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웅 이순신

명량 대첩의 미스테리,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조정우 2014. 8. 7. 08:00

   명량 대첩의 미스테리,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이순신 불멸의 신화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세시 | 2014-07-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의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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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척으로 133척을 이긴 세계 해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량 대첩!

   133척이냐, 333척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기록으로 보았을 때 133척은 실전에 투입된 함선의 숫자이고, 200여 척이 대기 중에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 부분은 이전의 글에서 밝혔음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이순신 장군은 대체 어떤 전술로 이긴 것일까? 

   명량 대첩을 이룬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이해하려면, 명량해전도(鳴梁海戰圖一)를 또 다시 봐야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을 사수함으로써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라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 단 한 척의 전선이 133척이라는 일본 함대를 상대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순신 장군의 작전대로 간 것은 아닌 것이 틀림없다. 

   나중에 이순신 장군이 초요기를 올려 안위에 김응함을 부를 때, 이순신 장군은 안위에게, "안위야, 네가 죽고 싶으냐? 도망치면 어디 가서 살 것이냐?"라고 말했고, 김응함에게는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아니하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마땅히 참해야 하나 전세가 급하므모 우선 공을 세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난중일기의 기록이 이순신 장군이 대장선 한 척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상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명량해전도(鳴梁海戰圖一)를 보면, 11척이 명량 해협의 끝에서 조선 수군이 일자진을 치고 있는데, 위의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11척의 조선 함선이 대장의 명 없이 후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애초의 작전은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추측하자면, 김응함과 안위의 판옥선으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좌우에서 호위토록 하고, 나머지 10척의 함선이 일자진을 치고 뒤에서 엄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을 선점하여 사수하고, 물살이 밀물에서 썰물로 바뀔 때까지 버티는 작전을 썼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물살만 바뀌면 조선 수군의 장기라 할 수 있는 화공 작전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치 삼국지의 오나라 수군 도독 주유가 동남풍을 기다리듯, 이순신 장군은 대장선의 병사들을 독려하여 싸우며 물살이 밀물에서 썰물로 바뀔 때가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작전대로 가기 위해서는 일본 수군이 명량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일본 수군은 이미 여러 차례 수륙 양면 공격으로 조선 수군을 상대했는데, 임진년의 안골포 해전과 부산포 해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 수군이 만약 육지에서 화살, 조총, 대포를 쏘며, 바다에서 압도적인 숫자의 함선으로 밀어붙혔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의 폭은 불과 330m로,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중앙에 있다고 가정할 때, 대포를 해안 양쪽에서 쏘아댄다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순신 장군은 허장성세로 대규모의 복병이 있는 것으로 위장하여 일본 수군의 상륙을 막았던 것 같다. 

   예로부터 강강술래의 유례가 명량 대첩에서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명량 해전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강강술래는 이용하는 허허실실의 계책으로 일본 수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 '사호집'이라는 문헌에 의하면, 전라도 고창의 선비 오익창이 1000여 척의 피난선에 있는 피난민들을 설득하여(사호집에는 사대부라 기록되어 있지만, 1000여 척의 피난선이 모두 사대부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양도 앞바다에서 허장성세를 펼치도록 했다고 한다.  

   명량해전도를 보면, 양도 옆에 작은 배들이 마치 2열로 진을 펼친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은 배들이 무려 1000여 척이나 되었다 하는데, 이를 목격한 일본 수군으로서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으리라. 

   괜히 상륙했다가 만약 몰살당하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여인들이 강강술래를 유유히 부르는 모습을 보고, 명량에 복병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호집의 기록 중 오익창이 피난선에서 100여 개의 솜이불을 걷어 물에 젹셔 조총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지금도 총알이 두터운 이불을 뚫지 못한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명량의 최선봉에 있던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에도 젖은 솜이불로 조총을 막았으리라. 

   이순신 장군의 버티기 작전은,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을 선점하여, 여인들과 젖은 솜이불까지 동원하여 사수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명량 해전 초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홀로 버티었는데, 난중일기를 보자.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이미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처럼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서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다.'

   정리하자면, 이순신 장군은 먼저 명량에서 가장 좁은 해협을 선점하여 사수하고, 여인들로 하여금 강강술래를 부르게 하는 허허실실과 양도 앞바다에 피난선 1000여 척으로 허장성세를 펼쳐 일본 수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안위와 김응함을 불러 일본 수군의 공세를 막아 버티기 작전이 성공했던 것 같다. 

   전투 초반에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홀로 버티었던 것은 나머지 12척이 뒤로 물러났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데,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써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목을 배어 내걸고 싶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순신은 초요기를 들어 장수들을 불렀는데, 안위와 김응함만이 왔다. 안위와 김응함의 가담으로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안위의 배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되는 순간에 공격에 나서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죽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자. 

   '배 위의 사람들이(안위의 배)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쫓아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았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와 힘을 합쳐 적을 쏘아 적은 한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안위와 김응함의 배가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 앞에 있었는데, 일본 수군은 먼저 안위의 배를 집중 공격한 것 같다. 

   안위의 배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뱃버리를 돌려 공격한 것 같은데, 뱃머리를 돌렸다는 말은 아마도 방향을 바꾸었다는 말 같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3척의 왜선을 공격한 것 같다. 

   가만히 안위와 왜군들의 백병전을 지켜보고 있던 이순신 장군이 갑작스럽게 배를 몰아 대포를 쏘아대며 공격했으니, 세 척의 왜선은 아차 하는 순간에 대포를 맞았을테고, 난중일기의 표현대로 거의 다 뒤집히게 되었던 것 같다. 

   이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힘을 합치니 세 척의 왜선은 병사들이 전멸할 정도로 궤멸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때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대포를 맞았고,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바다에 빠져 아마도 배 조각을 잡아 떠내려 오다 이순신 장군의 항왜 병사(항복한 일본 병사) 준사의 눈에 뜨여 죽임을 당한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밀물이 썰물로 바뀌기 전에 일본 연합 함대의 대장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대포에 함선이 침몰하여 바다에 빠져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대포에 그대로 즉사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진 후 항왜 병사 준사의 눈에 뜨여 갈고리에 건져져 사로잡혀 목을 배여 죽었다고 한다. 

   이때 물살이 밀물이었다면 일본 수군의 진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따라서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전사할 때는 여전히 밀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장선 홀로 133척을 맞아 싸운 이순신 장군의 분전이 안위와 김응함에 이어 송여종과 정응두를 이끌고 내었고, 이때 나머지 배들도 전투에 가담했을 것이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기도 전에 구루미사 미치후사를 전사시키고, 조선 수군이 승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