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집

천하제일 여검객 유지 1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4. 1. 11. 06:00

   천하제일 여검객 유지 1화 조정우 역사소설

   

   수려한 자색 비단옷을 입은 소녀가 미친듯이 말을 몰아 남산의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때마침 거세게 불어온 산바람에 긴머리가 이리저리 흩날려 앞을 볼 수 없을 지경이지만, 소녀는 말고삐를 바짝 당겨 쏜살처럼 말을 몰았다. 말은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비탈진 산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말이 지칠대로 지쳐 더이상 달릴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소녀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소녀는 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많이 힘드느냐? 미안하구나. 내 마음이 힘든 것만 알고, 너의 힘듦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구나!"

   소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말을 내버려 둔 채 온갖 꽃들이 만발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꽃이 만발한 산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는 소녀는 그 어떤 꽃보다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소녀는 화랑도의 2대 풍월주 미진부의 여식 미실이었다. 

   어쩐지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산길을 걷던 미실이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리도 야박하게 궁에서 쫓겨났만 말인가!"

   진흥왕의 아우 세종과 혼인의 연을 맺은 지 수개월 만에 지소태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난 미실은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세종이 사무칠 정도로 그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상처받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듯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서릿발같은 지소태후의 한마디가 여전히 미실의 귓전에 울리고 있었다. 

   "이 천한 것을 어서 썩 끌어내거라."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는 법흥왕의 외손이자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는 화랑도의 상선이 아니던가! 지소태후의 외조모 선혜공주의 손녀인 미실의 할머니 옥진은 대원신통의 종(宗 혈통의 수장)으로 옥진의 아버지가 화랑도의 초대 풍월주 위화랑이 아니던가!

   천한 것이라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미실은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던 중 미실은 문득 아무리 지소태후가 미워도 결국에는 낭군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시어머니라는 생각에 무릎을 꿇으며 탄식했다. 

   "하늘이시여! 시어머님을 미워하는 이 사악한 마음을 용서하소서!"

   바로 그때였다. '챙챙' 멀리서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이 누군가 검술 대련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 깊은 산중에서 대체 누가 검술 대련을 하고 있단 말인가!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경쾌하고 힘차게 부딪치는 검날 소리에 미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여보 쯤 갔을까. 가녀린 몸매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백의의 여인과 머리에 화랑 두건을 쓴 청의의 사내가 검을 맞부딛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미실은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번개처럼 빠른 두 사람의 검법은 마치 신선의 경지에 이른 듯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한번은 여인이, 한번은 사내가, 약속이라도 한듯 번갈아가며 한쪽은 검을 휘두르고 한쪽은 검을 막았다. 물흐르듯 유연하면서도 번개처럼 빠른 두 사람의 검이 미실을 무아지경에 빠뜨렸다. 

   머리에 화랑 두건을 쓴 사내는 화랑이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여인은 누구일까? 

   미실은 치마 끝을 들어 살금살금 그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로 그때, 비호처럼 날렵하게 여인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얼굴이 미실의 시야에 들어왔다. 미실의 종숙부인 사다함이 아닌가! 미실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사다함을 불렀다. 

   "사다함 오라버니!"

   열여섯인 사다함은 촌수로는 열다섯인 미실의 종숙부였지만, 나이 차이가 불과 한살이라 미실은 사다함을 오라버니라 불렀던 것이다. 난데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사다함이 미실을 힐끗 쳐다보는 사이, 여인의 검이 사다함의 옷자락을 베고 말았다. 순간 사다함이 신음을 토했다. 

   "윽!"

   여인의 검이 사다함의 옷자락만 벤 것이 아니라 검을 든 오른팔도 살짝 벤 것이다. 여인은 급히 옷을 찢어 사다함을 싸매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미실을 향해 호통쳤다. 

   "검술 대련 중에 대체 어쩌자고 소리를 지르셨소?"

   사다함이 손을 들며 여인에게 말했다. 

   "유지 낭자, 내 조금 베인 것 뿐이니, 개이치 마시구려."

   열대여섯 쯤 되었을까. 여인의 이름은 유지였다. 유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사다함을 바라보았다. 

   "천만다행이옵니다."

   미실은 자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사다함 오라버니, 괜찮으시옵니까?"

  사다함이 호탕하게 웃으며 오른팔을 들어보였다. 

   "하하하, 괜찮다마다. 보면 모르겠느냐?"

   미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울먹였다. 

   "송구하옵니다."

   사다함이 미실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울지 말거라. 괜찮다 하질 않느냐?"

   유지가 한동안 눈을 내리깔아 미실을 쏘아보는데, 사다함이 미소를 지으며 유지에게 말했다. 

   "내 누이 미실이오. 촌수로는 종조카이나, 친누이나 다름없소."

   남동생 하나만 있을 뿐, 오라버니가 없는 미실과 누이가 없는 사다함은 어릴 적부터 잘 어울려 친남매처럼 가깝게 지내왔던 것이다.

   미실은 입신의 경지에 오른 유지의 검술을 본 터라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지는 고개만 끄덕여 무뚝묵하게 인사했다. 

   "유지라 하오."

   삼베옷을 입은 유지는 평민이 틀림없어 보였다. 미실은 대원신통인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유지의 태도에 기분이 언짢았다. 미실과 유지 사이에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류가 흘렀다. 

   여자의 직감이라 할까. 미실은 유지가 사다함을 사모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실 이 세상의 어떤 여인보다 용모가 수려한 사다함은 그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미소년이 아닌가! 미실 역시 사다함이 종숙부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마음을 사로잡혔으리라. 어린 시절, 할머니 옥진에게 사다함한테 시집가겠다며 응석부리던 기억이 떠오르자 미실은 귓볼이 빨개졌다. 

   미실은 힐끗 유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초승달처럼 가늘고 길게 굽어진 눈썹, 초롱초롱 빛나는 맑은 눈동자, 조각한 듯한 오똑한 코, 앵두처럼 붉은 입술. 백옥처럼 하얀 얼굴, 유지는 궁에서도 흔치 않은 빼어난 미모였다. 


[기황후] 단몇줄의 역사적 기록이 드라마적 판타지를 만들어 (주리니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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