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김춘추 대왕의 꿈 특별회, 아 계백이여!

조정우 2013. 4. 15. 06:00

  김춘추 대왕의 꿈 신재하 조정우 장편소설 


  특별회 - 아, 계백이여!


   백제 사비궁 뒤뜰에 차려진 연회장에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수십 명의 무희가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가무를 하고 있었다. 연회장 상좌에서 이를 지켜보는 의자왕에게 자태가 마치 선녀와도 같은 천하절색의 미녀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첩이 어라하께 가무를 올릴까 하오니, 첩이 올리는 술을 받아주소서."

   조미압 따라 백제에 투항하여 궁녀가 된 지 어언 5, 금화는 의자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군대부인의 지위에 이르고 있었다. 악기를 잘 다룰 뿐 아니라 시와 학문에도 능한 금화는 여느 궁녀들하고는 처음부터 사뭇 그 분위기가 달랐다. 한눈에 봐도 빼어난 미모에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백옥 같은 피부, 때때로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교태까지 금화는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 줄 아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의자왕의 사랑을 단숨에 꿰찬 금화는 그렇지 않아도 삼천 궁녀까지 거느리며 퇴폐한 의자왕의 혼을 완전히 빼앗고 말았다. 벌써 오래전부터 의자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매일같이 연회를 즐기며 항상 아첨이나 하는 신하들만을 가까이하였다. 자연히 뜻있는 충신들은 귀향을 가게 되거나 왕으로부터 외면을 받으면서 국론은 분열되고, 왕 주위에는 비위를 맞추는 간신배들만이 들끓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라 요석공주의 명을 받은 금화의 뜻대로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는 인문왕자의 곁으로 갈 수 없는 더럽혀진 몸이 되어버렸다고 여기는 금화 역시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금화가 술잔에 술을 따르자, 의자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짐이 오늘 이 술잔에 너의 소리를 담아 취해보겠노라."

   금화는 의자왕에게 읍을 한 후 슬픈 곡조의 가야금에 맞춰 가무를 시작했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린 인문왕자를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여서 그런지 구슬픈 가락이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꾀꼬리처럼 청아한 목소리에 나비처럼 한들한들 날아오르는 듯한 금화의 춤사위에 의자왕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능수능란한 춤사위와 함께 심금을 울리는 금화의 노래가 끝나자 의자왕은 그 고혹적인 아름다움에 취해 금화를 품에 안았다. 그때, 연회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시종장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어라하, 이천 척에 이르는 당선이 덕물도 서쪽 바다에 출몰하였다 하옵니다. 속히 대전회의를 열어 방책을 세우소서."

   의자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의 함선이 덕물도(덕적도)에 이르다니, 이 지경이 되도록 서해의 순시선들은 무엇을 하였단 말이냐?"

   "며칠 전부터 안개가 자욱하여 순시선들이 미처 당선의 침입을 발견치 못한 듯하옵니다."

   사색이 된 의자왕이 연회를 파하고 연회장을 나서려 할 때, 시종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오며 아뢰었다.

   "어라하, 오만 쯤 되는 신라군이 금돌성에 이르렀다 하옵니다.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아국을 치려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금돌성은 사비성에서 가장 근접해 있는 신라의 성이었다. 의자왕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대전회의를 소집할 것이니라."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은 의자왕은 대전으로 들어가기 전 처소에 들러 4년 전 성충이 옥중에서 죽기 전에 남긴 혈서를 펼쳤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니한다 하였사오니, 바라건대 소신이 죽기 전, 한 말씀 아뢰고 죽고자 하나이다. 소신이 천하의 정세를 살피건대, 머지않아 전쟁이 있을 것이옵니다. 무릇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지형을 살펴 택하여야 하오니, 좁은 요로에서 적을 대적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만약 적국이 쳐들어오거든 육로는 탄현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고, 수로는 백강을 막아 험한 곳을 의지하여 싸운다면 나라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혈서를 읽는 의자왕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만고의 충신 성충을 옥에 가두어 죽게 만든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의자왕은 눈물을 글썽이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성충이여, 짐이 부덕하여 만고의 충신인 그대를 죽게 만들었도다! 짐의 부덕의 소치로 칠백 년 사직의 이 나라가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랴!"

   대전회의가 시작되자, 의자왕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경들도 알다시피, 무도한 신라가 이민족인 당을 끌어들여 아국을 송두리째 삼키려 하고 있다. 당과 신라의 동맹군이 이십만에 이른다 하니, 수만에 불과한 도성의 수비병으로 저들을 막기는 어려울 터, 지방군이 구원오기까지 버텨야 하는데, 당군과 신라군 어느 쪽을 먼저 치는 것이 좋겠는가?"

   좌평 의직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당군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온데, 수천리 길을 항해하여 왔으니 필시 노독이 쌓였을 터인즉, 저들이 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신속히 들이친다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라는 당의 원병만 믿고 아국을 업신여기고 쳐들어오는 것이니, 당군을 격파하면, 감히 아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당군을 먼저 치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의자왕이 대신들 중에 다른 의견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좌중을 둘러보자, 좌평 상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옵니다. 당군은 멀리 수천리 길을 왔기 때문에 필시 속전하려 들 것이오니, 그 서슬을 당하기 힘들 것인즉, 저들이 상륙할 때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아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친다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반면에 신라는 예전부터 아군에 자주 패하여 아군의 위세를 보기만 해도 두려워 떨 것이오니, 신라를 먼저 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의직의 말도 상영의 말도 그럴 듯 하여 의자왕은 어느 쪽의 말을 들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이때 계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금 고마미지에 있는 흥수는 성충에 못지아니한 지략가이오니, 그를 불러 하문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의자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좌평 흥수가 용병에 능하니, 고마미지에 귀향 가 있는 흥수에게 방책을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지금 당장 사자를 보내 흥수를 부르거라!"

   의자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임자가 반대하며 나섰다.

   "아니되옵니다. 흥수는 죄인이 아니옵니까? 죄인을 불러다 방책을 묻는다면, 어라하의 위엄이 손상될 것이오니, 이는 불가한 일이옵니다."

   "허면 흥수에게 사자를 보내 방책을 하문하겠노라."

   의자왕은 속히 흥수에게 사자를 보냈다. 반나절이 지난 후에서야 사자가 돌아와 흥수의 서신을 전했다.

   '도성 수비병은 수만에 불과하온데, 당군과 신라군의 수는 20만에 이르는 대군이라 하오니, 평야에서 대전한다면 승패를 예측하기 힘들 것이옵니다. 백강과 탄현은 험준하고 좁은 천연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들고 지켜도 능히 만 사람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이오니, 용맹한 병사를 보내어 당군이 백강을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며, 대왕께서는 도성을 굳게 지켜 양국의 군사가 군량이 떨어지고 지칠 때 힘껏 들이친다면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의자왕이 흥수의 계책을 보니 성충이 죽기 전 남긴 계책과 같았다. 의자왕은 사자를 시켜 흥수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흥수를 데려왔다면 좀 더 상세한 계책을 물어볼 수 있으련만......'

   의자왕이 대신들에게 흥수의 계책을 말하자, 임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사오니, 필시 임금과 조정을 원망할 터인데, 어찌 그 계책을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소신이 헤아리건대, 백강은 두 척의 배가 나란히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으니, 차라리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을 들어서게 하여 화공을 쓴다면, 이는 어망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또한 탄현은 두 필의 말이 나란히 다닐 수 없을 정도의 좁은 숲길로, 숲에 매복해 있다가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도록 한 후, 그 좁은 길에서 화공을 쓴다면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오니, 이와 같은 계책을 쓴다면 주유가 적벽대전에서 수만으로 조조의 백만대군을 섬멸한 것처럼 나당의 대군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계백이 임자의 의견에 반박하며 나섰다.

   "소신이 헤아리건대, 유신과 소정방은 지략이 뛰어난 장수로, 저들 또한 화공에 대비하여 순풍이 불기를 기다릴 터이니, 화공을 쓰기 쉽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오히려 백강은 이따금 강한 서풍이 부는데, 당 수군이 서풍과 조수를 타고 백강으로 들어오며 화공을 쓴다면, 열 배 가까이 많은 적을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겠사옵니까? 또한 탄현은 숲이 건조하여 화공에 취약하옵니다. 만약 아군이 숲에 매복하여 적들로 하여금 탄현에 들어오게 한다면, 오히려 아군이 화공에 당할 수 있사오니, 실로 위험한 계책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적이 요로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흥수의 계책이야말로 필승의 계책이오니, 마땅히 흥수의 계책으로 적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옵니다."

   계백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임자가 반박하며 나섰다.

   "아군의 열 배 가까이 되는 적을 상대하는 최상의 방책은 화공이옵니다. 소신이 아는 바로 지금 백강엔 동풍이 불고 있으니, 당 수군이 조수를 타고 좁은 백강에 들어서게 한 후 화공을 쓴다면 능히 섬멸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동풍이 부는데, 서풍이 불까 걱정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가 아니겠사옵니까? 또한 탄현은 숲이 울창하고 빼곡하여 수만의 병사가 매복해 있어도 모를 터이니, 매복해 있다가 신라군이 탄현을 지날 때 화공을 펼친다면 능히 섬멸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의자왕은 좁은 요로에 들어서게 한 후 화공으로 섬멸하자는 임자의 계책이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임자의 계책이 상책인 듯하구나. 누구를 보내면 좋겠는가?"

   임자가 대답했다.

   "의직이 수전에 능하니, 의직으로 하여금 당군을 막게 하옵시고, 계백은 신라군과 자주 싸웠사오니, 계백으로 하여금 신라군을 막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 무렵, 백제 조정은 은고왕후의 오라비 임자를 따르는 신하들과 행음에 빠진 의자왕에게 간언하다가 귀향간 흥수를 따르는 신하들 둘로 나뉘어 있었다. 만고의 간신 임자는 흥수를 따르는 계백과 의직을 꺼렸지만,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전투라 백제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 계백과 의직을 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의자왕 역시 이들의 재능을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좌평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의직, 계백, 그대들의 어깨에 나라의 명운이 걸려있으니 짐의 기대에 어긋나지 마라!"


출판사와의 협약으로 일부만 하이라이트로 발췌하였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