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총아 7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5. 2. 8. 08:00

   왕총아 7화 조정우 역사소설


   양양성 관청의 대청마루에서 지현(현령)의 관복을 입은 사내 홀로 제사를 지내며 향을 피우고 있었다. 사내는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외우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공가향 무생노모."

   진공가향 무생노모는 백련교의 주문으로 진공가향은 허공의 고향이라는 말로 백련교가 믿는 천국을 가리키고, 무생노모는 백련교가 신봉하는 창세주였다. 서른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지현이 경건한 얼굴로 주문을 중얼거린 모습을 보면 백련교도가 틀림없어 보였다. 청나라 조정에서 백련교를 사교로 명명하고 뿌리채 뽑을 것을 명한 것이 18년 전의 일이었다. 양양성의 지현이라는 자가 백련교도라니 대체 어찌된 노릇일까. 눈은 감은 채 묵도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범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당에서 쿵쾅쾅 요란하게 뛰어 오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사내는 순간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허겁지겁 뛰어 오고 있었다. 사내는 대청에 당도하기도 전에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숙부님! 사천에서 백련교의 봉기가 일어났다 하옵니다!"

   사내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국모야! 내가 사사로이는 네 숙부이나, 관청에서는 네 상관일 뿐이라는 걸 모르느냐?"

   사내의 이름은 제국모로 양양성 지현의 조카이자 직속 부관이었다. 제국모가 깜박 했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치며 말했다. 

   "송구하오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옵니다! 봉기가......"

   제국모가 돌연 말을 멈추더니 주변에 누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봉기가 일어났사온데, 벌써 진압되었다 하옵니다."

   이 말에 지현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지현의 이름은 제림으로 이곳 양양성 백련교의 교수(백련교의 우두머리)인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조정에 출사하여 황태자 옹염의 신임을 얻어 양양성의 지현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8년 전 백련교의 교수 유송이 체포된 이래 사분오열된 백련교는 각각의 지역마다 교수가 통솔하고 있었는데, 백련교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죄로 다스릴 정도로 날이 갈수록 백련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유송의 제자로 하남성의 교수 유지협과 사천의 교수 송지청이 사천에 백련교도를 집결시켜 봉기를 일으키려다 사전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한동안 굳은 얼굴로 침묵하던 제림이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부는 어디 있느냐?"

   제국모가 난감한 듯 머리를 글적이며 대답했다. 

   "실은, 사천의 정황을 살펴보러 갔던 지부가 마차에 짚더미를 가득 싣고서 다시 성문을 나섰다고 하옵니다. 사천으로 간 듯 하다 하온데, 대체 어찌된 노릇인지......"

   제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과 같이 중차대한 시기에 대체 무슨 용건으로 내게 보고조차 아니하고 사천으로 갔단 말이냐?"

   제국모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소질이 들은 바로는, 지부가 백의의 낭자와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고 하온데, 어째서 지부가 마차에 짚더미를 싣고 성문을 나섰는지, 보고받은 것이 없는지라 소질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문득 제림이 알았다는 듯 무릎을 치며 말했다. 

   "지부가 백의의 낭자와 함께 있었다면...... 짚더미에 그 낭자를 숨긴 듯하구나! 그 낭자는 필시 관아에서 지명수배 중인 왕낭자일게야!"

   왕낭자라는 말에 제국모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왕낭자라 하오면......"

   제국모는 관아가 두 모녀를 백련교도로 몰아 수배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 모녀가 백련교도라면 벌써 백련교에 도움을 청했을 터, 여지껏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 모녀는 백련교도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며칠 전 관아에서 백련교도로 지명수배되어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며 자수한 여인의 여식일게야. 그때 지부가 모녀의 사정이 딱하니 도와줄 것을 청하였으나, 백련교의 명운이 달린 지금의 상황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었지."

   바로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바로 요지부가 대청에 당도하여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사부님,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제자가 오는 도중에 일이 생겨 이제야 당도하였나이다!"

   사부인 제림에게 왕총아를 만났던 모든 자초지종을 보고한 요지부가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의 제자인 왕씨 낭자가 백련교도라 수배당하여 관아에 쫓기는 몸이 되었으니, 우리 백련교에서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옵니까?"

   백련교도들이 익히는 무예 백련공은 구대 문파의 무공과 크게 달라 제국모는 왕총아가 백련교도가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한 왕총아를 백련교도로 몰아 어찌 해보려는 한량들의 작태에 요지부는 불처럼 끓어오르는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제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장부라면, 어찌 이와같은 파렴치한 짓거리에 울분을 느끼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만, 지금은 때가 때인만큼 관아에서 지명수배당한 두 모녀를 도울 방도가 없다."

   "하오나......"

   요지부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제림이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사천의 봉기가 관군에 진압되었다는 소식은 알고 있느냐?"

   이 말에 깜짝 놀란 요지부는 말문이 막혔다. 사천의 봉기가 진압되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제림이 요지부를 나무라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우리 백련교의 존망이 걸려있는 위급한 상황임을 모른단 말이냐? 아미 낭자의 일은 아미에게 맡기고 너는 사천의 유대협과 송대협의 소식이나 알아오거라!"

   요지부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백련교의 존망이 걸린 위급한 상황에서 백련교의 일을 제쳐두고 다른 일을 벌일 여지가 없지 않은가. 사천으로 가는 길에 왕총아와 마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사부님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요지부가 제림에게 하직인사를 한 후, 마당에 있는 말에 뛰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제국모가 손을 들며 외쳤다. 

   "지부, 나도 자네와 함께 가겠네!"

   그리고는 제림에게 말했다.

   "숙부님, 소질도 지부와 함께 가겠나이다!" 

   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부는 먼저 가고, 너는 유대협과 송대협이 관군에 쫓기고 있을지 모르니, 무예가 빼어난 교도들을 데리고 가거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미산을 향해 죽기 살기로 달리던 왕총아는 기진맥진하여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왕총아는 땅에 털썩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부에게 마차라도 빌릴 것을......"

   왕총아는 관아 사람인 요지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미까지 마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요지부의 호의를 완강히 거절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고지식했던 것 같다.

그때 마차를 빌려 탔다면 지금쯤은 아미산에 도착했을 것이 아닌가! 잠시 숨을 고른 후 일어나 걸음을 떼었지만 이렇게 걸어서 수백리나 떨어져 있는 아미산까지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총아가 한숨을 몰아쉬는 찰나였다. 앞길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왕총아는 허리에 찬 검을 두손으로 잡아서 들었다. 

   '시간이 없다. 이 검을 말과 바꾸는 수 밖에......'

   어렸을 적에 사부에게 하사받은 소중한 검이었기에 망설여졌지만, 가진 것이 검 뿐인 왕총아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말발굽소리가 나는 앞쪽길을 바라보니 사내 하나가 그야말로 쏜살처럼 말을 몰아 오고 있었다. 그 사내를 향해 왕총아는 검집 채 치켜들며 외쳐댔다.

   "이보시오! 멈추시오!"

   하지만, 그 사내는 채찍을 휘둘러 그냥 지나쳐가려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사내가 말을 몰아 왕총아의 옆을 막 지나쳐가려는 순간, 왕총아는 몸을 날려 말위로 뛰어올랐다. 

   "멈추시오!"

   "무슨 짓이냐!"

   사내는 다짜고짜 손을 뻗어 말위에 뛰어오른 왕총아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그 동작이 어찌나 신속한지 왕총아는 속수무책으로 말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는 순간 겨우 중심을 잡아 착지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면 부상을 당할 뻔했다. 화가 치민 왕총아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경공을 펼쳐 뒤쫓아갔다. 

   "이보시오! 멈추시오!"

   일신의 경공 절기를 발휘, 쏜살처럼 말을 모는 사내의 뒤를 쫓아간 왕총아는 다시 몸을 날려 말위로 뛰어올랐다. 사내는 이번에도 다짜고짜 손을 뻗어 왕총아의 어깨를 밀어 버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왕총아가 선수를 쳐 사내의 어깨를 힘껏 밀어 버렸다. 사내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억!"

   민첩하게 두손을 뻗어 일어난 사내는 눈을 부라리며 왕총아를 향해 호통쳤다. 

   "제법 반반하게 생긴 낭자가 어찌 말도적질이냐?"

   사내의 말에 왕총아는 오기가 생겼다. 애초에 왕총아는 자신의 검과 사내의 말을 교환하며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지만, 사내로부터 도둑 취급을 당해 오기가 생겨 검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법 반반하게 생긴 낭자라는 말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닌가! 왕총아가 말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말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 뿐이니, 언제든 아미로 찾아 오시오!"

   이번에는 사내가 몸을 던져 말위에 뛰어올랐지만, 왕총아는 손을 뻗어 미처 사내의 몸이 말에 닿기도 전에 사내를 밀어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말고삐를 힘껏 당겨 말을 몰아갔다. 다시 땅에 떨어진 사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왕총아는 순식간에 말을 몰고 자리를 떠났다. 왕총아는 그대로 말을 몰아 아미산을 향해 그야말로 쏜살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걱정에 마음이 급한 왕총아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한달음에 아미에 당도하였다. 왕총아가 아미에 당도하자마자, 아미의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왕총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아미의 새 장문인 양소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총아! 백련교에 가입한 네가 어찌 감히 아미에 왔느냐? 네가 백련교의 사주를 받고, 우리를 염탐하려 온 것이 틀림없으렸다!"  

   순간 왕총아는 말에서 뛰어내려 무릎을 꿇으며 눈물로 호소했다.

   "장문인! 소녀가 백련교에 가입했다니, 누명입니다! 소녀, 비록 아미를 떠났으나, 마음은 한시도 사부님과 동문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사부님의 은혜 가운데 10여 년을 아미에 몸담은 소녀가 어찌 사부님과 아미를 배신하고 백련교에 가입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누명으로 어머니의 생사마저 위태로워진 이때에 동문들마저 자신이 백련교에 가입한 줄로 믿고 있으니, 감정이 복받친 왕총아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때 한 소녀가 앞으로 나와 양소청에게 말했다. 

   "장문인, 썩어빠진 조정이 멀쩡한 사람을 백련교로 몰아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일단 총아의 말을 믿어보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소녀는 왕총아와 함께 무예를 연마했던 송서영이었다. 송서영의 말에 여러 아미의 제자들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양소청은 싸늘한 어조로 왕총아를 향해 말했다. 

   "너는 사부님의 명을 거역하고 몰래 우리 아미를 떠난 배신자가 아니냐? 헌데, 어찌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

   왕총아가 항변하듯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소녀의 말을 믿어주실 것입니다. 사부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 

   양소청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부님은 여기 안계시다!"

    순간 왕총아의 입에서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왕총아가 이곳에 온 것은 사부님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절망에 빠진 왕총아가 양소청을 뚫어지듯 바라보며 말했다. 

   "장문인께서는 소녀가 어찌해야 소녀의 말을 믿겠습니까?" 

   양소청은 마치 왕총아가 이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왕총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했다. 

   "네가 정녕 백련교가 아니라면 백련교 두목 유지협의 목을 베어오라!" 

   목을 베어오라는 말에 왕총아는 화들짝 놀란 듯 멍한 눈으로 양소청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녀, 살생은 싫사오니, 유지협을 사로잡아 오겠나이다!"

   "목을 베어오든, 사로잡아오든, 상관은 없으니, 이는 네 마음이다!"

   왕총아가 뭔가 떠오른듯 머리를 한차례 끄덕이며 말했다. 

   "허나, 소녀, 한가지 청이 있나이다."

   "무엇이냐?"

   왕총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말했다. 

   "소녀가 백련교의 두목을 사로잡는다면, 소녀가 다시 아미에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소서!"

   양소청은 잠시 생각했다. 만약 왕총아가 백련교의 두목을 사로잡는다면, 백련교를 증오하는 사부님은 왕총아의 공을 치하하며 아미에 복귀시킬 것이 틀림없었다. 양소청은 선심쓰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마땅히 네가 큰 공을 세우면 아미에 복귀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 다만 이는 사부님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다만......"

   왕총아는 뛸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장문인! 소녀의 청을 들어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저의 신작 소설 [왕총아] 북팔 웹소설 '떠오르는 작가'에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왕총아 : 북팔 웹소설 연재 링크 ← 클릭

신재하 문예창작교실 (문창과, 작가지망 수강생 모집, 분당 미금역선릉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