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집

천하제일 여검객 유지 6화 조정우 역사소설

조정우 2014. 2. 23. 06:00

   천하제일 여검객 유지 6화 조정우 역사소설

   

   사다함, 미실, 비보랑이 문노의 초가집에 당도할 무렵, 삼베옷을 입은 사내가 초가집 앞에 멍하니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다함이 미소를 지으며 나직히 불렀다. 

   "무관랑!"

   사다함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무관랑은 미실을 보자 깜짝 놀란 듯이 당황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미실 낭주가 아니옵니까? 그간 강녕히 잘 지내셨사옵니까?"

   사다함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인 무관랑은 작년 이 무렵 쯤, 미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불과 1년만에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진 미실의 자태가 무관랑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무관랑이 놀란 것은 미실이 사다함의 곁에 너무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관랑의 시선을 의식한 미실은 그제야 사다함의 곁에서 조금 떨어지며 인사를 건넸다. 

   "무관랑,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미실이 궁궐에서 보낸 지난 1년은 마치 십년처럼 지루한 세월이었기에 무관랑과 인사를 나눈 것이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무관랑이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고귀하신 낭주께서 어찌 평민인 소생에게 공대(존댓말)를 하시옵니까? 말씀을 낮추소서."

   미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관랑께서는 소녀의 친오라비와도 같은 사다함 오라버니의 죽마고우이시니, 공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는 사다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다함 오라버니, 그렇지 않사옵니까?"

   사다함이 대답하기도 전에 비보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관랑은 소생의 사형이시니, 미실 누님의 말씀, 지당하시옵니다."

   사다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보랑의 말이 지극히 옳다."

  무관랑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낭주께서 천한 저를 공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바로 그때였다. 유지가 초가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순간, 비보랑과 무관랑의 시선이 유지에게 쏠렸다. 미실은 비보랑과 무관랑이 유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보랑이 사모하는 여인이 유지 낭자란 말인가!'

   언젠가 비보랑이 미실에게 마음 깊이 사모하는 여인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유지를 바라보았다. 유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사다함 사형, 비보랑 사제를 부르십니다."

  사다함과 비보랑은 미실에게 기다리라는 눈짓을 한 후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사다함과 비보랑이 인사를 올리자, 문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 사매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사다함이 대답했다. 

   "제자의 누이 미실이 나서서 잘 해결되었사옵니다."

   문노가 안도하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으로 잘 되었구나!"

   마치 석상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문노가 실로 오랜만에 제자들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다함과 비보랑은 유지에 대한 문노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다함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부님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제자의 일에 이 사부가 한 것이 없으니,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문노는 문득 미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사다함에게 말했다. 

   "미실 낭주를 안으로 모시거라."

   미실이 사다함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자, 문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순간 사다함과 미실이 당황하며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사부님!"

   "문노공! 어찌 소녀에게......"

   기실 2세 풍월주인 미실의 아버지 미진부조차 가야 출신 문화공주의 아들인 문노를 깍듯이 대해왔었기에 미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노는 사다함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짓을 보낸 후 미실에게 말했다. 

   "미실 낭주, 그대에게 참으로 큰 빚을 지었소. 혹여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오."

   미실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문노가 성심을 다해 도와준다면 필시 사다함과 혼인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 틀림없으리라. 미실은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말했다. 

   "모든 것이 소녀로 인해 생긴 일이온데, 큰 빚이라니요. 가당치 않은 말씀이옵니다."

   문노가 고개를 저었다. 

   "낭주의 잘못이 아니니, 낭주께서는 자책하지 마시오."

   "하오나......"

   미실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문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몸은 낭주의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오."

   미실은 부끄러워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소녀야말로 공의 크신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문노가 사다함을 보며 말했다.

   "사다함아, 네가 미실 낭주를 바래다 드리거라."

   "그리하겠나이다."

   사다함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비보랑도 나섰다. 

   "제자도 사다함 사형을 따라가겠나이다."

   문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거라."


   사다함이 미실을 데리고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졸지에 유지와 단둘이 남게 된 무관랑은 수줍어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내답지 않게 무관랑이 수줍어 하는 모습에 유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관랑에게 유지의 미소는 마치 선녀의 미소처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무관랑이 더욱 수줍어하며 얼굴이 붉게 물들자, 유지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사형께서는 소녀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신지요."

   무관랑은 몹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당황하는 무관랑의 모습이 어쩐지 우스웠지만 유지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면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다함과 비보랑이 미실과 함께 초가집에서 나왔다. 사다함이 유지와 무관랑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사매, 사형, 나와 비보랑은 미실 누이를 바래다 주고 올 터이니, 사매와 사형은 그간 사부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어떻겠소?"

   "그리하지요."

   유지가 대답하자, 무관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다함과 비보랑이 미실과 함께 떠나자, 유지와 무관랑은 다시 단둘이 남게 되었다. 여전히 수줍어 어쩔 줄 몰라하는 무관랑에게 유지가 말했다. 

   "소녀는 이미 사부님을 뵈었으니, 사형께서 사부님을 모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무관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매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유지가 숲속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자, 무관랑은 문득 유지가 걱정되었다. 기실 무관랑은 유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문노에게 사다함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은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던 것이다. 유지의 뒷모습이 숲풀에 가려 보이지 않으려는 찰나, 무관랑이 유지를 불렀다. 

   "사매!"

   무관랑이 외치는 소리에 유지가 고개를 돌렸다. 

   "소녀에게 볼 일이 있으신지요."

   무관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소생 또한 사부님을 뵈었으니...... 사매를 따라가면 아니될지요......"

   순간 유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녀가 어디를 가는지 알기나 하시는지요."

   전혀 예상치 못한 유지의 말에 무관랑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술을 연마하러 가시는 것이 아니신지요."

   유지는 두손을 양쪽으로 벌려 허리에 검이 없음을 보여주며 정중히 말했다. 

   "검술을 연마하러 가는 것이 아니니...... 소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실, 유지는 울적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숲속에서 한바탕 울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고요한 숲속에 이르자, 유지는 참았던 눈물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사다함 사형, 사형께서 소녀의 마음을 일만분의 일이라도 알아주신다면, 여한이 없으리다!'

   해가 저물도록 유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사다함, 비보랑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미실에게 미실의 어머니 묘도가 나무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실아, 대체 어디 있다 이제 오느냐?"

   묘도의 물음에 미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미실이 침묵하자 사다함이 나섰다. 

   "미실은 비보랑과 제가 데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미실을 제때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한 탓이니, 아무쪼록 미실을 탓하지 마소서."

   묘도는 자신의 딸 연배인 사촌아우 사다함의 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사촌아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는 미실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미실의 귀에다 속삭였다. 

   "황후마마가 와 계시다."(당시 신라는 왕을 제라 칭했으므로 국모를 황후라 칭했다)

   미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묘도의 동생인 사도황후가 궁에서 쫓겨난 미실이 걱정되어 온 것이겠지만, 호랑이 같은 성미의 지소태후가 사도황후가 미실을 찾아온 것을 아는 날에는 한바탕 사단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기실, 미실이 지소태후의 노여움을 사서 궁에서 쫓겨난 것도 지소태후가 사도황후를 폐하려 한다는 사실을 낭군인 세종으로부터 들을 것을 사도황후에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사도황후가 지소태후 모르게 미실을 찾아온 사실이 들통나면 좋을 것이 없었다. 미실이 묘도의 귀에 속삭였다. 

   "황후마마를 뵙게 하여주소서."

   묘도가 다시 미실의 귀에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마마가 너를 찾았다."

   묘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실은 사다함과 비보랑에게 인사한 후 외할머니 옥진의 처소로 발걸음을 향했다. 사도황후가 자신의 어머니인 옥진과 함께 있으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진작부터 사도황후에게 할 말이 있던 미실은 기척도 없이 옥진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말았다. 

   "황후마마!"

   "미실아!"

   사도황후는 미실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미실을 덥썩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도우려다 지소태후의 노여움을 사 궁에서 쫓겨난 미실의 안색이 초췌함을 보자 사도황후는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미실아, 그간 잘 지냈느냐? 이 숙모는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구나......" 

  미실을 친딸처럼 총애했던 사도황후로서는 미실이 궁에서 쫓겨난 이래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미실이 오히려 사도황후를 위로하듯 말했다. 

  "소녀는 괜찮사오니 심려치 마소서."

  사도황후가 근심어린 얼굴로 말했다. 

  "정말 괜찮으냐? 헌데 얼굴이 왜 이리 수척하단 말이냐?" 

  궁에서 쫓겨난 후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미실이 사다함의 팔에 검흔이 생긴 일로 더욱 수척해졌으니 사도황후가 근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미실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록 소녀의 얼굴이 수척해졌을지언정, 마음만은 편하오니 그리 심려하실 일이 못되옵니다."

  미실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된듯 사도황후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마음이 편하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사도황후의 옆에 앉아 있던 옥진이 한마디 거들었다. 

  "미실아, 아무 걱정할 것 없다. 황후마마께서 네 뒷배를 봐주고 계시니 조만간 재입궁할 날이 올 터, 이제는 마음 편히 기다리면 될 것이다."

  옥진의 말에 미실의 마음이 심난해졌다. 미실은 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사다함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안 이상 궁으로 되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미실이 옥진의 눈치를 보더니 사도황후에게 말했다. 

   "소녀, 황후마마께 은밀히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미실의 말에 옥진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어허, 이 할미에게 비밀로 하고 싶은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옥진은 미실이 사도황후에게 무슨 말을 은밀히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옥진은 미실이 사다함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실을 쏘아보는 옥진에게 사도황후가 공손히 말했다. 

  "미실의 고통은 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여 미실이 원하는대로 들어줄 생각이니, 아무쪼록 어머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소서."

  옥진은 사도황후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사적으로는 사도황후가 자신의 딸이지만 일국의 국모가 아닌가! 옥진이 나가자 사도황후가 미실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미실이 작심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 궁을 떠나 살고 싶사옵니다."

  사도황후는 이미 예상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사다함 때문이냐?"

  "그러하옵니다. 소녀, 사다함 오라버니를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사옵니다."

  미실의 말에 사도황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도황후의 얼굴은 걱정하는 것 같기고 하고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사도황후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사도황후가 말을 이었다. 

  "태후마마께서 융명을 세종 전군의 비로 정하셨다."

  미실은 사도황후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했다. 마음에서 멀어진 세종 전군이 누구와 혼인하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리라. 사도황후가 미실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비록 융명이 세종 전군의 비가 된다 하여도 네가 먼저 세종 전군과 혼인하였으니, 태후마마의 노여움이 풀린다면 궁으로 돌아올 수 있거늘, 그리도 사다함과 혼인하고 싶단 말이냐?" 

   미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로 사다함 오라버니와 혼인하고 싶사옵니다." 

   사도황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락하마. 정녕 그것이 네 뜻이라면, 뜻대로 하거라." 

   사도황후의 말에 미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흥왕이 화랑도의 풍월주인 이화랑에게 금륜태자의 교육을 맡기자, 이화랑은 화랑도를 관할하고 있는 지소태후에게 풍월주 자리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혔다. 지소태후가 이화랑에게 물었다.

  "허면, 누구를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소?"

  이화랑이 주저없이 말했다. 

  "신의 조카 사다함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따르는 낭도들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화랑도에서 검술이 으뜸이니 능히 풍월주의 소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당시 화랑도 내에서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검술도 으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뛰어나니 낭도들은 사다함이 풍월주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라 믿고 있었다. 이화랑의 말에 지소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또한 사다함의 재주가 영특함을 예전부터 주시하고 있었소. 다만, 아직  나이가 어리니 사다함의 생각이 어떤지 들어본 연후에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지소태후의 부름을 받은 사다함은 영문도 모른 채 궁에 입궐했다. 총기가 넘치면서도 마치 옥을 깍아 놓은 듯 잘생긴 사다함을 보자 지소태후가 사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들으니, 화랑도에서 너를 따르는 낭도들이 가장 많다고 하더구나. 낭도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느냐?"

  지소태후의 물음에 사다함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은 다만 낭도들을 사랑하기를 제 몸처럼 할 뿐이옵니다."

  사다함의 말에 지소태후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여섯의 소년의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닌가! 지소태후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내 너를 풍월주에 임명할까 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실로 뜻밖의 지소태후의 말에 사다함이 몹시 당황하며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재주가 부족하여 풍월주의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없사오니, 바라옵건데, 신의 스승을 풍월주에 임명하여 주옵소서."

  지소태후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너의 스승 문노는 비록 가야 출신이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공만으로도 국선의 자리에 오르고도 남을 것이다."

  지소태후는 그 즉시 조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 지소태후가 문노를 화랑도의 국선에 임명하노니 문노는 내 뜻을 받들라.'

  이제껏 화랑도의 풍월주는 화랑 중에서 선출하였기에 가야 출신의 문노를 국선이라는 명칭으로 화랑도를 통솔토록 한 것이다. 조서를 쓴 지소태후가 사다함에게 말했다. 

  "내, 너를 화랑도의 부제에 임명할 터이니, 네 사부를 잘 보좌토록 하거라."

  사다함은 더이상 지소태후의 뜻을 마다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 사다함, 부제의 소임을 감당하기 부족하오나, 성심을 다해 태후마마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사다함이 자신의 뜻에 따르자 지소태후는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열여섯이면 능히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나이인데, 혹여 정해진 혼담이 있느냐?"

  정해진 혼담이 있느냐는 말에 사다함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다함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신, 정, 정해진 혼담은 없사오나......" 

  순간 지소태후는 사다함이 마음에 둔 여인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혹여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느냐?"

  사다함은 차마 거짓을 고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하옵니다."

  지소태후는 흥미롭다는 듯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누구냐?"

  사다함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저 혼자 사모하는 것이라 차마 아뢸 수 없사옵니다."

  지소태후는 사다함이 난처해하자 더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지소태후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알겠다. 실은 너를 왕실의 공주와 맺어주려 하였건만, 네가 마음에 없는 듯하니......"

  비록 지소태후가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있었지만, 말투는 사다함을 나무라는 어조였다. 장차 화랑도의 풍월주가 될 사람이 여인 하나에 빠져 부마가 되는 것조차 마다하니 지소태후의 눈에 달가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소태후는 사다함을 나무랄 생각은 없어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되었다. 그만 물러가 보거라."

  지소태후의 처소에서 물러난 사다함은 마음이 무거웠다. 화랑도의 2인자인 부제의 소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뿐더러 궁에서 쫓겨난 미실을 위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것이 몹시 후회되었던 것이다. 사다함은 가슴을 치며 자책했다.

   "미실아, 내, 오늘 태후마마를 알현하였건만, 궁에서 쫓겨난 너를 위해 한마디도 아뢰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