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왕총아 8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5. 2. 22. 08:00

   왕총아 8화 조정우 역사소설 

   

   왕총아가 양소청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나서 말위로 뛰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잠깐!"

   양소청이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왕총아가 급히 말을 몰아나가려다 말고삐를 당겨 세우자 양소청이 말했다. 

   "백련교 두목 유지협의 얼굴은 아는가?"

   왕총아는 백련교의 두목이라는 그의 이름을 들은 적은 있어도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왕총아는 아차 싶어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자의 이름만 알 뿐, 얼굴은 모르옵니다."

    양소청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래 가지고 어찌 유지협을 잡을 수 있겠느냐?"

    양소청이 자신의 제자인 소녀 하나에게 눈짓하자, 소녀가 그림 하나를 갖고와 왕총아에게 다가가 건네주었다. 초상화였다. 초상화에 그려진 사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왕총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아까 자신에게 말을 빼앗긴 사내가 아닌가! 왕총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자가 유지협이라니......"

    이때 양소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자가 유지협이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왕총아는 초상화를 쥔 채 두손을 모으며 말했다. 

    "장문인의 호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그럼 소녀는 이만......"

    왕총아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말머리를 돌려 급히 말을 몰아나갔다. 초상화를 쥔 채 말고삐를 쥔 왕총아의 손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유지협, 이 자만 잡는다면 어머님도 구하고 다시 아미로 복귀할 수 있겠구나!'

   유지협만 잡는다면 아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왕총아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 올랐다. 흥분으로 들뜬 왕총아는 조금 아까 유지협의 말을 빼앗았던 곳을 향해 미친듯이 말을 몰아갔다. 


   백의를 입은 사내가 절뚝거리며 산길을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산길을 절뚝거리며 걷던 사내가 돌연 이를 부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아미로 찾아오라 했지! 어디 두고보자! 못된......"

   사내는 '못된 계집 같으니라구!'라고 말하려다 겨우 참은 것이다. 남녀평등사상을 가진 백련교에서 '계집'은 금어였다. 사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금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뻔 한 것이었다. 사내는 '계집'이란 말이 금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못된 낭자 같으니라구!"

   두 말 할 것 없이 이 사내는 백련교의 교수 유지협이었다. 친형제와도 같은 사제 송지청이 관군에 체포되어 있었다. 송지청을 구하기 위해 급히 제림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던 중 왕총아에게 말을 빼앗긴 유지협은 말에서 떨어질 때 발목까지 삐어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내, 반드시 아미에 찾아가 그 낭자를 혼쭐내고야 말겠다!"

   유지협이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내 앞길에서 말을 탄 인영 하나가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유지협은 관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검을 빼어들었다. 그때였다. 

   "유대협!"

  유지협과 송지청의 소식을 알아오라는 제림의 명을 받은 요지부가 이제야 온 것이었다. 요지부를 보자 유지협이 반색하며 외쳤다.  

   "지부!" 

   요지부는 그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유지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유대협, 어찌된 일입니까? 송대협은 어찌 되셨습니까?"

   십수년 전, 백련교의 교수 유송이 체포된 이래, 유송의 제자 유지협이 백련교의 총교사가 되어 실질적으로 백련교를 이끌어 왔었다. 그러한 유지협이 말도 타지 않고 혼자서 절뚝거리며 걷다니! 요지부는 늘 유지협과 함께 다니던 송지청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실로 뜻밖에 나타난 요지부를 보자 반색하던 유지협이 돌연 크게 탄식했다. 

   "송사제는 관군에 체포되었네."

   서천의 하늘을 향해 탄식하던 유지협이 요지부를 바라보며 급히 말을 이었다. 

   "신속히 송사제를 구해야만 하네. 자네의 일행은 어디 있는가?"

   유지협은 요지부의 일행이 충분하다면 제림에게 도움을 청하러 양양성까지 갈 것도 없이 곧장 송지청을 구하러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유지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수십 쯤 되어보이는 군마가 희뿌연 흙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제국모가 수십 명의 백련교도를 이끌고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제국모가 수십 명의 무리를 이끌고 당도했다. 요지부가 제국모의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이 바로 소생의 일행이옵니다만......"

   유지협의 의도를 알아차린 요지부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이 무렵, 백련교는 사분오열되어 각 지역의 교수가 백련교를 이끌고 있었으니, 양양성의 교수 제림의 명 없이는 송지청을 구하러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지협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송지청을 구하겠다는 일념 뿐이라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혹여 일이 잘못되면 책임질테니, 자네의 일행을 내게 맡기게."

   요지부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사님의 명 없이는 불가한 일이옵니다."

   유지협은 의견을 묻듯이 제국모를 바라보았다. 제국모도 요지부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소생들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유지협은 낙담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정 그렇다면, 제림을 만나러 가는 수 밖에 없군......"

   이때 요지부가 말에서 내리더니 유지협에게 자신의 말을 내어주며 말했다. 

   "유대협, 소생의 말에 오르소서."

   유지협은 급한 마음에 요지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위에 뛰어올랐다. 제국모가 무리들 중 한 사내에게 요지부에게 말을 양보하라 눈짓하자, 요지부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아닐세. 나는 괜찮네."

   제국모가 의아하여 물었다. 

   "괜찮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여기서 양양까지 걸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요지부가 제국모에게 빨리 가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자네는 속히 유대협을 모시고 사부님께로 가게나. 나는 사천에 볼 일이 있다네."

   순간 제국모가 요지부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요지부가 왕낭자라는 아미의 제자 때문에 사천으로 가려는 뜻을 짐작한 것이다. 제국모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알아서 하리라 믿겠네."

   유지협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준 요지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서 말을 몰아 떠나자, 제국모도 무리를 이끌고 떠나버렸다. 홀로 남은 요지부는 점점 멀어지는 제국모의 무리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제국모의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몸을 돌려 사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왕총아는 유지협을 잡지 못할까 봐 초조한 마음에 거의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쉴새 없이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정신없이 말을 몰아 산길을 내달리던 왕총아의 시야에 멀리서 백의의 인영이 달려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왕총아는 유지협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말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왕총아가 검을 빼어드는 찰나였다. 

   "왕낭자!"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백의의 인영은 유지협이 아니라 요지부였다. 여기서 요지부를 만나게 될 줄이야! 왕총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지부!"

   입에서 지부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왕총아는 아차 싶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직 잘 모르는 사내의 이름을 부르다니! 왕총아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다시 외쳤다. 

   "포졸 나리!"

   왕총아는 한손에는 유지협의 초상화를 든 채, 한손에는 검을 든 채, 말에서 뛰어내렸다. 손에 든 검을 허리에 찬 검집에 집어 넣은 왕총아는 다짜고짜 요지부의 면전에 유지협의 초상화를 들이댔다. 인사를 건네는 것이 예의였으나, 유지협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이 없는 왕총아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포졸 나리, 이자를 아시오?"

   유지협의 초상화가 시야에 들어오자, 요지부는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바로 그 순간, 왕총아는 요지부가 유지협을 알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왕총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요지부를 바라보았다. 요지부는 왕총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잠시 침묵하다 손을 내저으며 자못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몸이 포졸인건 기밀이니, 그냥 지부라 부르시오. 헌데, 무슨 연유로 묻는 것이오?"

왕총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요지부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좋소. 허면 그대도 나를 총아라 부르시오. 헌데,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기실, 서로 친분이 없는 남녀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만큼 왕총아와 요지부는 서로 이름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가까워졌던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가까워졌음을 확인한 요지부에게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마치 날카로운 예리한 왕총아의 눈초리에 요지부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침묵하던 요지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기는 하오만...... 그대가 알고 싶어하는 사항은 말해줄 수 없을 듯하오......"

   순간 왕총아의 음성이 얼음처럼 차갑게 돌변했다. 

   "대체 이자와 무슨 관계요? 그대도 백련교도요?"

   왕총아는 요지부가 유지협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난처해하는 요지부의 얼굴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백련교의 교수 유지협에게 호의적이라니! 그렇다면 요지부도 백련교도란 말인가! 백의를 입은 요지부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여지껏 요지부는 항상 백의였다. 요지부가 자신처럼 백의를 즐겨 입는 줄로만 알았던 왕총아로서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요지부가 백련교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왕총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요지부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목석처럼 서서 한동안 침묵하던 요지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 또한 백련교도요."

   요지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총아가 분노의 목소리로 다그쳤다. 

   "말할 수 없다는 고충이 있다기에 그대를 좋게 보았건만, 기껏 백련교도였단 말이오?"

   기껏 백련교도라는 말에 요지부도 분노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백련교가 어떻단 말이오?"

   왕총아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만 같아 몸서리치며 말했다. 

   "백련교가 공공의 적임을 모르시오? 구대 문파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나의 아미파와는 원수지간이란 말이오!"

   요지부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백련교는 공공의 적이 아니란 말이오! 백련교가 구대 문파와 척을 진 것은 사실이나, 수백만의 이 나라 백성들이 백련교를 따르고 있거늘, 어찌 그런 망발을 하시오?"

   왕총아는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말을 향해 몸을 홱 돌렸다. 

   "망발이라 하였소? 그래, 내가 망발을 하였다 치더라도, 나와 그대가 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군요! 이만 가보겠소!"

   왕총아가 말위로 뛰어오르는 순간, 요지부가 외쳤다.

   "총아! 잠깐 기다리시오! 나는 그대를 돕고 싶소!"

   왕총아는 마음이 차갑게 돌아선 상태였다. 왕총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백련교도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소!"

   왕총아가 그대로 말을 몰아 나가려하자 요지부가 말고삐를 잡아채며 길을 가로막았다.  

   "백련교가 그대에게 무슨 잘못을 하였소? 백련교는 만민의 평등이라는 대의를 세웠건만 대체 무엇 때문에 백련교에 적의를 품은 것이오?"

   왕총아는 마음이 급해 말고삐를 잡아챈 요지부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지금 그대와 논쟁할 겨를이 없으니 어서 비키시오!"

   왕총아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요지부의 손을 뿌리쳤으나, 요지부는 말고삐를 꼭 잡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왕총아가 힘껏 요지부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애원하는 듯한 요지부의 눈빛이 왕총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총아, 이러지 마시오! 유지협을 해치면 아니되오! 내 목숨을 걸고라도 그대의 어머님을 구하겠소!"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말에 왕총아의 귀가 번뜩 뜨였다. 말에서 뛰어내린 왕총아가 요지부를 향해 두손을 모으며 말했다. 

   "좋은 방책이 있소? 내 어머님을 구해준다면 그대를 평생토록 은공으로 여기겠소!"

   요지부가 약조해 달라는 뜻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대가 유대협을 해치지 아니하겠다 약조하여 준다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대의 어머니를 구하겠소! 약조해 주실 수 있겠소?"

   왕총아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유지협을 잡아야만 아미파로 복귀할 수 있지 않은가! 기실 백련교의 교수인 유지협을 잡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유지협을 잡아 아미파로 복귀한다 해도 어머니를 구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관아의 포졸인 요지부가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지 않겠는가. 어머니만 구할 수 있다면 아미파로 복귀하지 못한들 아무 한이 남지 아니하리라. 왕총아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약조하리다."


  저의 신작 소설 [왕총아] 북팔 웹소설 '떠오르는 작가'에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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