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

천하장사 김덕령 1화 조정우 연재소설

조정우 2015. 7. 6. 12:00

  천하장사 김덕령 1화 조정우 연재소설

  

  가만히 있어도 후덥지근한 단오날, 이몽룡과 성춘향이 처음 만났다는 광한루 마당에서 씨름대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씨름꾼으로서는 체격이 왜소한 7척의 홍샅바의 사내가 9척 거한의 청샅바의 사내를 단박에 쓰러뜨리자 광한루 마당을 꽉 메운 인파의 우레같은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와! 팔도 천하장사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홍샅바의 사내는 지난 수 년간 전라도, 경상도, 충정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전국팔도의 씨름대회를 휩쓸어 팔도 천하장사라 불리우는 김덕령이었다. 

   불과 7척(당시 1척은 24.5cm)의 김덕령이 9척의 거한 장사를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니,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에 광한루 마당이 떠나갈 듯하였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9척의 장사를 어린 아이를 상대하듯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는 김덕령의 괴력에 관중들은 감탄해 마지 않을 수 없었다. 

  김덕령이 전국 각지의 장사들을 차례차례로 쓰러뜨려 마침내 결승전에 오르자 광한루 마당의 관중들은 김덕령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하듯 우레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때 김덕령의 상대인 청샅바 장사가 씨름판에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최장사, 힘내라!"

   김덕령이 결승전에서 맞붙는 상대는 바로 이곳 남원에서 힘 꽤나 쓴 다 소문난 최담령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씨름꾼 김덕령이 아닌가! 최담령과 동향인 이곳 남원 고을의 관중들조차 김덕령의 승리를 확신하듯 김덕령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햇빛을 보지 않고 자란 여인의 피부처럼 하얀 최담령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김덕령은 의외라는 듯 최담령에게 말을 걸었다. 

   "사내 대장부인 그대의 얼굴이 사대부 집 규수처럼 하얀 것을 보니, 그대는 집에서 책만 읽는 백면서생 같구려."

    사대부 집안의 규수들은 어릴 때부터 얼굴을 가리고 다녀 햇빛을 보지 않고 자라 얼굴이 하얗지만, 사내의 얼굴이 하얀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최담령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는 김덕령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얼굴이 희던 검던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오."

   김덕령은 최담령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긴 하오. 내가 상관할바 아니지......"

   김덕령은 귀티나는 차림세의 최담령의 샅바를 잡으며 생각했다. 

  '이 자의 차림세를 보면 부유한 사대부 집 자제가 틀림없는데, 무엇 때문에 땀냄새나는 씨름판에 나왔을까?'

   양반들은 천민은 물론 평민과도 몸을 부딛치는 것을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겼기에 몰락한 양반 가문의 사내가 아니면 씨름대회에 나오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최담령이 수수한 삼베옷을 입긴 했지만, 여인처럼 하얀 얼굴에다, 귀티나는 차림세를 보아하니, 부유한 양반 집 자제가 틀림없어 보이는데 씨름판에 나온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아직 시합이 시작되기 전이라, 김덕령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최담령의 샅바를 잡은 채 물었다.

   "내, 그대를 보아하니, 사대부 집 자제가 틀림없어 보이는데, 씨름판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최담령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은 실로 뜻 밖이었다.

   "내, 그대와 한번 겨루어 보고 싶어 나온 것이오."

   힘에 있어서는 천하의 적수가 없다는 자신과 겨루어 보고 싶어 나왔다니! 순간 김덕령은 여인처럼 얼굴이 하얀 최담령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장사는 장사를 알아보는 법, 김덕령은 최담령이 샅바를 틀어쥔 자세만 봐도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려대자, 김덕령은 두 손으로 최담령의 샅바를 당겨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려 했지만, 놀랍게도 최덕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최담령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얍!"

   집 채 만한 나무도 번쩍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천하장사인 김덕령이 기합을 지르며 재차 최담령을 번쩍 들어 올리려 했지만, 최담령은 이번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얍!"

   오기가 생긴 김덕령이 또 다시 기합을 지르며 온힘을 다해 최담령을 들어올리자, 최담령의 발꿈치가 붕 뜨며 끌려오기 시작했다. 

   김덕령이 업어치기로 최담령을 내동댕이치려는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덕령의 업어치기에 쓰러질 듯하던 최담령이 되치기로 김덕령을 쓰러뜨리고 만 것이다. 

   "와! 우리 고을의 최담령이 천하장사 김덕령을 이겼다!"

   남원 고을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성 소리에 광한루 마당이 떠나갈 듯하였다. 

   김덕령은 자신이 졌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듯 씨름판에 무릎을 꿇은 채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이때 관중들의 환호성에 손을 들어 답례하던 최담령이 김덕령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비록 이기긴 하였으나 운이 좋아 이긴 것이니, 진정한 승리자는 그대 김덕령이오."

   겸손하기 짝이 없는 최덕령의 손을 잡은 김덕령은 호탕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하하하...... 최장사는 참으로 겸손하시구려. 내가 실력이 모자라 진 것이 아니겠소?"

   최담령의 손을 잡고 일어난 김덕령은 최담령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서로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성 속에 김덕령과 최담령이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있는데, 남원 부사 조의가 최담령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최장사, 수고했네."

   자기 고을의 사또인 조의가 악수를 청하자, 최담령은 잡고 있던 김덕령의 손을 놓고서 공손히 조의의 악수를 받았다. 이때 조의가 물었다. 

   "최장사, 자네의 본관이 전주 최씨가 아닌가?"

   최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주 최씨가 맞습니다."

   남원에는 전주 최씨 가문이 부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최담령을 응원하러 온 자는 단 한 명도 없는 듯하여 조의가 물은 것이다. 조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가문 사람들이 혹여 차후에 자네가 씨름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만류한다면, 나를 찾아오게나."

   남원의 유지인 전주 최씨는 전형적인 사대부 양반 가문으로 자신의 가문 사람이 씨름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좋아할 턱이 없었다. 조의는 최담령이 가문 사람들의 만류로 다음 씨름대회에 나오지 못할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때 최담령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사또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오나, 소생은 이미 가문 의 버림받은 몸이라 가문 사람 누구도 소생을 만류하지 아니할 것이오니, 그 점은 심려치 마옵소서."

   이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이 불만에 찬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흥, 전주 최씨 가문에서 천하장사가 나온 것이야말로 가문의 영광인데, 전주 최씨 양반들은 너무 고지식하군요!"

   조의는 자신이 본의 아니게 전주 최씨 가문이 비난받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담령이 흥분한 관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들며 말했다. 

   "소생이 가문의 버림을 받은 것은, 소생이 못나 그런 것이지, 가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거니와, 이번 씨름대회 출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니, 아무쪼록 소생이 우리 가문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오."

   최담령의 말을 들은 관중들이 돌연 숙연해졌다. 대부분이 평민인 관중들은 최담령이 양반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에게 존대말은 쓴 것에 대해 크게 감격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최담령을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장사는 힘만 천하장사가 아니라 인품도 훌륭하시오!"

   관중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 자체가 꺼림직한 조의는 관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제 씨름대회가 끝났으니, 모두 돌아가 단오날을 즐기도록 하라."

   당시 최고의 명절 중 하나인 단오날에는 가난한 백성들조차 일손을 멈추고, 윷놀이, 제기차기, 널뛰기 등 다양한 놀이를 하며 즐겼다. 

   관중들이 하나둘씩 해산하기 시작하자 조의는 이제서야 김덕령에게 말을 건넸다. 

   "김장사, 자네도 수고했네."

   그리고는 최담령과 김덕령을 보며 물었다.

   "자네들, 나와 술 한잔 하지 않겠는가?"

   김덕령은 최담령이라면 몰라도 조의와는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쯤 가문의 친지들이 소생의 집에 모여 소생을 기다리고 있을 터라, 소생은 이만 물러가보겠나이다."

   최담령도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지금, 조의와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소생 또한 가족을 만나보러 가야 하오니, 다른 날에 부사 나리와 술 한잔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조의는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는 최담령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날도 좋겠지. 언제 한번 날을 잡아보세."

   최담령과 김덕령은 조의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서 함께 자리를 떠났다. 광한루 마당을 나서자 최담령이 김덕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김장사, 이 몸의 누추한 집이 광한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소이다. 이 몸과 술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소."

   김덕령은 마음이 통하는 최담령과 술 한잔 하고 싶던 차였기에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최담령의 집은 광한루 왼쪽의 밤나무 숲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최담령은 김덕령을 자신의 집 마당에 있는 작은 정자로 안내했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어 김덕령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말릴 수 있어 참으로 좋소. 이 몸을 귀하의 집에 초대하여 주서셔 정말 감사하오."

   김덕령의 말에 최담령이 손을 내저으며 겸양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팔도의 천하장사이신 김장사께서 소생의 누추한 집을 방문해 주셔서 영광일 따름이오."

   자신을 높여주는 최덕령의 말에 김덕령은 오히려 부끄러웠다.

   "소생은 무식한 씨름꾼일 뿐인데, 말씀이 지나치시오."

   최담령이 뭔가 말하려는 찰나, 단아한 자태의 여인이 술병과 술잔이 놓인 쟁반을 든 채 정자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이 최담령에게 쟁반을 건네자 최담령이 눈으로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생의 아내되는 사람이오."

   여인은 최담령의 아내 유씨였다. 유씨가 낯선 사내를 대하는 것이 수줍은 듯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김덕령이 답례인사를 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씨는 마치 앵무세처럼 김덕령의 인삿말을 따라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렸다. 최담령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부인이 내게 시집와서 인사를 나눈 사내는 그대가 처음이오. 낯선 사내를 대하는 것이 수줍어 그런 것일터, 아무쪼록 양해하여 주시오."

  김덕령은 최담령이 손님을 거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20대로 보이는 최담령의 부인이 여지껏 단 한 차례도 손님을 만난 적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김덕령은 문득 최담령의 나이가 궁금해져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나이를 여쭈어도 되겠소?"

   햇빛을 보지 않고 자란 듯 얼굴이 하얀 최담령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소생의 나이가 궁금하시오? 소생의 나이, 올해로 스물여덟이오. 그대의 나이는 어찌 되오?"

   최담령은 그야말로 동안이었다. 김덕령은 최담령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줄 알고 물었던 것이다. 원래 나이를 물을 때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묻는 것이 이 당시 예의였다. 김덕령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최담령에게 실례했다는 듯 머리를 글적이며 말했다.

   "최형이 소생보다 나이가 다섯이나 많으신데, 실례했소이다."

   최담령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 몸은 나이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니, 지기로 지냅시다."

   마음이 통하는 지기가 생겼다는 생각에 김덕령은 말 할 수 없이 기뻤다. 김덕령이 몹시 기쁜 표정을 지으며 최담령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기왕에 지기가 될 바에 평생지기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최담령도 몹시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대와 같은 평생지기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있겠소?"

   김덕령과 최담령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평생지기를 얻은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네이버 웹소설 연재 링크 (네이버 웹소설에서 4화까지 연재 중입니다)


http://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432212