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칠숙의 난

조정우 2012. 9. 24. 15:00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 칠숙의 난

 

 

   이른 새벽, 보량이 승만왕후가 내준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대문 밖에 아찬 석품의 가마가 놓여 있었다. 경사병 대장인 석품은 칠숙의 집을 제집처럼 자주 드나들어, 보량은 멀리서 보고도 석품의 가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씨, 아직 하인들이 일어나기 전이니 제가 담을 넘어 대문을 열겠사옵니다.”

   오래전부터 보량의 시녀이며 호위무사 역할까지 해왔던 능보가 말했다. 능보는 당대의 검술대가 유오랑의 문하생이었다가 역시 유오랑에게서 검술을 배운 바가 있는 보량의 아버지 보종과의 인연으로 가복이 된 후 오랫동안 보량을 보필하고 있는 무예가 출중한 시녀였다. 능보가 가볍게 담을 뛰어넘어 대문을 열었다. 보량이 마당으로 들어서니, 칠숙의 처소 문밖으로 초롱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보량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른 새벽에 대체 무엇을 논의하고 계신 것일까?'

   보량은 능보를 들여보낸 후 칠숙의 처소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칠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와 춘추를 동시에 제거할 수 있겠소?"

   순간 보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설마 낭군께서 춘추 오라버니를 암살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낭군께서 그러실 리가......'

   석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폐하께서는 병세가 위중하시어 인사불성 상태시고, 태자와 춘추는 이른 아침부터 시장을 잠행한다 하오니,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니겠사옵니까?"

   "허나 아직 폐하께서 멀쩡히 살아계신데, 어찌......"

   "여하튼 이제 폐하께서 회복되시기는 힘든 일이옵니다. 대사만 성공한다면 보로왕자님과 칠숙공 이외에 누가 대통을 이을 수 있겠사옵니까?"

   "대사가 실패하면 어찌 하겠소?"

   "소인만 믿으소서. 소인이 일기당천의 장사 백 명을 선발하였으니, 대사가 실패할 리도 없거니와, 설령 실패한다 해도 소인의 소관인 경사병 오천이 일시에 왕궁을 점거하여 왕후께서 태자를 폐한다는 조서를 내리기만 한다면 거사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태자와 춘추는 그 후에도 얼마든지 제거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사옵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칠숙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좋소. , 석품공만 믿겠소."

   "하오면 소인은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순간 초롱불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이자 보량은 재빨리 몸을 피해 나무 뒤에 숨었다. 보량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에 잠겼다.

   '태자마마와 춘추 오라버니를 암살하려 하시다니, 낭군께서 왕좌에 눈이 멀어 미치신 게로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기실 보량이 칠숙과 혼인을 하였다 하지만, 보량은 어릴 적부터 한마음으로 바라보았던 춘추를 여전히 연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낭군을 말리려 한들 말릴 수 있겠는가? 내가 낭군을 막으려 한다면 낭군은 대사를 거행하기 위해 필시 나를 가둘 것이다. 일단 친정으로 가서 양도와 의논해야 되겠다. 양도는 용맹하고 총명하니 분명 방도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보량은 발소리를 죽이려고 버선발로 마당을 지나 조용히 능보를 불렀다.

   "떠날 채비 하거라. 친정으로 가야겠다."

   보량이 능보와 함께 말을 끌고 대문을 나서려고 할 때, 칠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가시려는 것이오?"

   칠숙은 거사를 위해 갑옷과 검을 챙기고는 초조한 마음에 마당을 거닐다가 대문을 나서려는 보량을 본 것이다. 보량은 칠숙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으나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친정에 다녀올까 하옵니다."

   보량은 보로를 잃은 후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친정에 자주 다녀오곤 하였기 때문에 칠숙은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구려."

   보량이 칠숙에게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버선만 신은 보량의 발이 칠숙의 시야에 들어왔다. 보량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신도 신지 않은 채 나왔던 것이다.

   "부인, 어찌 버선만 신고 계신 게요?"

   순간 칠숙의 마음에 의구심이 솟구쳤다.

   '혹시 부인께서 방금 내가 석품공과 함께 태자와 춘추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걸 들은 게 아닐까?'

   칠숙이 의아한 눈으로 보량을 바라보자, 보량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발에 버짐이 생겨 그런 것이니, 낭군께서는 마음 쓰지 마소서."

   "허면 삼베신이라도 신고 가도록 하시오. 궁주이신 부인께서 어찌 체통 없이 버선발로 친정에 갈 수 있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여봐라! 게 있느냐?"

   보량은 더 지체했다간 꼼짝없이 잡힐 것만 같아 능보에게 눈짓한 후 말을 끌고 대문을 나서며 말했다.

   "폐하께서 위중하시어 어머님께 알려드리려 가는 길이라 지체할 수 없사오니, 이만 떠나겠사옵니다."

   보량은 대문을 나서자마자 말에 올라탔다. 칠숙은 다급히 대문을 나서 보량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지만, 보량은 말을 몰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부인, 잠시만 기다리시오."

   칠숙이 보량을 쫓으려고 능보의 말에 올라타자, 능보는 검을 뽑아 말의 다리를 베고 말았다. 말이 뒤뚱거리며 고꾸라지자, 칠숙은 말에서 뛰어내려 능보를 노려보며 호통쳤다.

   "감히 주인이 탄 말을 베다니, 능보 네가 미친 것이냐?"

   "주인어른께서 마님을 핍박하시니, 차마 지켜볼 수 없었나이다."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자, 칠숙이 다급하게 외쳤다.

   "속히 말을 대령하라."

   하인들이 말을 대령했을 때는 이미 보량이 사라진 후였다. 분노한 칠숙은 하인의 검을 뽑아 능보를 겨누었다.

   "능보, 네가 주인을 배반하고도 살기를 바라였더냐?"

   "소녀는 마님의 명을 따랐을 뿐이옵니다. 마님께서 대문을 나서실 때 소녀에게 눈짓으로 주인님을 막아달라 하셨사온데, 어찌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나이까?"

   칠숙은 능보를 차마 베지 못하고 검을 땅에 내리꽂은 후 크게 탄식하였다.

   '부인께서 정녕 대사를 그르치려 하시는 것이오?'

   칠숙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보량이 떠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하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곧 거사가 있을 터이니,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하거라!"

 

   보량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친정집에 당도하였다. 하인들이 대문을 열자, 보량은 다급한 나머지 말을 탄 채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마당에서 검술을 연마 중이던 양도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보량을 보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누님!"

   "양도야!"

   궁주의 신분인 보량이 시녀도 대동하지 않고 단기필마로 친정에 온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양도는 말에서 뛰어내린 후 비틀거리는 보량을 재빨리 다가가 안았다.

보량이 비틀거리다가 양도의 발을 밟자, 양도는 그제야 보량이 버선만 신은 것을 알았다. 양도는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누님, 괜찮으시옵니까?"

   "양도야, 큰일이 났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보량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네 매형이 석품공과 작당하여 춘추공과 태자마마를 시해하려 한다.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매형께서 어찌 그러실 수가......"

   양도는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에 말문이 막혔다. 보량은 양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막을 방법이 없겠느냐?"

   "누님께선 어찌 아시게 되셨나이까?"

   "왕후마마의 부르심을 받고 입궁하였다가 이른 새벽에 집으로 들어서다 낭군께서 석품공과 모의하는 말을 들었다."

   "누님께서 이리로 오신 것을 매형이 아시옵니까?"

   "아실 것이다. 능보와 함께 나오다 나만 간신히 빠져나오고 능보는 낭군께 잡혔다."

   양도는 보량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는 필시 모반이오니 일각이라도 지체하면 태자마마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것이옵니다."

   "정녕 다른 방도가 없겠느냐?"

   "만에 하나라도 태자마마께 변고가 생긴다면, 그 화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허면 보로는 어찌하느냐?"

   "보로는 겨우 다섯 살인데다 폐하의 유일한 왕자이니 별탈이야 있겠사옵니까? 소제가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보량이 깊이 탄식하며 괴로워하자, 양도가 보량의 양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누님, 일각 일초를 다투는 일이니 속히 태자마마와 춘추공께 위험을 알려야 하옵니다. 태자마마와 춘추공이 어디 계신지 아시옵니까?"

   "오늘 아침에 남산 밑의 시장으로 잠행을 나오실 것이라 들었다."

   보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도가 외쳤다.

   "여봐라!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으니, 속히 떠날 채비를 하거라."

   양도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병장기를 들고 나서며 보량에게 말했다.

   "소제가 가복들을 데리고 가서 태자마마께 칠숙공의 모반을 알리겠사옵니다. 누님은 여기서 기다리소서."

   보량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나도 갈 것이다. 낭군께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내가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나라의 변고만은 막아야 하느니라.”

   그러나 보량은 자신이 내심 춘추가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낭군이 죽는 것보다 춘추공이 죽는 것을 더 못 견뎌하다니……

   보량은 그런 자신이 더없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의 연정이란 이렇게 모질단 말인가. 하지만 도저히 춘추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량은 그런 자신의 운명을 비관했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양도는 보량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속히 채비하소서."

 

   이른 아침부터 장이 열린 남산 밑의 시장은 상인들의 행렬로 분주했다. 춘추는 덕만공주와 함께 잠행하여 민심을 살피고 있었다. 유란을 필두로 한 호위무사 이십여 명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으나 워낙 혼잡한 장터라 범상찮은 무리들이 덕만과 춘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어느덧 살수를 지닌 무리들이 덕만공주의 곁으로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잠행할 때면 항상 덕만의 옆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춘추의 직감에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는 찰라, 자객 하나가 도포 자락 안에 감추고 있던 검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덕만을 향해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춘추가 검을 빼어들 새도 없이 칼집으로 자객의 검을 막아냈다. 동시에 전광석화 같은 발길질로 상대의 배를 걷어차자 자객은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사방에서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덕만공주의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태자마마!"

   춘추는 다급하게 외치며 몸을 던져 덕만공주 앞을 막아섰다.

   “반역이다. 모두 태자마마를 보호하라!”

   춘추의 외침과 때를 같이하여 유란이 비호처럼 빠른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고 덕만에게 달려드는 자객 두 명을 순식간에 베어버리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행인들은 뜻밖의 사태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시장 한복판에서 복면을 한 자객들과 호위무사들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자객들은 모두 비범한 무술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고, 그 수도 호위무사보다 서너 배는 많았다.

   "웬 놈들이 감히 태자마마를 시해하려는 것이냐?"

   춘추의 일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 중 하나가 덕만공주와 춘추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들을 죽여라!"

   그때 호위대장 유란이 춘추와 덕만공주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여기는 소녀와 시위들에게 맡기시옵고, 춘추공께서는 태자마마를 모시고 자리를 피하소서."

   춘추가 덕만공주를 모시고 자리를 뜨려 할 때 자객의 무리들이 춘추와 덕만공주를 향해 덮쳐왔다. 순간, 유란의 검이 파공성을 지르며 번뜩이자, 달려들던 자객 서너 명이 목과 몸통에서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무리들은 유란의 현란한 검술을 보고는 흠칫하여 몇 걸음 물러섰다.

   "나는 유오랑의 딸 유란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비키지 못할까!"

   그 사이 춘추는 덕만공주와 함께 남산 쪽으로 몸을 피했다.

   “잡아라! 저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객 한 명이 소리쳤지만 유란과 호위무사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자객들은 덕만과 춘추를 쫓지 못하고, 두 무리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복면을 쓴 무리들이 워낙 수적으로 우세한지라 그들 중 몇 명이 덕만과 춘추를 뒤쫓았다.

   한참을 쫓기던 춘추는 덕만공주가 더는 뛰기 힘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자객의 무리들로부터는 벗어났으니 쫓아오는 놈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해 볼 만했다. 사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온 춘추의 검술은 화랑도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덕만공주의 보호를 우선하여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을 쫓는 몇 명의 자객들 정도는 덕만공주의 안위를 위해서도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춘추는 덕만공주에게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자객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자객들이 모퉁이를 돌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춘추가 그들에게 몸을 날렸다. 갑작스런 춘추의 역습에 자객들의 당황하는 빛이 스치는 것도 잠시, 춘추의 검이 춤을 추듯 허공을 가르자 어느새 두 명의 자객이 그 자리에서 피를 뿌리며 나뒹굴고 말았다. 그리고 달려드는 자객과 어우러져 전광석화처럼 불꽃 튀는 검과 검의 부딪힘이 작렬하더니 단칼에 자객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춘추와 덕만을 쫓는 자객은 보이지 않았다. 춘추가 덕만공주에게 다가갔다.

   “태자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난 괜찮다. 그보다 대궁이 걱정이구나. 필시 군사를 일으켰음이야.”

   그때 왠지 살기를 느낀 춘추가 돌아보는 순간, 자객 한 명이 지척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순식간에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춘추는 덕만공주를 감싸 안았다. 화살이 춘추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춘추가 순간적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자객은 어느새 달려들어 검으로 춘추를 요절낼 듯이 내리쳤다. 춘추가 무릎을 꿇은 채 가까스로 검으로 막아냈지만 자객은 두 손으로 검을 내리눌렀다. 춘추 역시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버텼지만 왼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 나오듯이 흘러내렸다. 사실상 오른팔 하나의 힘으로 버티는 형국이었다. 그때 자객이 한쪽 주먹으로 춘추의 피 흘리는 왼쪽 어깨를 힘껏 내리쳤다. 춘추는 고통스런 신음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자객이 비틀거리는 춘추를 찌르려는 순간,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덕만공주가 자객의 배에 사정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배를 관통당한 사내는 선홍색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덕만공주는 춘추가 위험에 처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자객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화살을 맞은 춘추의 어깨는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덕만공주는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춘추의 상처를 싸매어 주었다. 화살이 날아들 때 본능적으로 자신을 감쌌던 춘추의 마음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춘추야, 괜찮으냐?"

   "소질은 괜찮사오니, 심려치 마소서."

   갑자기 시장 저편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군마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태자마마와 춘추공을 보호하라!"

   양도의 목소리였다. 양도와 보량이 수백의 가복을 이끌고 온 것이다.

보량은 춘추가 부상당한 모습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보량은 말에서 뛰어내려 춘추에게 다가갔다.

   "춘추공!"

   "보량궁주!"

   보량은 춘추의 상처를 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춘추공, 상처가 심하옵니다."

   "별것 아니니, 심려치 마시오."

   이때 양도가 말에서 뛰어내려 덕만공주의 앞에 부복하며 아뢰었다.

   "태자마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의 매형 칠숙공이 반란을 모의하였다 하나이다."

   보량은 그제야 덕만공주의 앞으로 가서 부복하며 아뢰었다.

   "첩이 대궁에서 폐하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첩의 낭군께서 아찬 석품과 더불어 태자마마와 춘추공을 시해하려는 모의를 들었나이다. 첩이 낭군을 올바로 이끌지 못하였사오니, 그 죄를 물어주시옵소서."

   덕만공주는 보량의 말에 깜짝 놀랐다.

   "나의 사촌인 칠숙공이 어찌 감히 그런 간악한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인가! 옥새를 지켜야 한다. 즉시 내성사신 알천에게 전서구를 띄워, 반란 조짐이 있으니 대궁을 철통같이 지키라 명하거라. 또한 압독주에 있는 경외병 대장 유신에게 전서구를 띄워, 칠숙이 반란을 모의하였으니 서라벌로 돌아와 반란의 주동자를 체포하라 명하거라."

   덕만공주의 명이 떨어지자, 유란이 전서구를 띄웠다. 바로 그때, 남산의 남쪽 들판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수천쯤 되어 보이는 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춘추가 잠시 바라보다 덕만공주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칠숙의 무리이옵니다!"

   "일단 남산으로 올라가자!"

   칠숙이 서라벌의 성벽을 수비하는 경사병 3천 기와 가문의 가복 5백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이다. 춘추와 덕만공주가 일행들과 함께 말을 몰아 산기슭에 오르자, 뒤따라가던 보량이 양도에게 말했다.

   "양도야, 너는 이백 명으로 춘추공과 태자마마를 모시고 남산신성으로 피하거라. 내가 백 명으로 저들을 막겠다!"

   양도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제가 어찌 누님을 두고 떠날 수 있겠나이까?"

   보량은 양도의 말고삐를 잡아 돌리며 말했다.

   "누나의 말에 따르거라. 낭군께서 나를 죽이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누님, 저도 누님과 함께 남겠사옵니다."

   어느새 칠숙이 군마를 이끌고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보량은 검을 자신의 목에 겨누며 호통쳤다.

   "이 누나가 자진하는 꼴을 봐야 하겠느냐?"

   "그리하겠나이다. 누님, 부디 무탈하소서."

   양도는 눈물을 뿌리며 말을 몰아 떠났다. 칠숙의 군마가 다가오자, 보량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진을 펼쳐라!"

   칠숙은 보량이 다칠까봐 군마를 멈춘 후 보량을 향해 외쳤다.

   "부인, 끝내 나와 척을 질 셈이오?"

   "태자마마와 춘추공만 살려주시온다면, 낭군의 처분을 받겠나이다."

   "부인의 뜻이라면, 춘추공은 살려주겠소. 내 약조하리다. 허나 태자는 아니되오."

   보량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오면 결단코 길을 비켜드릴 수 없사옵니다."

   "부인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구려!"

   칠숙은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명을 내렸다.

   "공격하라!"

   수천에 이르는 칠숙의 군마가 돌진하자, 삽시간에 보량이 친 진이 무너지며 보량은 사로잡혔다. 칠숙은 보량이 무사한지 확인하자마자 군마를 이끌고 덕만과 춘추를 추격하였다.

   덕만공주 일행이 숲이 빼곡한 계곡에 이르렀을 때 유란이 덕만공주에게 말했다.

   "태자마마, 이 계곡은 병사들을 매복시키기 좋은 곳이니, 소녀에게 병사 백 명만 주시오면 칠숙의 무리들을 혼쭐내겠사옵니다."

   한때 산적 두목이었던 유란의 할머니 유지는 수백의 무리로 수천의 정병을 대파했던 천하의 여걸로, 유지에게 유격전술을 배운 유란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춘추가 덕만공주에게 말했다.

   "남산신성까지는 길이 멀어 칠숙에게 추격당할 수 있사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 태자마마의 안위가 중요하오니, 유란의 계책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하나이다."

   이때 양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질이 유란 낭자를 돕겠나이다."

   덕만공주는 근심 어린 얼굴로 양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양도야, 너는 내 조카인데, 어찌 너에게 위험천만한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여기는 유란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거라."

   양도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질에게 좋은 방책이 있사오니, 심려치 마소서."

   덕만공주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내 너에게 맡기겠다."

 

   유신이 압량주에서 경외병 1만 기를 이끌고 서라벌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칠숙은 점점 초조해졌다.

   '유신이 오기 전에 거사를 끝내려면, 태자 일행이 남산신성에 당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칠숙의 군마가 나무가 빼곡한 계곡의 좁은 숲길을 지날 때,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와 앞서 가던 칠숙의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숲을 뚫고 쏟아져 나왔다. 칠숙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가까스로 방패로 막은 후 검을 내지르며 외쳤다.

   "매복이다! 모두 섬멸하라!"

   칠숙의 병사들은 수백 명에 불과한 덕만공주의 일행이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기습에 전열이 흐트러졌다.

   "전열을 정비하라!"

   칠숙이 앞으로 나와 전열을 정비하려는 순간, 양도가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몰아 칠숙을 향해 달려들었다.

   "매형, 양도가 여기 있소."

   칠숙은 깜짝 놀라 말을 돌리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양도는 장창으로 칠숙의 말을 찔렀다. 말이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털썩 쓰러지자 칠숙은 땅에 고꾸라졌다. 양도는 말에서 뛰어내려 칠숙의 목에 장창을 겨누며 말했다.

   "매형, 항복하시오! 허면 인자하신 태자마마께서 매형의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오. 태자마마께서 매형을 용서치 아니하신다면, 나 또한 자진하겠소. 매형, 누님과 보로를 위해 부디 항복하시오!"

   칠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아니하니, 차라리 나를 죽여다오."

   바로 그때, 칠숙의 심복 세형이 말에서 뛰어내려 양도를 공격했다. 양도가 세형을 상대하는 사이 칠숙은 일어나 절뚝거리며 자신의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면서 외쳤다.

   "적군은 기껏 수백이다! 포위하여 섬멸하라!"

   칠숙의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양도의 무리들은 신속히 산길로 올라가 퇴각하였다.

   칠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수천 기를 거느렸음에도 기껏 수백밖에 안 되는 무리에게 당하여 양도에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니, 하늘의 운이 다한 것인가!'

   양도가 병사들을 수습해 돌아오자 유란이 양도를 힐책했다.

   "양도공, 어찌 반란의 수괴 칠숙의 목을 베지 아니하셨소?"

   양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매형을 내 손으로 차마 죽일 수 없었소."

   유란은 장탄식을 내뱉은 후 잠시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말했다.

   "이번 일은 못 본 것으로 할 터이니, 다음번엔 반드시 칠숙을 베야 하오."

 

   진평왕이 쌓은 남산신성은 비탈진 계곡에 세운 천혜의 요새로 성에는 천여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남산신성에 당도한 덕만공주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 그러고는 남산신성주 천존을 불렀다.

   "서라벌에서 전해온 소식이 없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호성장군(월성을 지키는 장군) 진주가 왕후마마의 명이라며 궁문을 굳게 닫고 양궁(왕후와 공주가 거처하는 궁)과 사량궁(태자와 왕자가 거처하는 궁)을 장악하였다 하옵니다."

   덕만공주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 물었다.

   "왕후의 명이라? 허면 왕후께서 칠숙과 반란을 공모하셨단 말이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도 왕후마마께서 이번 반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는 바가 없나이다."

   "대궁(왕이 거처하는 궁)은 어찌 되었소?"

   "대궁은 내성사신 알천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다 하나이다."

   "불행 중 다행이구려! 곧 칠숙이 이곳으로 올 터이니, 모든 병사들에게 경계령을 발령하여 대비하라 이르시오!"

   얼마 후, 양도가 유란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당도하였다. 양도로부터 승전보를 전해들은 덕만공주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양도야, 네가 큰일을 하였구나!"

   "유란 낭자의 계책을 쓴 것이니, 어찌 소질에게 공이 있다 할 수 있겠나이까?"

   양도의 말을 들은 덕만공주는 유란을 크게 치하하였다.

   "과연 천하의 여장부로다. 반란이 진압되면,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

   "소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했을 뿐, 모든 것이 태자마마의 은덕이 아니겠사옵니까?"

   이때 척후병 하나가 달려와 덕만공주에게 아뢰었다.

   "태자마마, 칠숙이 삼천쯤 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에서 한 마장 떨어진 곳에 당도하여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고 있다 하옵니다."

   덕만공주는 검을 뽑아들며 명을 내렸다.

   "전군은 전투태세를 갖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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