어 치우시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지 정녕 모르시오?"

   여자의 직감력이라 할까. 왕총아는 이 사내가 자신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소. 기꺼이 낭자를 돕겠소."

   왕총아는 의심이 가시자 사내가 믿음직스러웠다. 왕총아는 두손을 모아 감사를 표시하며 물었다. 

   "이 몸은 왕총아라 하오. 그대도 내게 이름을 알려주시겠소?"

   진작부터 사내의 이름이 궁금했던 왕총아는 통성명을 하고 싶었지만, 의심 탓에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왕총아가 먼저 통성명을 하자 사내가 대뜸 대답했다. 

    "이 몸은 요지부라 하오."

   왕총아는 사내의 손목을 낚아챈 것과 사내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 강요한 것을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대에게 무례를 범해 참으로 송구할 따름이오. 마음이 급해 결례를 범한 것이니 아무쪼록 양해해 주시기 바라겠소."

   "아니오. 낭자가 이 몸을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소. 다만, 사정이 있어 정체를 밝힐 수 없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

   왕총아는 미안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구태여 그대의 정체를 밝히지 아니하여도 상관없으니, 마음쓰지 마시오."

   요지부는 왕총아가 자신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요지부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양해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소!"


   수천의 관병이 철통처럼 에워싼 성문을 향해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 한 대가 수레바퀴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차에는 짚더미가 가득 실려 있었다. 병사 하나가 마차를 향해 창을 겨누며 외쳤다. 

   "멈춰라!"

   마차를 모는 사내가 손에 호패(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쥔 채 외쳤다. 

   "이 몸은 관아 사람이오!"

   호패를 본 병사가 지체없이 성문을 향해 외쳤다. 

   "관아 소속 마차가 간다! 성문을 열라!"

   병사의 외침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 마차를 모는 사내가 손을 흔들며 병사들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하시오!"

   사내는 곧장 마차를 몰아 성문을 통과했다. 성문이 마차에서 까마득히 멀어졌을 무렵, 사내가 짚으로 덮여 있는 수레를 향해 말했다. 

   "낭자, 이제 괜찮으니 나오시오."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영 하나가 짚더미를 헤치고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대는 관아 사람이었소?"

   다름 아닌 왕총아였다. 요지부는 왕총아를 성문 밖으로 빼돌리기 위해 수레에 짚더미를 가득 실어 그 안에 숨도록 하였던 것이다. 병사들에게 발각될까봐 짚더미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왕총아는 너무 쉽게 성문을 통과하자 요지부의 정체가 다시 의심스러워졌던 것이다. 요지부가 굳은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더니 왕총아가 눈빛으로 다그치자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몸은 관아에 속한 몸이오."

   왕총아는 요지부를 한차례 쏘아본 후 마차에서 뛰어내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지부는 당황하며 말에서 뛰어내려 왕총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낭자, 아미산까지 걸어갈 작정이오?"

   왕총아는 요지부를 매섭게 노려보며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그대가 관아 나부랭이인 줄 알았다면 결단코 도움을 청하지 아니하였을 것이오!"

   왕총아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요지부는 화를 내기는 커녕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요지부는 왕총아의 적개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관아에 대한 적개심이 왕총아에 못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곡절이 있었다. 요지부가 뭐라 해명할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왕총아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요지부의 옆을 지나쳐갔다. 요지부가 왕총아를 쫓아가며 외쳤다. 

   "낭자, 내 말을 들어보시오!"

   요지부가 큰소리로 외쳤지만, 왕총아는 들은 척도 안하고 앞만 보며 걸어갔다. 어느새 요지부가 따라와 왕총아의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낭자, 내 말을 듣고 가도 늦지 않소!"

   왕총아가 요지부를 향해 손을 휘두르며 호통쳤다. 

   "비키시오!"

    왕총아가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요지부의 옆을 지나쳐가려는 찰나, 요지부가 외쳤다. 

   "낭자, 부디 해명할 기회를 주시오!"

   왕총아는 이번에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요지부의 옆을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요지부가 다시 왕총아의 뒤를 쫓으려는 찰나, 왕총아가 몸을 훽 돌리며 발걸음을 멈추고는 손을 치켜들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해명 따위는 필요없소!"

   만주족은 청나라 왕조를 중원에 세운 이래 온갖 법을 만들어 한족을 핍박해왔고, 100여 년 전 소림사가 역적을 숨겨주었다는 죄명으로 관병에 초토화된 이래 구대 문파도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왕총아는 그 어떤 이유가 있든 간에 만주족이 세운 조정을 위해 일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왕총아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하는데, 뒤에서 절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관병이 된 것은 피치 못할 곡절이 있기 때문이오! 부디 나를 믿어주시오!"

   요지부의 절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움직인 것일까. 왕총아가 누그러진 얼굴로 요지부를 쳐다보더니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 피치 못한 곡절이 무엇인지 들어나봅시다."

   순간 요지부의 말끝이 흐려졌다. 

   "지금 당장은 곡절을 말해줄 수 없소......"

   왕총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허면 비키시오."

   바로 그 순간, 요지부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허나,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쳐서라도 낭자를 돕겠소!"

   왕총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가 여인인 자신에게 무릎을 꿇다니! 남존여비인 이 당시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기꺼이 바쳐서라도 돕겠다는 요지부의 한마디에 왕총아는 치밀어 오르던 분노가 마치 씻은 듯이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왕총아는 작별인사를 하듯 두손을 모으며 말했다. 

   "호의는 고맙소만 사양하겠소."

   왕총아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지자 요지부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요지부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왕총아가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떠났다. 

   "몸조심 하시오. 이 몸은 이만 가보겠소."

   요지부가 벌떡 일어났을 때는 왕총아는 이미 멀찍이 지나쳐 가버렸다. 요지부는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왕총아의 인영이 요지부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요지부는 왕총아가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왕낭자! 어찌 이리도 이 지부의 마음을 몰라 주시는 것이오? 왕낭자를 도울 방도를 찾아야 한다......"


   저의 신작 소설 [왕총아] 북팔 웹소설 '떠오르는 작가'에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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