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기황후 7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4. 6. 1. 06:00


   기황후 7화 조정우 역사소설

     


기황후

저자
조정우 지음
출판사
북카라반 | 2013-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고 픽션을 가미한 최고의 ‘역사 소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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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 최옹의 손자 최영과 기관의 아들 기자오가 알현을 청하였나이다."

   네살박이 왕자 왕기(훗날 공민왕)에게 서예를 가르치고 있던 충숙왕은 환관 유성의 보고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최옹의 손자와 기관의 아들이 어인 일로 과인을 찾아온 것이냐?"

   "소인이 들은 바로는 기자오의 여식이 최영과 혼약하였는데, 이번에 공녀로 선발된 지라, 공녀 선발을 취소하여 주십사 주청을 올리러 온 것이라 하옵니다."

   충숙왕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공녀 선발은 과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거늘, 만나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오면, 물러가라 이르겠나이다."

   유성이 물러가자 충숙왕은, 고사리손으로 붓을 잡고서 '高麗'자를 쓰고 있는 어린 왕자 왕기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나라의 왕이었던 내 아들 충혜가 원에 잡혀 있고, 나 또한 언제 원으로 잡혀갈지 모르는 몸이거늘......"

   '高麗'자를 다 쓴 어린 왕기는 붓을 벼루에 내려놓고는 충숙왕이 봐주기를 기다렸다. 네살박이가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필체였다. 충숙왕은 어린 아들이 쓴 글씨를 찬찬이 훓어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자가 이 아비를 닮아 서예에 재주가 있는듯 하나, 몽고족 치하의 이 땅에서 서예가 뛰어나다 한들 어디에 쓸꼬?"

   어린 왕기는 서글픈 얼굴의 충숙왕을 보자, 문득 어머니 덕비가 몹시 그리워져 똘망똘망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 어마마마를 뵙고 싶사옵니다."

   충숙왕이 어린 왕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비 또한 네 어미를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왕비께서 한사코 반대하니 어찌 하겠느냐?"

   20년 전, 덕비 홍씨를 왕비로 맞았던 충숙왕은 3년 후 원나라의 강요로 영왕 야선첩목아의 딸 복국장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투기가 심한 복국장공주는 충숙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덕비를 출궁시켜 민가에 살게 했다. 복국장공주가 죽자, 덕비는 충숙왕의 부름을 받고 복위했지만, 5년 만에 다시 원나라의 강요로 위왕 아목가의 딸 조국장공주가 왕비의 자리에 올라 덕비는 출궁당하고 말았다. 불과 1년 만에 조국장공주가 죽자, 덕비는 곤위에 복위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원의 조정은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다시 원의 황녀와 충숙왕의 국혼을 추진하였고, 충숙왕은 덕비를 지키기 위해 왕위를 맏아들 충혜에게 물려준 후 상왕이 되었지만, 충숙왕의 저의를 의심한 원나라 조정의 소환을 받아 결국 덕비와 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 원나라 공주로 세번째  충숙왕에게 시집온 경화공주 역시 친원파 대신들을 앞세워 덕비의 입궁을 막았던 것이다.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숙왕과 열여섯 살의 꽃다운 나이에 곤위에 오른 덕비의 지난 20년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남양에 유배중인 덕비를 생각하던 충숙왕은 문득 정혼녀를 빼앗긴 최영의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껴 어린 왕기를 처소로 돌려보낸 후 경화공주를 찾아갔다. 

   "주상께서 신첩의 처소에 어인 일이시나이까?"

   실로 오랜만의 발걸음이었다. 덕비의 입궁 문제로 충숙왕은 한달여 동안 경화공주의 처소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화공주가 반가운 얼굴로 맞자, 충숙왕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내, 공주께 청할 일이 있어 왔소."

   경화공주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상께서 신첩에게 청이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하명만 하소서."

   충숙왕이 잠시 주저하다가 운을 떼었다.

   "과인이 어찌 대원의 공주께 명을 내릴 수 있겠소. 청이 하나 있으니, 들어주신다면 고맙겠소."

   경화공주는 충숙왕이 출궁된 덕비를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하리라 짐작하고는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말씀하소서."

   "내 들으니, 과인의 조부 충렬왕의 왕사였던 최옹의 손자 정혼녀가 이번 공녀 명단에 있다 하던데, 최옹은 대대로 조정에 충성을 바친 가문이니, 과인의 낯을 봐서 공녀 명단에서 제외시켜 주실 수 없겠소?"

   순간 경화공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덕비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지만, 일단 공녀로 선발되면 황궁의 궁인이 되는 것이 원나라의 법도라 경화공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황공하오나, 공녀로 선발되면 황궁에 속하는 것이 대원의 법도라, 신첩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충숙왕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대원의 법도가 그러하다면 어찌하겠소......"

   덕비를 입궁시켜 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경화공주의 처소를 나오는 충숙왕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나라의 주권을 잃은 과인의 서러움을 누가 알아줄꼬?"

   덕비를 입궁시키는 것도, 최영의 정혼녀를 공녀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분하고 서러웠다. 


   "주상께서 너희들의 알현을 윤허치 아니하셨은즉, 물러가라!"

   수창궁의 문지기가 차디찬 말을 내뱉고는 대궐문을 닫아버렸다. 한가닥의 희망마저 사라지자, 최영은 절망감에 휩싸여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결혼도감으로 달려가 기완자를 구하고 싶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조정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훈을 최영은 감히 어길 수 없었다. 

   "아버님, 소자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물을 흘리던 기자오는 최영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다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일세. 내, 행주로 돌아가 방도를 찾아보려 하는데, 자네도 철원으로 돌아가 방도를 찾아보는게 어떻겠는가?"

   기자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을 뿐, 이미 딸을 구할 방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충숙왕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딸을 공녀 명단에서 빼줄 수 있으랴!

최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생은 주상께 다시 한번 주청을 올릴까 하옵니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 하게나. 난 이만 가보겠네."

   아무리 기다려도 수청궁의 문지기는 대궐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이틀째 끼니를 굶어 서있을 기력조차 없어진 최영은 털썩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날이 바뀌어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최영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영도령, 어서 일어나시오!"

   박불화였다. 최영은 탈진한 상태였지만, 박불화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불화 형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오?"

    박불화의 말에 최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불화 형님도 누이가 공녀로 선발되었습니까?"

    기완자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박불화였다. 이러한 박불화의 마음을 짐작조차 못하는 최영으로서는 박불화 역시 누이가 공녀로 선발되어 여기까지 온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박불화가 다급히 말했다. 

    "완자 누이 때문에 온 것이오. 몽고 놈들이 벌써 완자 누이를 데리고 떠났으니, 속히 추격해야 하오."

    박불화의 말에 최영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낭자가 공녀로 선발된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거늘, 어찌 벌써 떠났단 말이오?"

    박불화는 급한 마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최영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시간이 없으니 일단 나를 따르시오."

    박불화가 말을 세워 둔 곳으로 달려가자, 최영도 말을 매어 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최영이 말이 매어 있는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박불화가 말에 뛰어오르며 외쳤다. 

   "송악산 산마루로 갈 터이니 그리로 오시오!"

   박불화가 급히 말을 몰아 떠나자, 최영도 서둘러 말에 올랐으나, 이틀이나 굶은 말은 기력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최영은 급한 마음에 채찍으로 말을 후려쳤으나, 그래도 말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급해진 최영이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주인 아씨가 몽고군에게 끌려갔다. 어서 가자!"

   최영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제야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원나라 사신단 행렬이 송악산의 산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날이 11월 1일, 때는 가을이었지만 사신단 행렬의 행로인 압록강과 요동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어 공녀를 선발한지 불과 이틀만에 서둘러 출발했던 것이다. 개경에서 대도까지는 마차로 한달 가량이 걸리는 거리였다. 눈내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대도에 도착하기 위해 사신단 행렬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강행군을 이어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의 끝자락에 50명의 공녀들이 탄 다섯 대의 수레가 요란한 바퀴소리를 내며 송악산의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비좁은 수레에 열명이나 되는 공녀가 탔기 때문에 수레가 흔들리면 서로 부딛치기 일쑤였다. 

   "악!"

   수레가 거친 산길을 지나다 심하게 흔들리자, 누군가의 머리가 기완자의 이마에 세차게 부딪치고 만 것이다. 기완자는 충격으로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 하였다. 기완자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그녀와 부딪친 낭자는 정신을 잃은 듯 수레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기완자가 낭자를 일으켜 세우며 흔들었다. 

   "소화 낭자, 정신차리시오!"

   중대광 강융의 딸 강소화였다. 기완자가 아무리 흔들어도 강소화는 의식을 찾지 못했다. 기완자가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이보시오! 수레를 멈추시오!"

   기완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마부는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소! 머리를 다친 듯하니, 안정을 취하게 해주시오!"

   "대장의 명이 없는 한, 수레를 멈출 수 없다!"

   호흡이 곤란한 듯, 강소화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대로 놔두면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 듯싶었다. 기완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수레를 멈추시오!"

   마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수레를 몰았다. 강소화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지자, 기완자는 무언가를 작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더니, 갑자기 수레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기완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사신단 호위군들이 말을 몰아 달려와 기완자를 포위한 후 창을 겨누었다. 

   "도망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기완자가 땅을 짚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오! 수레를 멈추시오! 머리를 다친 낭자가 있단 말이오!"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듯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운 기완자를 보자, 사신단 호위군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창을 거두어 들였다. 그때,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을 몰아 기완자 앞으로 다가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스무 살 쯤 되었을까. 여느 미청년에 못지 않은 수려한 얼굴의 사내는 원나라 사신단 호위대장 탈탈이었다. 천하를 지배하는 원나라 사신단 호위대장이 이토록 어리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기완자는 잠시 멈칫하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다친 낭자가 있소! 잠시 행군을 멈추어 주시오!"

   황후족 옹기라트 가문 출신으로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 백안의 조카 탈탈은 이제 겨우 약관이지만, 문무 양과에 급제하여 장군에 오른 천하의 기재였다. 

   탈탈은 기완자의 말이 사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기완자의 눈빛이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탈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들어 명을 내렸다. 

   "잠시 행군을 멈춘다!"

   수레가 멈추자, 기완자는 급히 수레에 뛰어올라 강소화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강소화의 숨결이 점점 진정되기 시작했다. 기완자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조정우 인터파크 인터뷰 : 로맨틱한 역사소설가가 바라본 기황후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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