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기황후 조정우 역사소설 하일라이트

조정우 2014. 1. 29. 06:00

  기황후 조정우 역사소설 하이라이트


기황후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북카라반 | 2013-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픽션을 가미한 최고의 ‘역사 소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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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픽션을 가미한 최고의 역사소설! 

  

    기황후와 최영의 운명같은 사랑! 


    "기황후마마, 소생은 차마 왕명을 거역할 수 없나이다! 

    기황후마마를 지켜드릴 수 없는 소생을 용서하소서!"


    광활한 대원제국을 호령하고 

    최영과의 가슴 아픈 사랑을 해야 했던 

    기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이 오릇이 펼쳐진다!


    넓이가 수백 보나 되는 평지에서 백의를 입은 행주 고을과 청의를 입은 철원 고을의 기수들이 고을의 자존심을 걸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아게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접전 중에 열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철원 고을의 소년이 전광석화처럼 행주 고을의 기수들을 제친 후 공을 구문 안으로 접어 넣자, 응원온 철원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영이가 최고다!"

    행주와 철원 두 고을 처녀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준수한 소년의 이름은 최영이었다.

손을 들어 고을 사람들의 환호성에 답레하는 최영의 모습에 기완자는 가슴이 떨렸다.

   '이웃 고을 철원에 이와같은 인물이 있었구나!'  -숙명적인 만남- 


    최영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이토록 기품있고 아름다운 며느리를 마다할 어미가 있으랴. 기완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다. 이내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울려퍼졌다. '사모곡'이었다. 어머님을 여읜 최영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려는 것일까. 애잔하게 마음을 적시는 가야금 소리에 최영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가야금을 타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모곡'에 이어 '가시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담은 곡조였다. 백옥처럼 고운 섬섬옥수로 가야금을 뜯는 기완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기완자의 애절한 눈빛이 최영을 사로잡았다. 최영은 그녀가 곡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낭자, 나 또한 그대를 진심으로 사모하나, 아버님께서 그대와의 혼인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자식된 도리로 어찌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소.' -어머니의 가야금-


3년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 이씨로부터 참지 박연화의 아들 박불화와 혼인하라 종용받고 있던 기완자가 혼담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평리 조희수의 아들 조희충에게 시집간 큰 언니 기연자가 찾아와 조만간 조정에서 공녀를 선발하기 위해 금혼령을 내릴 것이라는 실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원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고려 조정에 공녀를 선발해 보내달라 요구했던 것이다. 금혼령이 발표되기 전에 혼약이라도 해야 공녀로 선발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금혼령-


   전광석화처럼 빠른 최영의 몸놀림에 몽고 병사들이 아연실색하며 주춤거렸다. 최영은 몽고 병사들이 도망칠 겨를도 없이 비호처럼 날렵하게 장시를 휘둘러 차례차례로 쓰러뜨렸다.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보다 불과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이 이토록 용맹할 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순식간에 십여 명의 몽고군을 쓰러뜨린 최영은 멍하니 서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 끌어 마차에 태웠다. 전속력으로 마차를 몰고 가던 최영이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소생은 최영이라 하오. 급한 일이 있어 먼저 일을 마친 후에 그대를 집에 바래다 주려 하는데, 그리해도 괜찮겠소?"

   몽고군이 따라올까 조바심난 얼굴로 마차 밖을 바라보던 소녀는 최영의 인사에 두손을 모아 답례하며 말했다. 

   "괜찮다마다요. 소녀는 유화라 하오. 구해주신 도령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오."

   -하늘이시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날이 바뀌어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최영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영도령, 어서 일어나시오!"

   박불화였다. 최영은 탈진한 상태였지만, 박불화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불화 형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박불화의 말에 최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불화 형님도 누이가 공녀로 선발되었습니까?"

    기완자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박불화였다. 이러한 박불화의 마음을 짐작조차 못하는 최영으로서는 박불화 역시 누이가 공녀로 선발되어 여기까지 온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박불화가 다급히 말했다. 

    "완자 누이 때문에 온 것이오. 몽고 놈들이 벌써 완자 누이를 데리고 떠났으니, 속히 추격해야 하오." -추격- 


   유총이 공손히 말했다.

   "실은 소생의 아버님이 은공께서 누이를 구하신 이야기와 몽고군에 정혼녀를 빼앗긴 일을 듣고 눈물을 흘리시며, '내, 금지옥엽 딸을 잃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거늘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큰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아니하면, 어찌 사람의 도리를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시며 소생에게 명을 내리시길, 목숨을 걸고라도 누이를 구해주신 은공의 은혜를 갚으라 하시어, 무예에 능한 가문의 하인 백 명을 이끌고 온 것이오. 곧 나머지 하인들이 무기를 가져올 것이니, 분부만 내리시오."

   순간 기철과 박불화를 비롯한 행주 고을의 사내들이 나직이 환호성을 질렀다. 문화 유씨는 무에 있어 고려 최고 명문 가문이 아니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날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비록 원나라 사신단 호위군이 2천이라 하지만, 지금은 좁고 험준한 산길에 머무르고 있어 기습만 성공한다면 기완자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문화 유씨-


   탈탈이 명을 내리기도 전에 복면한 무리들이 숲속에서 쏟아져나왔다.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기완자는 수레의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십, 아니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복면한 무리들이 사신단 행렬을 덮쳐왔다. 그중 한 명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앞장서 달려오다 몽고군의 말을 빼앗아 타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십여 명의 몽고군을 베고 기완자가 탄 수레 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얼굴이 복면에 가렸지만, 풍채만 봐도 기완자는 최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영도령! 영도령이 틀림없다!'

    최영이 기완자가 탄 수레로 말을 몰아가려는 순간, 탈탈이 최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혈혈단신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구나!"

   탈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영의 검이 섬광을 내뿜으며 탈탈을 내리쳤다. 탈탈이 검을 들어 막는 순간, 태산처럼 강맹한 최영의 검에 밀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 했다. 실로 엄청난 힘에 탈탈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탈탈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최영의 검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다시 탈탈을 향해 날아왔다. 탈탈은 재빨리 검을 휘둘러 최영의 검을 막았다. 순간 '챙' 소리가 나며 탈탈의 검이 부러졌다. 탈탈이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최영의 검이 빗나가고 말았다. 단 두 합만에 몽고 최고의 용사인 탈탈이 최영의 검에 밀려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기실 탈탈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기완자를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검을 휘두른 최영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싸우는 최영을, 설령 역발산기개세라는 항우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당할 수 없으리라!   -기습-


   기철을 비롯한 오라비들이 침묵하자, 기완자가 말을 이었다. 

   "아무쪼록 더이상 소녀 생각은 마옵소서. 오라버니들께서 부모님을 잘 모시기만 한다면, 소녀 더이상의 소원이 없을 터, 소녀의 청을 부디 저버리지 마소서."

   기철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그것이 정녕 네가 원하는 바란 말이냐? 영도령과 살고 싶지 않느냐?" 

   순간 기완자의 가슴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듯하였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최영과 영영 이별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다만, 가문과 최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기완자는 공녀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기완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소녀...... 영도령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 이제 마음을 비웠사오니, 소녀의 뜻을......"

   -압록강-


   순간 기완자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잊어달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완자가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부디...... 소녀를 잊으소서......"

   최영이 눈물을 글썽인 채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 어찌 그대를 잊겠소?"

   기완자는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잊으셔야만 하옵니다......"

   어쩐지 단호한 기완자의 목소리에 최영은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찌 잊으란 말이오?"

   기완자의 목숨이 살아있는 한 어찌 최영을 잊을 수 있으랴! 이미 엇갈린 인연이기에 이별할 수 밖에...... 기완자는 울음보가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이미 끝난 인연이거늘, 어찌 잊지 아니할 수 있겠나이까?"

   "아......"

   최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외마디 탄식 소리에 기완자는 말할 수 없이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하며 기완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황제의 총애를 입은 몸이옵니다. 이것이 소녀의 운명인 듯하오니, 부디, 소녀를 잊으소서......" -엇갈린 인연-


   '정녕 내가 귀비가 되었단 말인가!'

   박불화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기완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마마를 귀비에 봉하셨사옵니다."

   순간 기완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

   기완자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박불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상께서 소인에게 귀비마마를 잘 모시라 명을 내리셨사오니, 이제 소인이 귀비마마를 지켜드리겠나이다."

   기완자의 눈과 마주친 박불화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시야에 박불화가 입은 푸른 관복이 들어오자, 기완자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악!"

   푸른색의 박불화의 관복은 다름 아닌 환관의 관복이 아닌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질겁하며 지르는 기완자의 비명 소리에 박불화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박불화는 황후의 무참한 채찍질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기완자를 곁에서 지키고자 거세하고 환관이 되었던 것이다. 

   "마마, 부디 진정하소서!"

 가늘게 째지는 듯한 목소리. 거세한 사내의 목소리가 아닌가!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박불화의 목소리가 기완자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말았다. -악몽같은 현실-


   바로 그때 교체되어 들어간 고려의 기수가 공을 몰고 전광석화처럼 질주하는 동작이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신들린듯이 공을 몰아 십여 명의 원나라 기수를 차례차례로 제치고 공을 구문 안에 집어 넣은 고려 기수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기완자는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다. 

   '서방님!'

   그는 바로 기완자가 꿈에도 그리워하던 최영이 아닌가! 어찌나 놀랐는지 기완자는 정신이 아찔하여 쓰러질 뻔 하였다. 박불화가 옆에서 붙잡아 겨우 중심을 잡은 기완자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서방님! 참으로 보고 싶었사옵니다!'

   이 감격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으랴! 기완자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을 크게 뜨고 최영을 바라보았다. 그새 더 늠름해진 모습이었다.  멀리서 봐서 그런 것일까. 보면 볼수록 사무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 차라리 오지 말 것을. 그리움이 뼈에 사무칠 지경이었다. 

   어느새 최영이 원나라 기수의 공을 가로챘다. 마치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나는 듯 최영은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여 앞을 가로막은 원나라 기수들을 제친 후 힘껏 공을 때렸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빨려가듯 구문 안으로 들어갔다. 최영이 신출귀몰한 격구술을 선보이며 연거푸 두 골을 넣자, 누각에서 구경 중이던 토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참으로 신묘한 묘기로다!"  -솔롱고-


    "탈탈공께서 어찌 내게 이토록 마음을 쓰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소."

   작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은 탈탈의 목소리가 심히 떨려왔다. 

   "이 탈탈은 귀비마마께 마음을 빼앗겼나이다. 귀비마마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이 탈탈도 사랑할 것이고, 미워하시는 것은 이 탈탈도 미워할 것이옵니다. 장부가 어찌 마음에 품은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겠나이까?"

   탈탈이 마침내 기완자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탈탈은 자신이 한 말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탈탈이 목숨을 걸고 진심을 드러내자,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낸 기완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오면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탈탈이 자리를 떠나자, 기완자는 가슴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내의 진심에 어찌 여인의 마음이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내의 진심-


   이미 백안의 집 주변을 포위한 어사대의 병사들이 쉴새 없이 화살비를 쏟아부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마를 뚫고 가까스로 대문을 빠져나온 당기세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어사대의 화살에 맞고 쓰러지기 일쑤였고, 간신히 화살을 피해 도망친다 해도 길을 지키고 있던 어사대 병사들의 검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일만에 이르는 당기세의 병사들이 수천에 불과한 어사대 병사들에게 압도되고 만 것이다. 

   호위군과 함께 겨우 불길에 휩싸인 대문을 뚫고 나온 당기세는 철갑옷을 입은 덕분에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나갔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탈탈이 당기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방은 이미 어사대 병사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당기세가 괴성을 내지르며 탈탈을 덮쳤지만, 순간 탈탈의 검이 당기세의 가슴을 찔렀다.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진 당기세는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죽어갔다. 

   '나 당기세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권력에 눈이 어두워 황후마마께서 아들을 낳기 전에는 거사를 일으키지 말라는 아버님의 뜻을 어겨 죽음을 자초했구나! 황후마마, 황후마마의 뜻을 저버린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반란-


   며칠 후 최영이 전유겸을 찾아갔다. 혼담을 꺼내기가 멋쩍어 잠시 침묵하는 최영에게 전유겸이 말문을 열었다. 

  "영공께서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하구려."

  "실은 유겸공께 혼담을 청하러 왔소."

  "누구의 혼담을 말씀하시는게요?"

  난데없는 혼담에 의아해 하는 전유겸에게 최영이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다.

  "소생의 누이가 유겸공께 마음이 있다 하니, 유겸공께서 혼담을 받아주시면 더없이 고맙겠소."

  전유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영공의 누이는 천하에 둘도 없는 참한 규수인데, 내 어찌 혼담을 마다하겠소."

    최영과 전유겸은 민족이 다름에도 피를 나눈 형제보다 정이 깊었다. 그들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혼례식-


    박불화가 탕제를 한모금 마시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경련으로 일그러지더니 탕제를 토해냈다. 

   "독, 독이......"

   박불화는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기완자가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불화공! 정신차리시오! 당장 어의를 부르거라!"

   잠시 후 당도한 어의가 탕제를 살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탕제에 짐독이 들어있사옵니다!"

   짐이라는 새의 깃털에서 채취하는 짐독은 조금만 먹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맹독으로 무색무취한데다 은수저로도 검출되지 않아 독을 검수하는 궁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완자는 분노로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사람이 이토록 악할 수 있단 말인가! 기완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기필코 나를 죽이려한 흉수를 색출하여 댓가를 치르게 하리라!' -대의멸친-


   복사꽃이 흐드리지게 핀 봄날,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년이 산수화를 그리느라 붓놀림에 심취해 있었다. 산수화에는 젊은 두 남녀가 말을 나란히 달리며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산수화 속의 사내는 청년을 쏙 빼어닮은 것이 자신을 그린 것이 틀림없었는데, 여인은 누구일까. 청년이 산수화 속의 여인을 넋나간 듯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보탑실리, 그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구려! 내 진심을 그대에게 알릴 수 조차 없는 이 고통을 그 누가 알겠소!"

   청년은 어언 약관의 나이가 된 왕기로, 그가 보탑실리를 사모한 지도 어느새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6년 전, 왕기는 보탑실리와의 혼담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그녀와 혼인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혼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명덕태후는 몽고 여인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탈탈은 문득 20여년 전 무리들을 이끌고 사신단을 기습한 복면의 사내가 떠올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맹한 검법으로 두 합만에 자신의 검을 두동강냈던 사내가 최영이 아닐까! 최영이 휘두른 검에 장사성군의 검이 두동강나는 순간, 탈탈이 외쳤다. 

   "그자다!"

   최영의 힘은 실로 엄청났다. 20여년 전, 검술을 겨루었을 때 분명히 자신이 우위였는데, 지금에야 최영이 실력을 감춘 것임을 깨달았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얼마 후 고려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원군이 공격에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최영이 퇴각을 결정한 것이다. 

   본진으로 돌아온 최영은 분노에 찬 발걸음으로 탈탈의 막사를 찾아갔다.

   "우리 고려군이 목숨을 걸고 싸워 성문을 열었거늘, 어찌 공격에 나서지 않으신게요?"

   순간 탈탈이 검을 뽑자, 수십의 원나라 장수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최영도 검을 뽑아 들었다. 

   "대체 무엇하는 것이오?"

   탈탈이 검으로 최영을 겨누며 호통쳤다. 

   "나는 대원제국의 우승상이다. 감히 항거하지 마라!"

   수십 명의 장수들을 혼자 당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영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자 탈탈이 말했다.

   "검을 이리로 던져라!" 

   최영이 순순히 검을 던지자 탈탈이 검을 겨눈 채 외쳤다. 

   "모두 물러가라."

   단둘이 남게 되자, 탈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나를 잘도 속였구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20여년 전, 네가 복면한 무리들을 이끌고 대원의 사신단을 습격한 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고우성의 싸움-


   고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원군을 추격했다. 압록강에 이른 원군은 행군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때는 이미 봄이라 얼음이 녹아버리고 만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원군은 배수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배수진을 친 원군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이미 승세는 기울어 전사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 사이 왕보화가 간신히 나룻배 하나를 구해 아이유시리다라를 태웠다. 왕보화가 배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자 아이유시리다라가 손짓하며 말했다. 

   "보화 낭자도 타시오."

   왕보화가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남아서 적군과 싸우겠나이다. 황태자께서는 아무쪼록 옥체 무탈히 보존하옵소서."

   아이유시리다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아니되오! 보화 낭자를 두고 떠날 수 없소! 이건 명이오! 배에 타시오!"

   왕보화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명에 따를 수 없는 소녀를 부디 용서하옵소서."

   어느새 나룻배는 육지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멸문지화-


   누가 한많은 여인의 세월을 시샘했던가. 몽고의 황량한 초원에서 환갑의 나이를 넘긴 기황후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황제가 된 아이유시디라다에게 당부했다. 

   "어미가 죽거든 고려의 연천에 묻어 주시오. 어미에게 연천은 말할 수 없이 뜻깊은 곳이라오. 그리 해주시겠소?"

   연천은 기황후가 최영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곳에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 기황후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아이유시리다라가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가 어찌 어마마마의 뜻을 어길 수 있겠나이까?"

   기황후는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제 어미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소...... 부디 명군이 되어 중원을 회복토록 하시오......"

    이 말을 남긴 채 기황후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뜻하지 않게 공녀로 끌려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기황후는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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