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기황후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4. 4. 30. 06:00

     기황후 조정우 역사소설

     


기황후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북카라반 | 2013-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픽션을 가미한 최고의 ‘역사 소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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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픽션을 가미한 최고의 역사소설! 

  

    기황후와 최영의 운명같은 사랑! 


    "기황후마마, 소생은 차마 왕명을 거역할 수 없나이다! 

    기황후마마를 지켜드릴 수 없는 소생을 용서하소서!"


    광활한 대원제국을 호령하고 

    최영과의 가슴 아픈 사랑을 해야 했던 

    기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이 오릇이 펼쳐진다!



    작가의 말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픽션을 가미한 최고의 역사소설! 

  

    기황후와 최영의 운명같은 사랑! 


    "기황후마마, 소생은 차마 왕명을 거역할 수 없나이다! 

    기황후마마를 지켜드릴 수 없는 소생을 용서하소서!"


    광활한 대원제국을 호령하고 

    최영과의 가슴 아픈 사랑을 해야 했던 

    기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이 오릇이 펼쳐진다!



    작가의 말


    기황후는 공녀 선발을 중단시키고 고려의 복색과 풍습을 원나라 전역에 유행시켰으며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에 편입시키려 했던 입성론立省論을 막은 것으로 알려진 여인이다. 반면 공민왕이 1356년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것에 대한 복수로 8년 후인 1364년 고려에 몽골군을 파병했다. 이런 기황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는 이런 논란의 와중에 있는 ‘기황후’를 소설로 쓰는 것이 적지 않게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급반전 속에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역사적 호기심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있었던 1364년에 최유의 모략에 속아 고려를 침략했다는 내용의 사과 서찰을 보냈다는 것이다.

기황후가 가문의 멸문에 대한 복수로 고려에 몽골군을 파병한 것은 우리 민족에 비극이지만 곧바로 공민왕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외교 문서를 보냄으로써 비극을 막으려고 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니었을까. 기황후는 공녀로 끌려가 숱한 역경을 헤치고 황후의 자리에 올라 30여 년간이나 대원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고려 말은 나라의 주권을 잃고 원나라의 정책에 좌지우지되었던 암흑의 세월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기황후가 공녀로 끌려간 지 2년 만인 1335년에 공녀 선발이 중단되었고, 공민왕 대에 원나라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기와 저폐(원나라의 종이 화폐)를 보냈다는 기록은 그녀가 고려를 위해 애쓴 흔적을 역력히 드러낸다.

    저자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서 전하는 “기황후의 묘가 경기도 연천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원나라를 호령하던 그녀가 이곳에 안치되었다는 점이 무언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혹시 연천에 사모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연천이 최영의 고향인 철원과 연접해 있어 기황후가 사모했던 사람이 불세출의 명장 최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천에서 기황후와 최영이 마주친 것은 아닐까?

한낱 힘없는 나라의 공녀로 차출되어 만리타국으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 지옥의 불구덩이 같은 몽골의 황궁에서 황후로 되살아나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거머쥐고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광활한 대륙을 호령했던 여인, 기황후! 그리고 최영과 가슴 아픈 사랑을 해야 했던 그녀의 삶이 이 소설에서 오롯이 전해진다.


 

    줄거리

 

드넓은 연천의 평지에서 청색 격구복을 입은 행주 고을의 기수들과 백색 격구복을 입은 철원 고을의 기수들이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격구 시합을 펼치고 있었다.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철원 고을의 소년이 전광석화처럼 행주의 기수들을 제치고 장시로 공을 후려쳐 구문 안으로 집어넣다. 행주, 철원 두 고을 처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준수한 소년은 최영이었다. 최영이 손을 들어 환호성에 답례하고 있는데, 기완자가 장시를 치켜든 채 최영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년 전 충숙왕은 여인이 격구하는 것을 금하여 부득이하게 남장을 하고 시합에 참가한 기완자는 최영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만 것이다. 며칠 후, 기자오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에게 사람을 보내 혼담을 청했지만, 최원직은 기자오의 집안이 부유한 데 비해, 자신의 집안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한동안 마음에 병이 생겨 앓아 누웠던 기완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최원직을 찾아갔다. 최원직은 지극히 아름다운 미인이면서 품행에 기품 있는 기완자를 보자 갈등했으나, 기완자가 가난한 자신의 집안에 시집와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 지씨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되어 혼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영이 아버지 3년상을 마칠 무렵, 기완자의 혼담을 받아들인 최영은 임시 방편으로 매파를 데려와 기완자와 혼약을 맺었다. 혼약을 맺은 여인은 공녀로 선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결혼도감 관원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기완자를 공녀로 차출해 가버렸다.  최영과 기자오는 기완자를 공녀 명단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결혼도감을 찾아가고, 충숙왕에게 알현을 청했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최영은 기철과 박불화를 비롯한 행주 고을의 사내들, 유화의 오라비 유총, 유씨 가문의 하인들과 함께 원나라 사신단을 습격하여 기완자를 구하려 했지만, 원나라 최고의 용장 탈탈이 이끄는 몽골군의 철통같은 방어망과 무시무시한 대포의 위력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기완자는 대내 총관 독만질아의 주선으로 겨우 열네 살인 황제 토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때 토곤은 허울뿐인 허수아비 황제로 당시 원나라의 권력은 황후 타나실리의 아비인 권신 엘테무르의 손에 있었다. 아버지 명종이 엘테무르에게 독살당한 토곤이 자신의 신변에 대해 불안해하자 기완자는 자신에게 사모의 정을 품은 탈탈을 황궁 시위대장에 임명할 것을 권했다. 토곤이 기완자의 말을 받아들여 탈탈을 시위대장에 임명하자, 엘테무르는 거사를 일으켜 토곤을 폐위시키려 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말미를 달라고 애원한 타나실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거사를 미루었다.

한편 오래전부터 기완자를 사모해왔던 박불화는 귀비에 책봉된 기완자를 곁에서 지키기 위해 거세하고 환관이 되었다. 기완자가 서서히 황궁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을 무렵, 엘테무르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급사했고, 대도는 실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엘테무르의 두 동생 사둔과 답리는 야심이 큰 인물이 못되었다. 사둔이 죽자, 문종의 양자로 황제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은 탑자해가 당기세를 부추겨 숙부인 답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어사대부 탈탈이 당기세를 죽인데 이어, 최영이 수천의 고려 의병을 이끌고 와 함락 직전인 황궁을 구원하고 답리를 죽이자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타나실리 황후는 폐위되었고, 토곤은 기완자를 황후로 맞으려 했지만, 황후족인 옹기라트 가문인 우승상 백안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기완자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자, 우승상 백안은 기완자만을 총애하는 토곤의 편애에 불만을 품고, 황태제 연첩고사의 어미인 황태후 보다시리와 손을 잡고 토곤을 능가하는 권력을 거머쥔 후 자기 멋대로 이민족 차별법을 만들어 시행하는 전횡을 자행했다. 어느날 백안이 기황후의 탕약에 짐독을 넣어 암살을 시도한 것이 발견되자, 백안에 횡포에 참다 못한 토곤은 결국 탈탈에게 백안을 추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자신의 양부이자 백부인 백안을 추포하라는 토곤의 명을 받은 탈탈은 눈물을 머금고 백안에게 가문의 근거지인 통주로 사냥을 떠날 것을 제안해 대도성 밖으로 유인한 후, 거사를 일으켜 백안을 실각시켰다. 제2황후에 책봉된 기황후는 황태후의 직속 기관 휘정원을 황후의 직속 기관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원나라의 재정과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었다.

당시, 원나라 전국 각지에서 홍건적을 비롯한 한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중 장사성이 대운하의 요충지를 장악하자, 원나라에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 응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공민왕은 대도의 고려인을 주축으로 응원군을 결성하자는 최영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병 2,000에 모집병 3,000, 총 5,000의 병력을 파병했고, 최영은 기황후의 주선으로 대도에서 1만 8,000의 고려인을 모집하여 원정에 나섰다. 최영이 이끄는 2만 3,000의 고려군은 연전연승하여 장사성이 점령했던 30여 성을 원나라 조정에 돌려준 후 장사성의 근거지인 고우에서 원나라 사령관 탈탈이 이끄는 20만 원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최영의 고려군이 용전분투하여 고우성의 성문을 열었지만, 탈탈은 이사제의 말에 공격을 주저했다. 그때 천지를 개벽시킬 듯한 최영의 용맹을 본 탈탈은 20여 년 전 복면한 무리들을 이끌고 자신이 호위대장으로 있던 사신단을 기습했던 자가 최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최영을 하옥시켰다. 이로 인해 고려군이 진영을 떠났고, 원나라 단독으로 고우성을 공격했지만, 토곤이 탈탈을 공이 없다 책망하여 해임시키자, 원군이 동요하는 틈을 타 공격에 나선 장사성군에게 원의 20만 대군이 궤멸당했다.

이후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공민왕은 고려에서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기황후의 일가를 멸문시켰다. 기황후는 공민왕의 배신에 격노했지만,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를 칠 여력이 없었다. 홍건적의 난이 진압된 1363년, 죽은 줄 알았던 기철의 넷째 아들 기새의 부추김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위에 세운다는 조서를 발표했고, 이듬해 1364년 1월, 아이유시리다라가 2만 병력을 이끌고 고려 원정에 나섰지만, 수주에서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에 참패하여 퇴각했다.

당시 원나라 조정은 기황후를 따르는 친황태자파와 기황후를 반대하는 친황제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황후가 친황제파의 수장인 태평과 노적신을 해임시키자, 노적신은 패라첩목아에게 가서 거병을 부추겼다. 패라첩목아는 대도성을 점령하여 조정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에 아이유시리다라가 자신을 지지하는 태원의 군벌 왕보보에게 가서 원군을 청했다. 왕보보는 이듬해 거병을 일으켜 30만 대군을 이끌고 대도로 진격했고, 패라첩목아는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1368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이 원나라가 내전으로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원나라 정벌에 나섰다. 다급해진 원나라 황제 토곤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응원군을 보내달라 청했으나, 고려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기황후가 눈물을 흘리며 대도를 사수할 것을 간청했으나, 토곤은 대도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로 퇴각할 것을 결정했다. 도읍을 잃은 원나라는 그 여파로 중원의 땅을 모두 잃고, 결국 그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몽골 초원으로 쫓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기황후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황제가 된 아이유시리다라에게 “어미가 죽거든 고려의 연천에 묻어주시오. 어미에게 연천은 말할 수 없이 뜻깊은 곳이라오. 그리해주시겠소?” 하고 당부한다. 기황후는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 차례

 

숙명적인 만남 … 7

어머니의 가야금 … 26

금혼령 … 39

하늘이시여! … 54

추격 … 70

문화 유씨 … 82

기습 … 96

압록강 … 112

피할 수 없는 운명 … 124

엇갈린 인연 … 138

질투 … 151

악몽 같은 현실 … 169

솔롱고 … 182

사내의 진심 … 200

엘테무르의 신신당부 … 215

반란 … 229

혼례식 … 246

대의멸친 … 259

제2황후에 오르다 … 273

공민왕과 노국공주 … 285

18년 만에 맺어진 인연 … 297

조일신의 난 … 312

고우성의 싸움 … 324

멸문지화 … 345

연천 … 369

 

작가의 말 … 390



     본문 하일라이트


    넓이가 수백 보나 되는 평지에서 백의를 입은 행주 고을과 청의를 입은 철원 고을의 기수들이 고을의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아게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접전 중에 열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철원 고을의 소년이 전광석화처럼 행주 고을의 기수들을 제친 후 공을 구문 안으로 접어 넣자, 응원온 철원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영이가 최고다!"

    행주와 철원 두 고을 처녀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준수한 소년의 이름은 최영이었다.

손을 들어 고을 사람들의 환호성에 답레하는 최영의 모습에 기완자는 가슴이 떨렸다.

   '이웃 고을 철원에 이와같은 인물이 있었구나!'  -숙명적인 만남- 


    최영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이토록 기품있고 아름다운 며느리를 마다할 어미가 있으랴. 기완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다. 이내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모곡'이었다. 어머님을 여읜 최영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려는 것일까. 애잔하게 마음을 적시는 가야금 소리에 최영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가야금을 타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모곡'에 이어 '가시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담은 곡조였다. 백옥처럼 고운 섬섬옥수로 가야금을 뜯는 기완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기완자의 애절한 눈빛이 최영을 사로잡았다. 최영은 그녀가 곡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낭자, 나 또한 그대를 진심으로 사모하나, 아버님께서 그대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자식된 도리로 어찌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소.' -어머니의 가야금-


3년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 이씨로부터 참지 박연화의 아들 박불화와 혼인하라 종용받고 있던 기완자가 혼담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평리 조희수의 아들 조희충에게 시집간 큰 언니 기연자가 찾아와 조만간 조정에서 공녀를 선발하기 위해 금혼령을 내릴 것이라는 실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원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고려 조정에 공녀를 선발해 보내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금혼령이 발표되기 전에 혼약이라도 해야 공녀로 선발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금혼령-


   전광석화처럼 빠른 최영의 몸놀림에 몽고 병사들이 아연실색하며 주춤거렸다. 최영은 몽고 병사들이 도망칠 겨를도 없이 비호처럼 날렵하게 장시를 휘둘러 차례차례로 쓰러뜨렸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보다 불과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이 이토록 용맹할 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순식간에 십여 명의 몽고군을 쓰러뜨린 최영은 멍하니 서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 끌어 마차에 태웠다. 전속력으로 마차를 몰고 가던 최영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소생은 최영이라 하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일을 마친 후에 그대를 집에 바래다 주려 하는데, 그리해도 괜찮겠소?"

   몽고군이 따라올까 조바심난 얼굴로 마차 밖을 바라보던 소녀는 최영의 인사에 두손을 모아 답례하며 말했다. 

   "괜찮다마다요. 소녀는 유화라 하오. 구해주신 도령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오."

   -하늘이시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날이 바뀌어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최영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영도령, 어서 일어나시오!"

   박불화였다. 최영은 탈진한 상태였지만, 박불화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불화 형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박불화의 말에 최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불화 형님도 누이가 공녀로 선발되었습니까?"

    기완자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박불화였다. 이러한 박불화의 마음을 짐작조차 못하는 최영으로서는 박불화 역시 누이가 공녀로 선발되어 여기까지 온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박불화가 다급히 말했다. 

    "완자 누이 때문에 온 것이오. 몽고 놈들이 벌써 완자 누이를 데리고 떠났으니, 속히 추격해야 하오." -추격- 


   유총이 공손히 말했다.

   "실은 소생의 아버님이 은공께서 누이를 구하신 이야기와 몽고군에 정혼녀를 빼앗긴 일을 듣고 눈물을 흘리시며, '내, 금지옥엽 딸을 잃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거늘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큰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아니하면, 어찌 사람의 도리를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시며 소생에게 명을 내리시길, 목숨을 걸고라도 누이를 구해주신 은공의 은혜를 갚으라 하시어, 무예에 능한 가문의 하인 백 명을 이끌고 온 것이오. 곧 나머지 하인들이 무기를 가져올 것이니, 분부만 내리시오."

   순간 기철과 박불화를 비롯한 행주 고을의 사내들이 나직이 환호성을 질렀다. 문화 유씨는 무에 있어 고려 최고 명문 가문이 아니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날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비록 원나라 사신단 호위군이 2천이라 하지만, 지금은 좁고 험준한 산길에 머무르고 있어 기습만 성공한다면 기완자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문화 유씨-


   탈탈이 명을 내리기도 전에 복면한 무리들이 숲속에서 쏟아져나왔다.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기완자는 수레의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십, 아니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복면한 무리들이 사신단 행렬을 덮쳐왔다. 그중 한 명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앞장서 달려오다 몽고군의 말을 빼앗아 타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십여 명의 몽고군을 베고 기완자가 탄 수레 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얼굴이 복면에 가렸지만, 풍채만 봐도 기완자는 최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영도령! 영도령이 틀림없다!'

    최영이 기완자가 탄 수레로 말을 몰아가려는 순간, 탈탈이 최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구나!"

   탈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영의 검이 섬광을 내뿜으며 탈탈을 내리쳤다. 탈탈이 검을 들어 막는 순간, 태산처럼 강맹한 최영의 검에 밀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 했다. 실로 엄청난 힘에 탈탈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탈탈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최영의 검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다시 탈탈을 향해 날아왔다. 탈탈은 재빨리 검을 휘둘러 최영의 검을 막았다. 순간 '챙' 소리가 나며 탈탈의 검이 부러졌다. 탈탈이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최영의 검이 빗나가고 말았다. 단 두 합만에 몽고 최고의 용사인 탈탈이 최영의 검에 밀려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기실 탈탈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기완자를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검을 휘두른 최영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싸우는 최영을, 설령 역발산기개세라는 항우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당할 수 없으리라!   -기습-


   기철을 비롯한 오라비들이 침묵하자, 기완자가 말을 이었다. 

   "아무쪼록 더이상 소녀 생각은 마옵소서. 오라버니들께서 부모님을 잘 모시기만 한다면, 소녀 더이상의 소원이 없을 터, 소녀의 청을 부디 저버리지 마소서."

   기철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그것이 정녕 네가 원하는 바란 말이냐? 영도령과 살고 싶지 않느냐?" 

   순간 기완자의 가슴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듯하였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최영과 영영 이별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다만, 가문과 최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기완자는 공녀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기완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소녀...... 영도령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 이제 마음을 비웠사오니, 소녀의 뜻을......"

   -압록강-


   순간 기완자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잊어달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완자가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부디...... 소녀를 잊으소서......"

   최영이 눈물을 글썽인 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 어찌 그대를 잊겠소?"

   기완자는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잊으셔야만 하옵니다......"

   어쩐지 단호한 기완자의 목소리에 최영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찌 잊으란 말이오?"

   기완자의 목숨이 살아있는 한 어찌 최영을 잊을 수 있으랴! 이미 엇갈린 인연이기에 이별할 수 밖에...... 기완자는 울음보가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이미 끝난 인연이거늘, 어찌 잊지 아니할 수 있겠나이까?"

   "아......"

   최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마디 탄식 소리에 기완자는 말할 수 없이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기완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황제의 총애를 입은 몸이옵니다. 이것이 소녀의 운명인 듯하오니, 부디, 소녀를 잊으소서......" -엇갈린 인연-


   '정녕 내가 귀비가 되었단 말인가!'

   박불화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기완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마마를 귀비에 봉하셨사옵니다."

   순간 기완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

   기완자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박불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소인에게 귀비마마를 잘 모시라 명을 내리셨사오니, 이제 소인이 귀비마마를 지켜드리겠나이다."

   기완자의 눈과 마주친 박불화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시야에 박불화가 입은 푸른 관복이 들어오자, 기완자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악!"

   푸른색의 박불화의 관복은 다름 아닌 환관의 관복이 아닌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질겁하며 지르는 기완자의 비명 소리에 박불화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박불화는 황후의 무참한 채찍질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기완자를 곁에서 지키고자 거세하고 환관이 되었던 것이다. 

   "마마, 부디 진정하소서!"

 가늘게 째지는 듯한 목소리. 거세한 사내의 목소리가 아닌가!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박불화의 목소리가 기완자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말았다. -악몽같은 현실-


   바로 그때 교체되어 들어간 고려의 기수가 공을 몰고 전광석화처럼 질주하는 동작이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신들린듯이 공을 몰아 십여 명의 원나라 기수를 차례차례로 제치고 공을 구문 안에 집어 넣은 고려 기수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기완자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다. 

   '서방님!'

   그는 바로 기완자가 꿈에도 그리워하던 최영이 아닌가! 어찌나 놀랐는지 기완자는 정신이 아찔하여 쓰러질 뻔 하였다. 박불화가 옆에서 붙잡아 겨우 중심을 잡은 기완자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서방님! 참으로 보고 싶었사옵니다!'

   이 감격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으랴! 기완자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을 크게 뜨고 최영을 바라보았다. 그새 더 늠름해진 모습이었다.  멀리서 봐서 그런 것일까. 보면 볼수록 사무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 차라리 오지 말 것을. 그리움이 뼈에 사무칠 지경이었다. 

   어느새 최영이 원나라 기수의 공을 가로챘다.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나는 듯 최영은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여 앞을 가로막은 원나라 기수들을 제친 후 힘껏 공을 때렸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빨려가듯 구문 안으로 들어갔다. 최영이 신출귀몰한 격구술을 선보이며 연거푸 두 골을 넣자, 누각에서 구경 중이던 토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참으로 신묘한 묘기로다!"  -솔롱고-


    "탈탈공께서 어찌 내게 이토록 마음을 쓰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소."

   작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은 탈탈의 목소리가 심히 떨려왔다. 

   "이 탈탈은 귀비마마께 마음을 빼앗겼나이다. 귀비마마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이 탈탈도 사랑할 것이고, 미워하시는 것은 이 탈탈도 미워할 것이옵니다. 장부가 어찌 마음에 품은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겠나이까?"

   탈탈이 마침내 기완자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탈탈은 자신이 한 말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탈탈이 목숨을 걸고 진심을 드러내자,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낸 기완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탈탈이 자리를 떠나자, 기완자는 가슴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내의 진심에 어찌 여인의 마음이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내의 진심-


   이미 백안의 집 주변을 포위한 어사대의 병사들이 쉴새 없이 화살비를 쏟아부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마를 뚫고 가까스로 대문을 빠져나온 당기세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어사대의 화살에 맞고 쓰러지기 일쑤였고, 간신히 화살을 피해 도망친다 해도 길을 지키고 있던 어사대 병사들의 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일만에 이르는 당기세의 병사들이 수천에 불과한 어사대 병사들에게 압도되고 만 것이다. 

   호위군과 함께 겨우 불길에 휩싸인 대문을 뚫고 나온 당기세는 철갑옷을 입은 덕분에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나갔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탈탈이 당기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방은 이미 어사대 병사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당기세가 괴성을 내지르며 탈탈을 덮쳤지만, 순간 탈탈의 검이 당기세의 가슴을 찔렀다.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진 당기세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죽어갔다. 

   '나 당기세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권력에 눈이 어두워 황후마마께서 아들을 낳기 전에는 거사를 일으키지 말라는 아버님의 뜻을 어겨 죽음을 자초했구나! 황후마마, 황후마마의 뜻을 저버린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반란-


   며칠 후 최영이 전유겸을 찾아갔다. 혼담을 꺼내기가 멋쩍어 잠시 침묵하는 최영에게 전유겸이 말문을 열었다. 

  "영공께서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하구려."

  "실은 유겸공께 혼담을 청하러 왔소."

  "누구의 혼담을 말씀하시는게요?"

  난데없는 혼담에 의아해 하는 전유겸에게 최영이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다.

  "소생의 누이가 유겸공께 마음이 있다 하니, 유겸공께서 혼담을 받아주시면 더없이 고맙겠소."

  전유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영공의 누이는 천하에 둘도 없는 참한 규수인데, 내 어찌 혼담을 마다하겠소."

    최영과 전유겸은 민족이 다름에도 피를 나눈 형제보다 정이 깊었다. 그들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혼례식-


    박불화가 탕제를 한모금 마시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경련으로 일그러지더니 탕제를 토해냈다. 

   "독, 독이......"

   박불화는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기완자가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불화공! 정신차리시오! 당장 어의를 부르거라!"

   잠시 후 당도한 어의가 탕제를 살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탕제에 짐독이 들어있사옵니다!"

   짐이라는 새의 깃털에서 채취하는 짐독은 조금만 먹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맹독으로 무색무취한데다 은수저로도 검출되지 않아 독을 검수하는 궁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완자는 분노로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사람이 이토록 악할 수 있단 말인가! 기완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기필코 나를 죽이려한 흉수를 색출하여 댓가를 치르게 하리라!' -대의멸친-


   복사꽃이 흐드리지게 핀 봄날,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년이 산수화를 그리느라 붓놀림에 심취해 있었다. 산수화에는 젊은 두 남녀가 말을 나란히 달리며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산수화 속의 사내는 청년을 쏙 빼어닮은 것이 자신을 그린 것이 틀림없었는데, 여인은 누구일까. 청년이 산수화 속의 여인을 넋나간 듯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보탑실리, 그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구려! 내 진심을 그대에게 알릴 수 조차 없는 이 고통을 그 누가 알겠소!"

   청년은 어언 약관의 나이가 된 왕기로, 그가 보탑실리를 사모한 지도 어느새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6년 전, 왕기는 보탑실리와의 혼담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그녀와 혼인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혼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명덕태후는 몽고 여인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탈탈은 문득 20여년 전 무리들을 이끌고 사신단을 기습한 복면의 사내가 떠올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맹한 검법으로 두 합만에 자신의 검을 두동강냈던 사내가 최영이 아닐까! 최영이 휘두른 검에 장사성군의 검이 두동강나는 순간, 탈탈이 외쳤다. 

   "그자다!"

   최영의 힘은 실로 엄청났다. 20여년 전, 검술을 겨루었을 때 분명히 자신이 우위였는데, 지금에야 최영이 실력을 감춘 것임을 깨달았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얼마 후 고려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원군이 공격에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최영이 퇴각을 결정한 것이다. 

   본진으로 돌아온 최영은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탈탈의 막사를 찾아갔다.

   "우리 고려군이 목숨을 걸고 싸워 성문을 열었거늘, 어찌 공격에 나서지 않으신게요?"

   순간 탈탈이 검을 뽑자, 수십의 원나라 장수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최영도 검을 뽑아 들었다. 

   "대체 무엇하는 것이오?"

   탈탈이 검으로 최영을 겨누며 호통쳤다. 

   "나는 대원제국의 우승상이다. 감히 항거하지 마라!"

   수십 명의 장수들을 혼자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영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자 탈탈이 말했다.

   "검을 이리로 던져라!" 

   최영이 순순히 검을 던지자 탈탈이 검을 겨눈 채 외쳤다. 

   "모두 물러가라."

   단둘이 남게 되자, 탈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나를 잘도 속였구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20여년 전, 네가 복면한 무리들을 이끌고 대원의 사신단을 습격한 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고우성의 싸움-


   고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원군을 추격했다. 압록강에 이른 원군은 행군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때는 이미 봄이라 얼음이 녹아버리고 만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원군은 배수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배수진을 친 원군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미 승세는 기울어 전사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 사이 왕보화가 간신히 나룻배 하나를 구해 아이유시리다라를 태웠다. 왕보화가 배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자 아이유시리다라가 손짓하며 말했다. 

   "보화 낭자도 타시오."

   왕보화가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남아서 적군과 싸우겠나이다. 황태자께서는 아무쪼록 옥체 무탈히 보존하옵소서."

   아이유시리다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아니되오! 보화 낭자를 두고 떠날 수 없소! 이건 명이오! 배에 타시오!"

   왕보화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명에 따를 수 없는 소녀를 부디 용서하옵소서."

   어느새 나룻배는 육지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멸문지화-


   누가 한많은 여인의 세월을 시샘했던가. 몽고의 황량한 초원에서 환갑의 나이를 넘긴 기황후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황제가 된 아이유시디라다에게 당부했다. 

   "어미가 죽거든 고려의 연천에 묻어 주시오. 어미에게 연천은 말할 수 없이 뜻깊은 곳이라오. 그리 해주시겠소?"

   연천은 기황후가 최영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곳에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 기황후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아이유시리다라가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가 어찌 어마마마의 뜻을 어길 수 있겠나이까?"

   기황후는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제 어미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소...... 부디 명군이 되어 중원을 회복토록 하시오......"

    이 말을 남긴 채 기황후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뜻하지 않게 공녀로 끌려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기황후는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