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장옥정 1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6. 4. 5. 10:00

  장옥정 1화 조정우 역사소설

 

 

   불광리, 방이 99칸이나 되는 대궐 같은 저택의 정원에 오색 비단옷을 곱게 차려 입은 젊은 낭자가 화사롭게 핀 정원의 꽃들을 감상하며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칠흑처럼 검고 명주실처럼 윤기나는 머리, 오똑한 코,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사뿐사뿐 걸어가는 낭자의 자태는 월궁 선녀가 하강한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활짝 핀 모란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낭자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꽃들이 만개한 봄이 왔건만 어쩐지 내 마음은 한겨울과도 같구나! 여태 이 나이가 되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올해로 스물둘인 낭자의 이름은 장옥정이었다. 열둘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종백부 장현의 슬하에서 열번째 봄을 맞는 옥정은 여태껏 배필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쯤 내 배필을 만날 수 있을런지...... 우리 아버님의 반만 되는 사내만 되어도 내 마다하지 아니하련만......'


   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조선 제일의 역관이었다. 아버지를 몹시 따랐던 옥정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가 겨우 열두살 때, 역시 역관으로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 사촌형 장현에게 처자식을 부탁하는 유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옥정이 혼기가 되자, 장현은 양반 가문 중에서 여러 혼처를 알아보았건만, 옥정은 항상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첩실은 싫사옵니다. 중인의 가문이라도 정실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기실, 마음이 갔던 혼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양반의 위세를 내세워 옥정을 첩실로 들일 생각이었기에 혼사를 거절했던 것이었다. 정실이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는 옥정의 고집에 장현은 어쩔 수 없이 중인의 가문에서 혼처를 구해봤지만, 옥정의 마음이 가는 혼처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조선팔도 강산에 어찌 이다지도 사람이 없단 말인가!'


   옥정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상념에 잠겨있을 때, 옥정의 시녀 영선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씨, 주인 어르신께서 아씨를 찾으시옵니다."


   옥정은 곧장 장현의 처소로 향했다.


   "소녀를 찾으셨나이까?"


   장현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운을 뗐다.


   "내, 방금 동평군을 뵙고 왔느니라."


   숙종의 숙부인 동평군은 예전부터 장현이 마음에 둔 혼처였지만, 옥정이 거절한 바 있었다. 약관의 나이인 동평군은 학식이 있고 외모도 준수한지라 옥정도 동평군이 싫지는 않았지만, 이미 정실이 있는 동평군의 첩실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옥정은 고개를 숙인 채 장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동평군께서는 임금의 승하시, 왕위를 이으실 분이시다. 동평군께서 너를 어여삐 여기고 계시던데, 정녕 마음을 돌릴 수 없겠느냐?"


   옥정은 말이 없었다. 싫다는 표정이었다. 장현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를 어찌할꼬?'


   얼마전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이 일으킨 역모에 숙종의 근친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형제가 연루되어 귀양간 터라, 만약 숙종이 왕자없이 승하한다면 동평군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장현은 이처럼 위세당당한 왕족 동평군에게 옥정을 맺어주고자 했지만, 옥정은 확고부동해 보였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장현이 입을 열었다.


   "마음에 둔 혼처라도 있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첩실로 가기가 싫은 것 뿐이옵니다...... 소녀, 역관의 처가  될지언정, 그 누구의 첩실도 되고 싶지 아니하나이다."


   "그게 정녕 너의 뜻이라면...... 어찌할 수가 없구나."


   "송구하기 짝이 없나이다."


   "괜찮다. 이 백부는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니라. 다른 혼처를 구해보마."


   옥정은 자신을 친딸처럼 아끼는 장현의 사랑에 감격하여 큰절을 했다.


   "소녀, 백부님의 크신 사랑에 감읍할 따름이나이다."


   옥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현이 말했다.


   "내 시급히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장현의 처소를 나오는 옥정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백부님께서 나를 친딸처럼 총애하시거늘, 난 백부님을 실망시키기만 하는구나...... 허나, 어머님의 뜻도 나와 같으니...... 어찌 이것이 나의 잘못이겠는가!'


   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본시 역관 윤성립의 딸로 어릴 적엔 부족함없이 살았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소현세자비 강빈의 역모에 연루되어 온 가족이 노비의 신분으로 몰락한 비운의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다. 미색이 빼어났던 윤씨는 대왕대비 조씨의 사촌동생 조사석 처의 여종으로 있던 중, 우여곡절 끝에 장경의 첩실로 들어갔다가 정실이 되었는데, 첩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옥정을 정실로 시집보낼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생각이 이러하니, 장현으로서도 옥정의 뜻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옥정은 거문고를 집어 들어 타기 시작했다. 이내 애절하면서도 구슬픈 듯한 거문고 가락이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아버님께서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나셨사옵니다. 소녀, 아버님께 거문고타는 법은 익히 배웠으나, 혼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이다. 누구와 혼인하는 것이 좋을지, 꿈에서라도 나타나시어 소녀를 인도하여 주소서.'


   거문고의 명인인 장경에게 배운 옥정 역시 거문고에 대단히 뛰어났다. 봄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울려 퍼지는 옥정의 거문고 소리는 사람의 혼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옥정이 세상의 고민을 머리에서 지운 채 한창 거문고 연주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당에서 온 집안이 떠나갈 듯,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현과 장현의 일가를 추포하라는 전하의 명이시다! 장현의 일가 사람들은 식솔 식객 하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오라를 받으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옥정이 깜짝 놀라 급히 거문고를 밀어 놓고 일어나는 순간, 옥정의 시종 철영이 방문을 열어 젖히고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포도청의 포졸들이 들이닥쳤나이다. 속히 따라오소서!"


   "대체 무슨 일이냐?"


   "큰 사단이 난 듯하니, 일단 피하소서."


   철영이 옥정의 손목을 나꿔채 방을 나서자, 옥정이 외쳤다.


   "신을 다오!"


   철영은 다급히 옥정의 분홍 꽃신을 집어든 후 옥정의 손목을 다시 잡아 뒷문으로 끌어갔다. 옥정은 조금 끌려가다 어머니 윤씨와 오라비 장희재가 떠올라 멈추었다.


   "어머님과 오라버니는 어디계시느냐?"


   "일각이라도 지체하단 모두 잡힐 것이옵니다. 아씨라도 피하셔야 하옵니다."


   철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철영이 옥정의 손목을 잡아 끌고 가자, 포졸 하나가 호통쳤다.


   "멈추어라! 도망치면 죄가 커지니, 순순히 오라를 받거라!"


   도망칠 새도 없이 포졸들이 사방에서 포위하며 달려왔다. 옥정은 도망쳐도 잡힐 것 같아 철영의 손에 몇 걸음 끌려가다가 멈추어서며 말했다.


   "너나 도망치거라. 나는 발이 느려 아니되겠다."


   옥정이 멈추자, 철영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철영이 애타게 탄성을 질렀다.

   "아씨!"


   그 새 수십명의 포졸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서 순순히 오라를 받지 못할까!"


  포졸 둘이 오라를 들고 옥정과 철영에게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옥정의 손을 나꿔챘다.


   "오라버니!"


  옥정의 오라비 장희재였다. 장희재는 옥정과 철영을 향해 다가가던 포졸 둘을 발로 차 넘어뜨린 후 옥정의 손을 잡고 달려가며 철영에게 외쳤다.


  "우릴 엄호해 다오!"


  주인의 명에 철영은 재빨리 넘어진 두 포졸의 허리춤에 있는 몽둥이 두개를 빼내어 양손에 쥐고 미친듯이 휘둘렀다. 워낙에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포졸들이 주춤하는 틈에 옥정과 장희재는 무사히 뒷문까지 달아날 수 있었다. 장희재가 뒷문의 빗장을 풀고 대문을 열어 젖히자, 옥정이 도망쳐 나온 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철영은 어찌 하오리까? 어머님은요?"


   "일단 나가자! 우리가 살아야 어머님도 구할 수 있을터."


   손목을 잡혀 어쩔 수 없이 장희재를 따라나선 옥정은 온힘을 다해 달렸다. 뒷문에서 이어진 산길을 달려 장현의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숲에 이르자, 옥정이 숨을 헐떡이며 멈추어 섰다.


   "더는 못가겠사옵니다."


   "잠시만 쉬도록 하자. 멀리 도망쳐야 안심할 수 있다."


   옥정은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근심어린 얼굴로 말했다.


   "도망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질 않사옵니까? 어머님과 백부님을 구해야 하옵니다. 철영도요. 소녀, 조사석 대감께 도움을 청할 것이옵니다."


    대왕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인 조사석은 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시집오기 전에 모시던 주인이자 정인으로 그 당시, 윤씨를 몹시 사랑했던 조사석은 옥정과 장희재에게 한결같은 정을 베풀어왔다. 옥정의 말에 장희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서석 대감께 가자꾸나."


   옥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되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장안을 떠나셔야 하옵니다. 저로 인하여 오라버니께서 포도청의 포졸들을 때려 눕히셨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옥정을 구하기 위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옥정의 말을 듣고 보니, 장희재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포졸을 때려 눕힌 죄만 해도 중죄이거늘, 이 문제를 어찌 수습할까?'


   장희재는 누이가 염려할까봐 억지로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심려치 말거라. 조대감께서 계시지 않느냐?"


   "나라의 법을 어기면, 영의정의 자식이라도 죄를 면하기 힘든 일이옵니다. 아무래도 오라버니께서는 일이 수습이 될 때까지, 일단 장안을 떠나시는게 좋을 듯하옵니다. 조대감께는 소녀가 저희 일가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어 도움을 청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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